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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룡출도(雷龍出道)
나는 일단 3년동안 망량선사의 집에 얹혀 살기로 했으며, 다행히도 망량선사의 초가집에서 약 이십장 떨어진 곳에 별채가 있었다. 그는 어지간히도 점술로 돈을 많이 벌었는지 나중에 애인에게 주려고 집을 따로 지어놨던 것이다. 말하는 걸로 보면 진랑곡 내에 애인이 한 명 있고 다른 지방에 몇 명이 더 있는 모양이었다.
' 이 인간 어지간히도 여색(女色)을 밝히는구나.'
혹시 황궁에서 나온 것도 마음껏 여자와 떡치기 위해서 아닐까?
물론 괜히 그런 말을 해서 조력자의 성질을 긁을 필요는 없으므로 일단 입을 닫았다. 나는 별채에서 살면서 이따금씩 망량선사의 일을 도와주면서 밥값을 하기로 약속했다.
"우선 나를 망량선사라고 일일이 부르기 귀찮을테니, 앞으로는 그냥 망량이라고 불러 주시오."
"그러지."
"나는 당신을 백웅이라고 부르면 되겠소?"
"그러시오."
서로간의 호칭을 정립한 후, 다음 날부터 공부(功夫)가 시작되었다.
나는 처음에 무엇을 공부할지 몰랐으나, 갑자기 망량이 엄청나게 두꺼운 책을 내게 내밀었다. 제목에는 만자문(萬字文)이라고 되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책의 두께에 당황해서 내가 망량을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백웅. 모든 공부의 기본은 한자(漢字)요. 당신은 오늘부터 만자문을 익숙히 외우시오."
만자문.
이 책을 본 적은 있다. 어린아이들이 공부에 입문하기 위해 배우는 천자문과는 달리, 본격적으로 과거를 공부하는 유생들이 공부에 달통하기 위해서 세부어휘까지 달달 외우는 서책이었다. 금만재도 집에 한 권 사두긴 했었는데 한두장 보고는 책에 먼지만 쌓여있었던 거 같다.
"망량. 천자문(千字文)은 왜 넘어가는 거요?"
"만자문을 하면 천자문은 저절로 외우는 거요. 괜히 시간낭비 하느니 처음부터 빡세게 해 봅시다."
"암만 그래도 일만 자는 너무..."
내가 부정적으로 말꼬리를 흐리자 망량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말했다.
"일만 자가 아닌데 무슨 말 하시오?"
"아, 실제로는 좀 적은가보군."
"이건 실제로는 삼만자(三萬字)가 들어있소."
"......"
순간 개새끼야, 라고 쌍욕을 할 뻔 했다. 내 팔뚝두께를 세 개 합쳐둔 것만큼 두껍길래 왜인가 했더니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제대로 외우고 쓰는 한자어휘가 5백개도 되지 않는 내게 있어서 3만자라는 단위는 엄청난 압박으로 들어왔다.
"어쩔 수 없소. 기문둔갑서나 진법서에는 현재 잘 쓰이지 않는 고문(古文)이나 망휘(忘彙)가 매우 많소. 나처럼 온갖 서경에 통달한 사람이 아니라면 일반서생의 수준에서도 외국어처럼 해석을 해야 하오. 이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요."
"하아... 당신이 해석을 해 주면 되잖소."
"물론 그렇게 하겠지만 분량으로 볼때 내가 일일이 다 해줄 수는 없소."
망량이 괜히 나를 골탕먹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체념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 하루에 몇 개씩 외워야 하겠소?"
"하루에 적어도 백 개씩은 진도를 나가야하겠지요. 먹고 자는 시간 빼고는 전부 공부하시오."
"씨발..."
참으려고 해도 욕지기가 나올수밖에 없었다. 나는 평생 글공부라곤 거의 한 적이 없고, 별로 할 필요도 없었던 인간이다. 그런데 보기만 해도 눈이 핑핑 어지러워지는 글을 붙잡고 몇 시진이나 집중해야 한다는 건 고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망량이 말했다.
