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8화 (18/1,615)

0018 ----------------------------------------------

뇌룡출도(雷龍出道)

낙양으로 향하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쏴아아아아 -

황산을 떠나온지 약 열흘이 지났다. 나는 폭우(暴雨)가 쏟아지는 바람에 산속 깡촌마을에 갇혀서 오도가도 못한 채 지내야 했다. 이런 폭우를 겪은 적은 많으나, 이번에는 폭우 때문에 다리가 끊기고 건널목이 침수되었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내 경공으로 어쩌면 그 넓은 흙탕물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수십 장이나 되는 흙탕물을 건넌다고 해도, 육지 속의 섬처럼 되어버린 지형이 너무 많다. 잘못했다가는 비만 맞으면서 굶다가 쇠약사할 가능성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쏴아아아 -

쿠르르릉

번개가 친다.

나는 건물 안에서 미친듯이 쏟아져내리는 비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기연을 얻어봤자 자연 앞에서는 쓸데가 없군."

설령 내 내공이 지금보다 갑절이나 높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답이 없다. 자연이 보여주는 아주 일부분의 힘에도 맥을 못 추는게 인간의 힘인 것이다. 거대한 자연 속에서 휩쓸려 살아온 지도 몇십 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웅대(雄大)한 세상에는 경외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현재 나는 여비가 거의 다 떨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지금 이 깡촌마을에 머무르면서 숙식을 하는 대신, 마을의 잡일이나 힘쓰는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 내 완력은 천하장사급이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내 용역의 댓가를 지불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보였다.

비가 엄청나게 내리는 와중인데도도 거대목재를 옮기고 마을 외벽을 보수하고 돌무더기를 지고나르고 있으니, 보통 장정 20명 몫을 나 혼자서 해주고 있었다. 내가 아니었으면 집이 몇 채나 무너졌을테니 마을 사람들은 내게 고마워하고 있는 듯 했다.

"방금 식사 같이 한 애가 내 딸인데 어떤가? 괜찮지 않아?"

"하하..."

심지어 이 마을의 촌장은 자신의 딸을 슬며시 소개시키면서 엮으려고 드는 것이다. 촌장의 딸은 그리 예쁜 외모도 추한 외모도 아닌 평범한 시골처녀로 보였다. 농촌처녀답게 가슴이 매우 큰 편이었지만 내게 그리 의미있는 사실은 아니다. 나는 촌장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의도를 일축했다.

"곧 떠날 듯 합니다. 게다가 저처럼 못생긴 놈한테는 안 어울리는 아가씨네요."

"험... 사내가 외모가 뭐가 중요한가. 기생오래비처럼 생겨봤자 쓸데가 없는데."

"그렇기도 하고 지금은 해야할 일이 있어서요."

쪼르륵

이 마을 촌장이 흰 수염을 쓸어내리더니 내게 탁주 한 잔을 따라주었다. 내가 슬며시 받아서 마시자 그가 말했다.

"그러고보니 목적지가 낙양이라던데 거기는 무슨 일로 가려는 건가?"

"천지의 온갖 지식이나 언어(言語)에 정통한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찾아가고 있습니다."

"허긴... 낙양이라면 그런 사람이 있긴 있겠지..."

골똘히 생각하던 촌장이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아! 똑똑한 사람이라면 나도 하나 알고 있지!"

"어떤 사람입니까?"

"여기서 40리 정도 서쪽으로 가면 망량선사(??仙師)라는 도사(道師)님이 살고 계신다네. 이 근처에서 가장 영험하신 분이니, 자네 의문에도 대답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 도사라니.'

도사라는 건 세간의 무속신앙의 정점에 존재하는 자였다. 보통 구파일방에 도가문파가 많으나 그들은 무도사(武道師)로써 미신보다는 우도(右道)적 수련법을 통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들이었다. 세간의 도사는 술도사(術道師)였으며 신비한 술법과 신앙, 의식으로 사람들에게 길흉화복을 점쳐주거나 때로는 의료행위도 하는 자들이었다.

