0023 ----------------------------------------------
뇌룡출도(雷龍出道)
위풍있는 털옷을 입고 있는 장년인이 훗하고 웃으며 말했다.
"교준! 그 꼴이 뭔가? 어서 일어나게!"
"네! 문주님!"
교준은 철혈문주의 말을 듣자마자 전신에 힘을 돋우어서 일어났다. 역시 맨 앞에 서 있는 존재는 쌍문사가의 지존급이자 낙양무림을 주름잡는 철혈문주(鐵血門主)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 도열해 있는 6인의 고수들은 철혈문의 장로(長老)일 것이고, 장로 뒤에 있는 자들은 철혈문의 실리를 지탱하고 있는 당주(當主)인 것이다.
이들의 무공이나 숫자로 볼 때 구파일방에도 그렇게 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있자 철혈문주가 느긋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백웅이라고 했던가? 자네의 용건은 아직 안 끝났을 텐데."
"......"
나는 머리를 굴렸다. 지금 철혈문주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을 걸어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당연히 뭔가 저의가 있기 때문이리라.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대답했다.
"아니, 내 용건은 끝났소. 원하는대로 비무(比武)가 내 승리로 끝났잖소?"
내 손가락은 교준의 부러진 칼날을 향하고 있었다. 벽에 꽂혀있는 칼날을 본 임검당주 교준이 수치스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즉 나는 이 자리에서 용건이 해결되었음을 주장하며 재빨리 물러나려는 생각이다.
' 빨리 결판내 버리길 잘 했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으면 꼼짝없이 저들 중 하나와 겨뤄야 했을 것이다.'
반쯤은 억지지만 이게 통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비무라는 건 도전하는 쪽이 우선권을 지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하에 명성높은 철혈문주이니 함부로 나를 죽이려 들지 않을거라는 계산도 있었다.
철혈문주는 팔짱을 낀 채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임검당주 교준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이 교준! 진 건가?"
그러자 교준은 창피한 듯 고개를 숙이다가 안색을 되돌리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좋아, 잘 했어.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
"......"
"그럼 백웅, 다음 비무를 준비하게."
엉?!
이게 무슨 소리냐?!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철혈문주가 나를 친구처럼 부르면서, 당연스럽게 다음 비무를 종용하는 모습에 당황했다. 마치 한 줌의 반론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당연히 이 자리에서 비무를 더 해봤자 얻을 게 없으므로 항의했다.
"무슨 소리요? 비무가 끝났으니 나는 이제 철혈문에서 나가겠소."
철혈문주가 웃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허허... 그게 무슨 소린가? 정 그렇다면 자네는 당장 빚을 변제(辨濟)하게."
"빚?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그러자 철혈문주가 힐끔 주변의 대련장을 둘러보았다. 그는 여기저기 터져나가 있는 목재바닥과 벽을 쓰다듬더니 말했다.
"이거 전부 자네가 사자후로 부순 거지? 전부 물어내게."
"......!!"
"지금 철혈문은 백웅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있다는 소리일세. 못 알아듣겠어?"
나는 탈력해서 그만 검을 손에서 놓을 뻔 했다.
개소리다!
내 사자후때문에 건물이 약간 부숴진 것은 맞지만, 강호도의상 비무과정에서의 손실인데 그런것까지 내가 물어줘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나는 당장에 항의하려고 했으나 순간 수백 개의 시선이 내게 꽂히는 것을 느꼈다.
싸악 -
"......"
나는 그 순간 실감했다. 이 곳은 적지(敵地)이며 여기 모여있는 수십 수백명의 무사들은 여차하면 내 목에 칼을 꽂기 위해 달려들 준비가 되어 있다. 철혈문이 정파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칼쓰는 인간들이라서 인간 하나 묻으려고 생각하면 순식간이었다.
철혈문주는 '변제'를 결코 돈으로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정도 눈치도 없는 얼간이가 아니다.