"물론 공부해본 적 없는 사람에게 책상다리체력을 기대하는 건 좀 힘들겠지. 그래서 꼼수로 뇌정경(雷精經)을 써 봅시다."
"뇌정경? 뇌의 활력을 높여준다고 하던데 그게 효과가 있소?"
"염파(念波)를 활성화시켜주는 효과가 있소. 집중력 회복에 큰 도움이 될 것이오."
그렇게 내 하루일정이 잡혔다.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거의 다 만자문을 외우는데 투자하고, 하루에 한 시진은 내공수련을 한다. 또한 틈틈히 쉬는 시간에는 뇌정경을 낭독함으로써 뇌의 피로도를 회복하고 정신집중력을 높이는 방식으로 공부하는 것이다.
그래. 이론상으로는 완벽한 공부방법이다.
망량 왈, 이렇게만 공부하면 아무리 무지렁이라고 해도 과거시험의 소과(小科)에 합격시킬 자신이 있다고 했다.
"......"
못해먹겠다.
만자문을 공부한지 3일째, 나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텅빈 별채의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공부의 분량과 진도도 장난이 아니었는데 책상 앞에 하루종일 앉아있으려니 미칠것만 같았다. 차라리 무공을 수련할 때는 몸이 힘들어서 잡생각이 잊히는데, 공부체력을 늘이는 과정은 장난이 아닌 것이다.
' 금만재 놈의 기분을 알겠구나.'
이렇게 빡세게 공부해서 만자문을 다 외워도 과거시험에 급제하기가 힘들다는 것. 서생들의 삶이 무림인들보다 약해보였으나 실제로는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자기와의 싸움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금만재를 생각하니 의욕이 되살아났다.
내가 이렇게 자빠져서 한탄하면서 공부를 안 하고 있으면, 금만재 놈과 다를 게 뭔가? 인성막장에 부모 등쳐먹고 주색잡기나 탐하던 그런 인간쓰레기와 같은 수준이 되어서야 앞으로 살아나갈 수가 없다.
치를 떨면서 표사생활을 몇십년 구른 것, 죽음을 반복하면서 천년설삼을 노력으로 얻어낸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 모든 것은 내 인생을 내 주도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사적인 인고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 정도에서 꺾일 수가 없다!
나는 좀 더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내면에서 외치는 절규가 다시 공부를 하게끔 만들었다. 나는 이를 악문 채 고요한 별채 내에서 소리내어서 한자를 읽기 시작했다.
일만 자든 삼만 자든 상관없다.
어쨌든 외우고 있기만 하면 언젠가는 다 외워지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공부를 시작한지 반 년이 지났다. 정말로 나는 먹고자고 공부만 했으며, 하루에 일백 자를 외우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나는 넘쳐나는 내공 덕에 체력이 딸릴 일은 없었으나 집중력은 종종 부족할 때가 있었다. 그 때마다 뇌정경을 암송하며 정신을 명정(冥靜) 상태로 만들면 이내 집중력이 회복되곤 했다.
궁금해서 뇌정경이 도대체 어떤 것이길래 이런 회복효과가 있냐고 물어보자 망량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건 불교 법문(法文)을 도교식으로 변환시킨 것이오."
"원래 암송문이었단 말이오?"
"대부분의 종교 암송문은 다 그렇소. 의미없어보이는 웅얼거림이 정신에 영향을 끼치지."
그렇게 말한 망량은 내 숙제를 검사하더니 말했다.
"오늘부로 서당 글공부 수준은 되었군. 외운 한자를 좀 더 익숙하게 해 봅시다."
"어떻게 하겠단 말이오?"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어봅시다."
"뭐라고? 그런걸 어떻게 내가..."
사서삼경이라고 하면 왠만한 글공부를 해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자 망량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혹시 백웅 당신은 한자가 총 몇 글자인지 알고 있소?"
"알 리가 없잖소."
"나도 그렇소."