망량선사는 아마 그런 술도사의 한 명일 것이다. 나도 술법이나 무속신앙을 안믿는 건 아니지만, 그게 사람을 현혹시키는 사기일 때가 많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표사로 일할 때부터 지금까지 쭈욱 술도사는 불편하게 느껴지는 존재였다.

하지만, 나는 곧 생각을 바꿨다.

내가 늘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며 품안에 꼭 넣고 다니는 이 천암비서(天暗秘書)야말로 그런 신비(神秘)한 술법의 극치가 아닌가? 세상의 현인을 찾아다니는 일이라면 그런 술도사와 만나보는 일을 빼놓을 수 없다.

"혹시 그 망량선사라는 분은 무림인이십니까?"

"아니? 나도 몇 번 찾아뵌 적이 있는데 그런 얘기는 전혀 들은 적이 없네. 다만 영험하신 분이라서 근처의 높으신 관리들도 망량선사님을 찾아간다는군."

"흐음..."

"그 분이 사는 곳은 진랑곡(晉郞谷)이라는 장소니 적당히 찾아가 보게. 숨겨진 곳도 아니니 물어물어 가면 금방 도착할걸세."

나의 다음 목적지가 진랑곡이 되는 순간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진랑곡으로 가는 길은 서쪽의 낙양으로 가는 길과 크게 어긋나지 않아서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 가 보자!'

나는 비가 그치자마자 진랑곡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촌장이 근처 지리를 그려놓은 간략한 지도를 건네준 덕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폭우가 지나간 다음이라서인지, 곳곳의 다리가 파괴되어 있어서 꼬불꼬불 길을 돌아가는 게 영 귀찮긴 했다.

진랑곡에 도착하자 계곡같은 능선의 초입에는 조그마한 마을이 있었다. 아마 촌장이 말했던 망량선사의 집도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마을에 들어서서 행인에게 망량선사의 집을 묻자, 그는 멀리 산 꼭대기를 가리켰다.

"선사님께서는 산 정상에 사세요. 계단이 마련되어 있으니 천천히 오르시다 보면 한 시진이면 도착하실 수 있을 겁니다."

"나같이 선사님을 찾아오는 사람이 많은가 봅니다?"

그러자 그 동네청년은 씨익하고 웃었다.

"하하, 뭐 그렇죠. 사실 망량선사님은 우리 마을의 자랑이시니까요."

나는 기대 반 의심 반을 지닌 채로 망량선사의 집으로 향했다. 뭐가 어찌됐든 마을 사람들은 망량선사를 신뢰하고 있으니, 나 또한 그에게서 천암비서의 비밀을 들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천암비서가 무엇인지 알고 나면 앞으로 인생을 한층 즐겁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휘이잉...

한참 계단을 올라서 산꼭대기에 오르자 망량선사의 거처로 보이는 초가집이 보였다. 인기척이 있는데다 신발이 여러 개라서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다만 가까이 갈수록 내 표정은 요상하게 변했다.

기묘한 소리가 들려온다.

"......"

들썩

들썩

하앙... 아아앙...

바닥이 요동치는 기색이 느껴지고, 안에서는 여인의 가녀린 교성(巧聲)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게다가 문장지를 통해서 보이는 건 명백히 남녀가 서로 끌어안고 방사(房事)를 하는 모습이었다. 얼추 상황을 보니 체위(體位)까지 변화시키면서 격렬하게 운우지락을 나누는 듯 했다.

남자의 허리놀림이 범상치 않게 격렬하고 여자의 호응도가 높은 걸 보면 절대 강간은 아니었다. 화간(和姦)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 여기가 망량선사의 집이 맞을텐데...?'