내가 침을 꿀꺽 삼키자 철혈문주가 말했다.
"이기고 도망가는 건 용납 못 한다. 여기는 철혈문이기 때문이다."
"큭... 무슨 개소리요."
"자네는 적어도 두 번은 더 싸워줘야겠어. 그 두 번 모두 승리한다면 아무런 변제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약속하지."
"거부하겠다면?"
"배짱 좋군."
철혈문주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감돌았다.
"자네가 여기서 도망칠 수 있다면, 그리고 앞으로 철혈문과 한판 해볼 생각이라면 그래도 좋아! 우리도 간만에 즐거운 강호행(江湖行)을 할 수 있을 거 같군."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내공빨로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얼마나 부상을 입게 될지 감도 안 잡힌다. 철혈문주의 무공도 그렇고 장로들의 무공도 무림의 정점에 한없이 가까운 자들이다. 설령 운좋게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이후에는 미친개마냥 쫓아오는 철혈문 놈들과 평생 싸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게 그정도 체력과 여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 제길... 제길...!!'
나는 철혈문주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 이기고 도망치는 건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어떻게든 비무를 철혈문의 승리로 끝내기 위해서 판을 짜러 온 것이다. 아마 이전부터 있었던 수많은 도전자들은 철혈문의 무사 한두 명을 쓰러뜨리는 건 성공했을 테지만, 이후 지금처럼 반협박이나 다름없는 연속비무 이후 패배해버린 것이다. 철혈문은 아마 초창기부터 쭈욱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명예를 지켜온 것이리라.
어쩌면 이 자리에서 적당히 지고나서 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나와 2번의 비무를 붙으러 나올 철혈문의 고수는 틀림없이 나를 병신으로 만들거나 죽여버리려고 나설 것이다. 어느 쪽이든간에 살얼음판같은 선택의 연속이었으므로 대가리가 터질것처럼 복잡해졌다.
나는 철혈문을 비롯해서 무림(武林)을 너무 얕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협소설(武俠小說)이라면 이쯤에서 철혈문주가 내 무공이나 패기에 감탄해서 놓아주거나 대인배 노릇을 해줄지도 모른다. 전개상 술이나 같이 한 잔 하거나 나를 철혈문에 등용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이렇다. 철혈문주에게 있어서 나는 무공 좀 강한 낭인(浪人)에 불과한 것이고, 치워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철혈문의 명예를 지키려고 비열한 짓도 서슴지 않는 것이 강호(江湖)이다.
' 이래도 저래도 죽는건가?'
선택의 여지가 없다.
도망가다가 등 뒤에 칼맞고 죽느냐 싸우다 죽느냐인가.
' 그렇다면 내 운빨에 걸어 보자.'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말했다.
"좋소. 근데 부탁이 있는데."
"뭔가?"
"무기 좀 주시오. 좋은 창 한 자루와 좋은 검 한 자루씩."
"......"
웅성
철혈문 제자들이 술렁였다. 이 상황까지 와서 무기를 찾는 내가 이상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제 삶의 기로가 놓였는데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여서였을까? 철혈문주도 아까와는 달리 눈이 웃고 있었다.
"자네 정말 재밌는 친구로군. 사문이 없다는 게 사실이야?"
"왜 자꾸 물으시오? 없다고 하지 않았소."
"신기하군... 신기해. 정파 삼대 기인이라 해도 자네같은 인물을 키워내기 쉽지 않을텐데."
탄식하던 철혈문주가 주변을 바라보며 외쳤다.
"이봐! 누가 창과 검을 가져와라."
철혈문주의 명령은 이 자리에서 절대적인 듯 했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몇 명의 제자들이 부리나케 달려갔고, 머지않아서 내가 말했던대로 좋은 창과 검을 가져왔다. 철혈문주가 내게 두 자루의 무기를 건네주며 말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충분하오."