나는 순간 이 인간이 말장난하나 싶어서 쏘아보았다. 그러나 망량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한자라는 건 세계 문자 가운데 유일하게 열린 집합이오. 즉, 누구라도 당장 새로운 한자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오. 다른 나라의 소리글자는 해당 언어에 새 음소가 추가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글자가 늘어나지 않소. 그러나 뜻글자가 기원인 한자는 글자 하나하나에 일정한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에, 기존에 없던 새로운 개념이 생겨나면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야 하지."
"......"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그냥 존나 얌전히 듣고 있어야겠다.
"그렇기 때문에 한자가 몇 글자인지는 아무도 모르오. 만자문이라고 해놓고 삼만자를 훨씬 넘기는 건 그런 이유요. 벽자(僻字)라던가 하는 별의별 군소한자를 다 모아놓으니 어쩔 수가 없지."
나는 내 두뇌에 지식폭력을 가한 망량에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렇군. 근데 그거랑 내가 사서삼경을 읽는 게 무슨 상관이오?"
"사서삼경은 그런 생성자(生成字)의 영향을 받지 않는 정전(正傳)이기 때문이오. 즉 세월이 아무리 바뀌어도 기초한자만으로 공부할 수 있는 경전이지. 지금까지 당신이 공부한 양만으로도 사서삼경을 읽는데는 아무 무리가 없을 거요."
"으음...."
"그리고 사서삼경을 읽다보면 외웠던 한자를 더욱 무리없이 구사할 수 있을거요."
정말일까?
나는 일단 망량의 말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사서삼경이란 유교의 핵심 경전 일곱 또는 아홉 권을 말하는 것으로써, 그 수많은 서생들 중에서도 사서삼경을 다 읽은 자는 전체의 일 할도 되지 않았다. 파고들수록 어려워지는 책이라는 평도 있었고 사서삼경만 제대로 읽고 이해해도 소과(小科)에 합격한다는 얘기까지 있었다. 그런 책을 평생 표사일만 했었던 내가 읽을 수 있을 거 같지 않았다.
하지만 망량의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고작해야 사흘만에 사서삼경 중 하나인 논어(論語)를 모두 읽을 수 있었다. 다 읽고 나서도 믿겨지지 않아서 한참동안 멍하니 제자리에 앉아있었다. 평생 표사일에 칼싸움질밖에 안했던 내가, 망량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책을 다 읽은 것이다.
내 성취를 망량에게 말하자 그는 씨익 웃었다.
"나머지도 별다를 거 없소. 내가 도와준다면 한 달 내에 사서삼경을 다 읽을 수 있소."
그 말도 사실이었다.
망량이 옆에서 해석하고 도움을 주자, 한 달은 커녕 3주만에 다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서생들의 필수공부로 꼽히는 사서삼경을 이렇게 쉽게 읽을 줄은 몰랐기에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이렇게 말하면 오만한 소리겠지만, 이정도면 내가 못읽는 책이 없을거 같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서생들은 보통 사서삼경을 다 읽기 위해 몇 년씩 공부하지 않소?"
"그들은 공부하는 효율이 너무 안 좋소."
망량은 서생들을 비웃듯 말했다.
"맨날 책상다리에 앉아서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대는데, 모든 공부의 근본은 한자에 달려 있소. 백웅 당신이 반 년동안 들여다본 한자의 수는 최소한 일만 자는 되고, 그 중 절반밖에 못 외웠다 치더라도 5천자나 되오. 유생들이 경전 부여잡고 공자왈 맹자왈 할때 당신은 기초공부를 다 해버려서 추가공부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오. 뭐, 그들이 공부할 때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억지로 해석하려드는 탓도 있지만."
"과연..."
나는 사람을 제대로 찾아왔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의 과도한 자기소개는 결코 허세가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천하의 문재(文才)들이 다 모여서 시험을 치는 과거(科擧)에서 전체 3등을 한 천재인 것이다.
"그리고 백웅 당신의 암기력이 좀 과하게 좋은 것 같소."
"응?"