귀찮은 일이지만, 내 내공이 급격히 높아지면서 청력(聽力)도 매우 좋아졌다. 나는 지금 안에서 철퍽거리는 액체소리나 달뜬 신음소리, 욕망을 쏟아붓는 남자의 허리놀림 소리까지 죄다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선명하게 듣고 있다.

참나.

이것들이 대낮부터 떡이나 치고 있다니!

나도 고자가 아니라서 하초가 반응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곧 의지력만으로 꺼지게 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하아..."

대놓고 소리를 내자, 안에서 깜짝 놀랐는지 후다닥거리며 남자와 여자가 서로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여자는 급히 옷가지를 챙겨입고 있었고 남자는 이불이나 침상을 정리하고 있는 듯 했다. 지금 문을 열어버리면 아주 재미있을 것 같았지만 속으로 웃음을 참으면서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한참 후, 여자는 뒷문으로 도망쳐버리고 남자가 '뒷정리'를 다 끝낸 후에야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는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도사(道師)가 걸어나왔다.

"허험... 무슨 일이시오?"

"......"

방 안에서 퀘퀘한 정액과 애액냄새가 흘러나옵니다만...

적어도 하초는 좀 닦고 나오지 그러셨습니까.

' 에효, 관두자.'

뭐라고 따지고들고 싶은 마음이 강했으나, 생면부지의 사람한테 그렇게 말해봐야 의미가 없다. 게다가 어쩌면 이 인간이 내 간절한 의문을 해소시켜 줄 수도 있으므로 일단은 대충 넘기기로 했다.

"나는 지나가던 백웅(白熊)이라는 사람이오. 혹시 망량선사님 맞소?"

그러자 30대 초중반의 외모에, 약간 마른얼굴에 광대뼈가 도드라지고, 얼굴에 약간 홍조가 감돌고 있는 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 생각보다 훨씬 나이가 젊은 인물인 것 같았다.

"내가 망량선사요."

"제대로 찾아왔군."

"허허... 저기 나무등걸에 앉아서 얘기합시다."

망량선사는 재빨리 내 주의를 아름다리 나무 밑에 마련된 나무등걸 의자 쪽으로 돌렸다. 거기에는 나무를 깎아서 만든 바둑판도 존재해서 대놓고 놀려고 만든 장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나무등걸의자에 앉아서 망량선사를 대면해서 유심히 관찰했다.

' 강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무림인같지는 않은데...'

방심할 수는 없다. 세상에는 자신의 기를 추스려서 감출 수 있는 은둔고수도 많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일 망량선사가 술법의 고수라면 방심하고 있다가 크게 낭패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특이하게도 망량선사는 도사라고 자칭하는 주제에, 도사의 상징인 불진(拂振)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대신에 섭선 하나를 허리춤에 매고 있었다. 망량선사가 근처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더니 내게 잔을 내밀었다.

"계단을 올라오느라 힘들었을텐데 한 잔 하시게."

"난 됐소."

"음 그런가..."

망량선사가 머쓱한 듯 자기가 물을 들이키자 나는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망량선사께서는 세상의 언어(言語)에 달통하신지?"

"언어...?"

망량선사는 뭔가 머리를 굴리다가 환하게 웃으며 자신있게 말했다.

"암! 뭘 원하는지 몰라도 제대로 찾아온 것 같구려. 중원어(中原語)는 물론이고 북해(北海)의 사투리에서 장강 이남의 이민족(異民族) 언어, 천축어(天築語)도 왠만큼 알고 있는 게 나요. 뭐든지 궁금한 걸 물어보시게나."

"......"

이게 사실인지 뻥인지 알 수가 없다. 아까 보인 행각으로 미루어보면 망량선사가 사기꾼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지만, 나는 일단 믿어보기로 하고는 조심스럽게 품 속에서 천암비서를 내밀어서 그에게 보여줬다.

"응? 이게 뭐요. 천암비서?"

촤라락

"헉..."