별로 트집을 잡을 것도 없을 정도로 좋은 병장기였다. 창도 검도 은색으로 번쩍이고 있는 신품(新品)인데다 철의 재질도 매우 좋았다. 고급 위사나 쓸법한 질좋은 무기를 갖다줬으니 양심상 뭐라 할 게 없다.
잠시 후 철혈문주가 손가락을 딱하고 마주쳤다.
"일장로(一長老). 그럼 비무에 나서게."
"알겠습니다, 문주님."
스윽
일장로라고 불린 자가 자신의 방립(方笠)을 고쳐쓰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꽤 키가 작은 인물이라서 장성한 내 키보다 얼굴 하나가 작아보였다. 키에 맞지 않을 정도로 긴 장검(長劍)을 길게 뽑는 모습이 왠지 어리숙해 보였다.
"나는 철혈문의 제일장로(第一長老)인 귀영검객(鬼影劍客) 진평(振平)이다. 좋은 승부를 해 보자, 백웅."
나는 귀영검객 진평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었다.
그말은 곧, 진평의 무공수준이 현재 내 안목으로는 파악할 수 없을 만큼 고절한 경지에 이르러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가 기감으로 느낄 수 있는 건 단순히 내공의 강약 뿐인데 그마저도 진평의 내공을 정확하게 추산하는게 힘들었다. 그가 철저하게 정검(靜劍)을 구사하기 위해서 자신의 기세를 최대한 낮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알 수 있는 건 진평은 한 방에 승부를 내 버리는 검객일 가능성이 높다.
' 빌어먹을. 여기서 죽는 건가?'
머릿속이 괴롭다. 온갖 잡생각이 다 들었지만, 그러면서도 이 자리에서 손해만 보고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검을 꼬나든 채로 진평에게 물었다.
"나는 촌동네에서 와서 귀하의 위명을 잘 모르오. 혹시 당신은 화산파 장로와 비견할만한 무공을 갖고 있소?"
"......!!"
그러자 진평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옆에 있던 사람들도 황당해했다. 하긴 이렇게 직접적으로 무위(武威)를 캐어묻는 것은 무인 사이에서 실례일 뿐만 아니라, 당사자도 뭐라고 대답하기가 민망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진평이 머뭇거리고 있자 옆에 있던 철혈문주가 껄껄 웃었다.
"크하하하... 정말 배짱 한번 죽이는군. 그 질문에는 내가 대답해 주지.
내가 볼 때 본문의 일장로의 실력은 구파일방 장로와 대등하다! 화산파라면 딱 동귀어진(同歸御盡)일 것이고, 종남파 장로라면 이쪽이 한 수 위이다."
그러자 귀영검객 진평이 힐끔 철혈문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는 진심으로 민망한지 약간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문주님. 너무 제 얼굴에 금칠을 하십니다."
"뭐 어때, 사실인데. 누가 뭐라 할 놈도 없지 않은가?"
"... 감사합니다."
"이제 대결에 집중하게."
둘이서 뭐라고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으나 나는 속이 타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구파일방 장로급!
그런 자라고 한다면, 틀림없는 절정고수인 것이다. 천하에서 보기 힘들다는 절정고수이지만 철혈문쯤 되는 대문파의 간부라면 당연히 그 정도는 되어야 했다.
나는 창과 검을 들고 잠시 고민하다가 창을 바닥에 꽂았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제대로 뇌영검법의 자세를 잡았다.
' 뇌령팔식은 관두자. 익숙한 뇌영검법으로 싸운다.'
뇌령팔식이 분명히 뇌영검법보다 강한 무공이다. 창법의 극치에 있는 뇌령팔식은 공방전환이 능란할 뿐만 아니라 뇌영검법보다 활용도가 훨씬 높았다. 그렇기에 나도 부단히 뇌령팔식을 수련하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창법보다 검법이 더 적성에 맞는 것 같았다. 지난 세월동안 검법을 주무기로 해서 싸워왔으므로, 이제 와서 뇌령팔식으로 어설프게 싸울 수는 없는 것이다.