"요즘 공부하는 걸 봤는데, 당신은 10을 보면 4 정도는 바로 그 자리에서 완벽하게 외워버리는 암기력이 있소. 서너 번 보면 다 외워버리는 식이지. 물론 그걸 천재수준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확실한건 정상인보다 훨씬 뛰어난 암기력이 있는 건 사실이오."
"난 원래 별로 암기력이 좋지 않았소만..."
내가 솔직하게 말하자 망량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말했다.
"혹시 뇌정경의 암송효과가 당신의 내공과 공명(共鳴)한 것인가? 그거 말고는 이유가 생각 안 나는군."
"흐음."
그럴지도 모른다.
확실히 뇌정경을 외울 때는 머리가 하얗게 비면서, 갑자기 전신에 내공이 끓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피부가 살짝 잡아당겨지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 때는 기분탓인가 했는데 -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뇌정경 때문에 천년설삼의 내공이 감응한 것이다. 내 머리가 좋아졌다는 뜻이기에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사서삼경의 공부를 끝내고 나자 나머지 만자문의 습득에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할 수 있었다. 내가 만자문 외우기의 8할을 끝냈을 때는 공부를 시작한지 1년이 지나 있었고, 다 끝냈을 때는 다시 반 년이 지나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태극기서(太極奇書)와 역술진본(易術眞本)에 입문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책들의 첫 장을 보고서 침음성을 흘렸다.
"흠... 어렵군."
검은 건 글자고 흰 건 종이다 싶은 시절에는 그냥 뭔 소린지 몰랐다. 그러나 만자문과 사서삼경을 통달한 상태에서 역술서를 읽어보니, 일반적인 경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배배 꼬여있었다. 의미의 해석도 어렵고 거의 사용하지 않는 어려운 한자도 많았다. 이걸 읽으라고 만든 책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나는 망량을 째려봤다.
"망량. 이렇게 어려운 책을 독학하라고 던져줬었단 말이오?"
망량은 뜨끔한지 다른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가 조그맣게 말했다.
"나는 그 때 당신이 정파(正派)의 최고 후기지수나 비밀병기인 줄 알았소. 문무(文武)를 다 할 줄 아는 영재인 줄 알았는데..."
"허참."
"아무튼 지금부터라도 시작하면 일 년 내에 대부분의 공부를 끝낼 수 있을 것이오."
망량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일 년 내에 태극기서와 역술진본을 다 떼고 기초적인 진법과 기문둔갑(奇門遁甲)에 입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의 과정은 진정으로 험난했다. 나중에는 내공을 따로 수련할 시간마저 안 날 정도로, 혹독하게 외우고 머리굴리고 공부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특히 산술(算術)과 수리(數理)는 굉장히 어려웠기 때문에, 망량의 구박을 받아가면서 죽어라 머릿속에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덧 '왜' 공부를 해야하는지 까먹을 정도가 되어서 별채에서 공부만 계속하고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외운거 또 외우면서 지내고 있을 때쯤 나는 별안간 각성(覺性)했다.
"헉... 제길!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망량 밑에서 공부를 시작한지 3년이 다 되어간다.
이러다가 천년만년 공부만 하다가 인생 종칠 것 같았다. 나는 이제 배울만큼 다 배웠다고 생각하자 망량에게 가서 말했다.
"이제 무명제사서를 얻을 때가 온 것 같소."
그러자 망량이 말했다.
"좋소. 백웅 당신에게 황궁 공략법을 전수하지."
그리고 사흘 후, 나는 진랑곡을 떠났다.
시간이 쏜살같이 흐른 것 같은데 왠지 허무감이 남아있었다. 그것은 그 동안에 내 무공이 거의 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부는 죽어라 했는데 너무 고생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개를 털었다.
"한 고비 넘겼을 뿐이다."
깊게 생각하지 말자.
내 손에는 망량이 건네준 황궁지도 두루마리가 쥐어져 있었고, 망량이 직접 쓴 황궁 기문둔갑 파해법도 봇짐 속에 있었다. 철저하게 사흘 동안 공략을 머리에 넣고 왔으니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목표는 황궁 내황각에서 무명제사서를 가져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