천암비서의 첫 장을 넘기자마자 망량선사는 헛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은 흐리멍텅해져 있다가 갑자기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돌변해서는 책에 코를 박듯이 달라붙었다. 그렇게 반 식경 동안 아무 말도 안 하고 쳐다보고 있던 망량선사가 별안간 고개를 들었다.

"이, 이건 대체 어디서 얻으신 거요?"

"그걸 말씀드리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소만..."

나는 수상쩍은 눈으로 망량선사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선사께선 그 괴어(怪語)를 보신 적이 있소? 혹은 알고 있으신지?"

"음... 잠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시오."

"그러지."

망량선사는 앉은 상태에서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이윽고 말했다.

"아니, 안되겠소. 당신부터 말하시오. 그 다음에 내가 말해주겠소."

"그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오?"

망량선사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윽박질러도 어쩔 수 없소. 나는 당신 얘기를 먼저 듣겠소."

양보하기 싫다는 기색이었다.

원래 내 성격이라면 여기서 어처구니없어하며 무력(武力)으로 그를 협박하거나 윽박지를 것이다. 척 봐도 망량선사의 무공은 아예 없거나 약한 백면서생(白面書生)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묘하게 내게 확신을 주고 있었다.

보통 사기꾼이라면 저런 소리는 안 한다. 그냥 모른다고 잡아떼거나 왠 삿된 걸 가지고왔냐면 되려 호통을 치거나, 알지만 복채를 내놓으라는 소리를 할 것이다. 그게 내가 경험해봤던 도사들의 사기수법이었다.

그러나 지금 망량선사는 사기를 치기보다는 뭔가 '거래'를 하기 위해서 밑밥을 깔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건 오랫동안 인간을 만나봤던 내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나도 마음을 굳히고는 입을 열었다.

"난 어떤 동굴에서 그걸 얻었소. 그리고 여태 가지고 다니는 중이고."

"... 그것 뿐인가?"

"난 대답했소. 이제 당신 차례요."

"끄응..."

망량선사는 한참 후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후우... 나는 태어나서 이 글자를 딱 한 번 본 적이 있소."

"그게 어디요?"

그러자 망량선사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 전에... 당신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이오? 지금부터는 나도 목숨을 걸어야 할 텐데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좀 알고 싶소."

"아까 말했지 않소. 백웅이라고."

"그럴 리가... 당신은 틀림없이 고수(高手)요. 그것도 굉장한 내공을 지닌 고수인 것 같은데 그런 인물이 무명소졸(無名小卒)일 리가 없지 않소."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망량선사도 무공을 익혔는데 드러내지 않았단 말인가? 내가 고수라는 걸 어떻게 알아봤는지가 신기했다.

"내가 고수라는 근거는 또 뭐지?"

"계단을 올라왔잖소."

"계단이야 다 올라오는건데."

망량선사가 힘없이 웃었다.

"아니오. 나는 망운진(網雲陣)을 펼쳐서 도중에 계단이 여러갈래로 나뉘게 되는 환영(幻影)을 설치했소. 당신이 망운진을 파해(破解)했든, 아니면 내공이 너무 심후해서 애초에 진법이 먹히지 않았든... 당신은 엄청난 내공의 소유자요."

"......"

진법!

나는 망량선사가 이토록 확신을 가지고 말하자, 그가 일종의 진법가(陣法家)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도 그는 평소에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 진법을 설치해서 어중이떠중이가 올라오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여자를 불러서 떡치고 놀고 있었는데 하필 내가 찾아오는 바람에 방사장면을 들키게 된 것이리라.

망량선사의 주절거림은 계속되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내 망운진은 강호일절(江湖一絶)이라고 할 만 한데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했다면 당신은 최소한 구파일방의 장로이거나 장문인급이오. 혹은 그 이상일수도 있지. 나는 그런 당신의 정체를 알고싶다는 거요."

"정체를 알아서 뭘 어쩔 셈이지?"