내 머릿속에는 딱 한 가지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운(運)!
지금 내게 남은 것은 오로지 운빨밖에 없었다. 나는 검을 겨눈 채로 말했다.
"귀영검객. 선공(先攻)은 후배에게 양보하시지요?"
"... 그렇게 할려고 했네만,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하는 친구는 오늘 처음 보는군."
기가 막힌 듯 말하는 귀영검객 진평이었으나 나는 무시한 채 기합을 질렀다.
"합!"
동시에 내 몸뚱이가 바람처럼 그에게 쏘아져 나갔다. 평소보다 배는 빠르게 움직이는 듯, 눈 앞이 마구 흔들리며 빛의 잔영(殘影)같은 검로가 허공에 수놓아졌다. 일반인의 눈에는 그냥 바람덩어리가 움직인다고밖에 안 보일 정도로 빠른 속도가 분명했다.
채챙!
그러나 귀영검객 진평은 거대한 장검을 한 손으로 여유롭게 휘두르며 내 첫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었다. 다만 수월하게 막아내지는 못했는지 살짝 몸이 흔들렸고, 이내 보법(步法)을 이용해서 충격을 흘려낸 듯 했다. 아까 한 방에 부딪혀서 날아갔던 임검당주 교준과는 확실한 수준차이가 존재했다.
쉬리릭
동시에 진평의 검끝이 마치 뱀처럼 흔들렸다. 나는 그가 펼치려는 초식의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내버려두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강검(强劍)으로 마치 몽둥이를 휘두르듯 그의 상단을 계속해서 베어들어갔다. 진평은 검술에 화경(化經)을 섞어서 내 공격을 흘리다가 일순간 눈을 번득였다.
"차하!"
투콱
"으윽..."
나는 어깨가 뜯겨져나간 고통에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섰다. 갑자기 뱀이 달려들듯이 진평의 검속이 극렬하게 빨라졌으므로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찰나의 순간에 반응해서 치명상을 피했지만 진평의 검법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휘릭휘릭거리며 내 목을 베어오고 있었다.
나는 엉거주춤 움직이다가 뒤로 구르며 나려타곤의 초식을 펼쳤다. 추하게 굴러서 피하는 초식인지라 강호인의 비웃음이 되기 쉬운 것이지만 목숨을 부지하기에는 좋은 것이었다. 나는 도중에 무릎의 탄력으로 튕기듯이 일어서면서 재차 뇌영검법의 초식을 펼쳤는데, 이번에도 귀영검객 진평은 부드럽게 흘려내 버리는 것이었다.
진평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입을 열었다.
"과연 엄청난 내공이군. 검법은 미천한 수준인데 내공때문에 쉽게 끝낼 수가 없어."
"놀리지 않아도 잘 알고 있소."
그는 나의 내공에 순수하게 감탄하는 듯 했다.
"보고 들은대로 명문 문파에서 일류내공을 반세기 넘게 수양하더라도 그런 내공을 가지는 게 불가능할텐데... 너는 도대체 어떻게 그 내공을 얻은거지?"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의 대결양상은 내공 대 검술이라고 압축할 수 있었다. 내 검술은 진평의 발뒤꿈치에도 못 따라가지만 내공으로 보조되는 방어력, 공격력, 민첩성이 너무 높기에 수세로나마 싸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진평의 공격은 모조리 살초(殺招)를 머금고 있었고, 한 번이라도 유효타를 허용하게 된다면 나는 그 즉시 죽고 말 것이다.
수준차가 엄청나다는 건 지금 체감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내 내공을 검술의 화경으로 받아낼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해보지 못한 것이다. 눈 앞에 있는 진평의 경지가 절정고수라는 증거였다.
"그럼 이렇게 해 볼까."
화르륵
진평이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그의 칼에 시퍼런 화염이 일어났다. 실제로는 검날에 응축된 기(氣)가 너무 강렬해서 사람의 눈에 보일 정도로 응고된 현상이었다. 나는 저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힘이 빠져서 중얼거렸다.
"검기(劍氣)..."
칼날바람을 일으키는 정도가 아니라, 저걸 체현한 순간 어떤 것이든 천하의 명검처럼 되어버리며 자동으로 신검합일(身劍合一)에 이르게 된다는 꿈의 경지. 무기술의 정점이라고 볼 수 있었으며, 내가 그동안 직접 보았던 검기는 진소청 사범과 살수조장의 것 뿐이었다. 검기의 무서운 점은 기를 이용한 방어력을 관통하는 성질도 있고, 적중한 순간 적의 몸뚱이를 폭파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소청의 것과 살수조장의 것은 저렇게 화염처럼 일렁이지 않았고 정제된 깨끗한 칼날모양의 검기였다. 나는 의문을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당신의 검기는 왜 그렇소? 다른 자들은 칼날모양이었는데."
그러자 귀영검객 진평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는 곧 저승길 선물이라는 말투로 내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내가 그자들보다 강하다는 뜻이지. 검기가 강해질수록 검염(劍炎)의 단계를 거쳐 검강(劍罡)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
저걸 검염이라고 부르는거군.
왜 진소청이 저런 걸 내게는 안 가르쳐 줬을까 생각해 봤다. 그리고 진소청은 내가 검기나 검염같은 경지에 도달하기는 무리라고 생각했기에 그냥 안 알려줬다는 결론에 이를 수가 있었다. 하긴 살아 생전에 내가 검기를 쓸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정상이었을 것이다.
' 이번에는 여기서 끝인가...'
나는 마지막 오기를 다해서 물어보았다.
"당신을 이기면 그 다음은 누구요?"
"그럴 일 없다."
너무 단호하다. 하지만 나는 악을 쓰듯 외쳤다.
"그래도 말해 주시오."
"... 문주님께서 널 상대할 것이다."
"문주는 당신보다 얼마나 강한가?"
"정말 쓸데없는 걸 궁금해 하는군. 낙양 일대에서 문주님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건 화산파 장문인과 태검문주 뿐이다. 그따위 경지로 감히 비교하려 들지 마라."
스으으으
대답할 건 다 대답해 줬지만, 그 댓가로 나는 귀영검객 진평의 분노를 산 모양이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나같은 천둥벌거숭이가 문주를 언급하는 것도 주제넘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어차피 결과가 같다고 생각하며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잡았다.
"끝내자."
귀영검객이 단호하게 말하며 이번에는 그 쪽에서 덤벼 왔다.
대결이 끝난 것은 정확하게 삼백 오십 초 때였다.
사방에는 칼날자국이 휘날리고 있었고 대련장은 마치 폭약이라도 맞은 것처럼 성한 곳 없이 부숴져 있었다. 나는 전신에 피칠갑을 한 채로 장검을 들고 비틀거리고 있었지만 의식이 끊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죽을 힘을 다해서 저항해 보았지만, 상대가 되지 않는다.
내게는 막대한 내공이 있었지만 귀영검객 진평은 과연 중원을 오시하는 절정고수 답게, 최소한 60년치 내공을 보유하고 있어서 공격을 흘려보낼 수가 있었다. 게다가 검염을 발휘하면 내 공격을 튕겨낼 수도 있었다.
귀영검객 진평은 자신의 어깨와 팔에 난 2개의 상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칭찬하듯 말했다.
"네 검술을 10년만 닦고 왔으면 나는 네 상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
"잘 가라."
촤아악!
불쾌한 이물감이 잠시 느껴지더니 내 시선이 천장으로 뛰쳐올랐다. 의지와 상관없이 대련장 천장이 눈에 잠깐 들어왔다.
이것이 나의 세 번째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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