망량선사가 인상을 찡그렸다.

"내 목숨을 걸고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그 정도도 못해주는 거요?"

그가 아까부터 목숨 운운하는 걸로 봐서는, 그는 현재 내게 살해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싶었다. 하긴 망운진이 돌파당해서 무방비상태에 놓인 현재 그는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심정이리라. 아까부터 태연한 척은 하고 있으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것도 보였다.

나는 그가 사기꾼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백웅이오. 무관에서 수업을 쌓아서 현재 여행중이며 구파일방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소. 내가 오늘 당신을 찾아온 건 전적으로 이 천암비서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서요."

"천지신명에게 맹세할 수 있소?"

"물론이오."

그제서야 망량선사는 약간 안심한 듯 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말했다.

"내가 이 천암비서의 괴상한 글자를 처음 본 것은... 내황각(內皇閣)이었소."

"내황각이 뭐요?"

"황제와 천문관(天文官)만이 열람할 수 있는 장서실(藏書室)이오."

"......!!"

내가 놀란 눈으로 망량선사를 쳐다보자, 그는 체념한 듯 말했다.

"나는 전직 천문관 출신이오. 현재는 황실을 나와서 선사 노릇을 하면서 살고 있소."

천문관!!

그것은 한 해의 길흉화복을 점치고, 황실의 번영을 기원하며, 나아가서는 국가적인 도교(道敎) 의식을 주관하는 제사(祭事) 직위였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황실 내 직책중에서도 특별하게 취급되는 듯 하며, 과거(科擧)로 뽑히는 직위가 아닌 세습직이었다. 내가 천문관에 대해서 잘 아는 이유는 과거 금만재가 과거공부 푸념을 하다가 자기도 천문관이면 꿀을 빨고 있을 거라면서 별 개소리를 다했기 때문이다.

"세습직을 관둘 수도 있단 말인가?"

"나는 역량이 부족했소. 내 형님이 더욱 특출났기에, 나는 수도에서 쫓겨나서 낭인으로 살게 된 것이오."

"음... 안 죽은 게 다행이군."

"이런 저런 일이 있긴 했소."

씁쓸하게 웃은 망량선사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내가 내황각에서 이 글자를 본 기억이 있소. 내 기억대로라면 그 책의 이름은 무명제사서(無名祭事書)였소. 그 책 또한 이 천암비서와 마찬가지로 영문을 알 수 없는 괴어로 이루어져 있었소."

"당신은 천문관 공부를 했을텐데 전혀 해석할 수 없었소?"

"불가능하오."

이어진 망량선사의 말에 나는 그야말로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무명제사서와 천암비서... 이 두 책은 인간(人間)이 쓴 책이 아니기 때문이오."

"뭐라고?"

인간이 쓴 책이 아니라니!

이건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인간 말고 대체 어떤 존재가 이런 괴상망측한 책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이래봬도 나는 진사(進士)이자 탐화(探花) 출신이오."

"뭐라고?! 진짜요?"

"정말이오."

진사이자 탐화.

그 의미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진사란 매년 중원 전역의 수백만 명의 문사가 도전하는 과거시험 최종합격자를 의미한다. '회시'에 합격하면 진사가 되는데 이후 몇 달 후 황도에서 황제 앞에서 등수만 가리는 시험인 '전시'를 볼 자격이 있는 신분을 의미한다.

전시에서 1등 합격자를 장원(壯元), 2등 합격자는 방안(榜眼), 3등은 탐화(探花) 라고 지칭하며 특히 더 우대했다. 이들은 등수는 관례적으로 황제가 뽑으나 전시과가 끝나고 나서 잔치에서 1,2,3등 합격자는 친히 황제가 따라주는 술잔을 받는다고 한다.

이는 친왕(親王)이라도 할지라도 받지 못하는 대접이었다. 진사출신을 이만큼 나라에서 예우한다는 의미이며 당연히 술잔을 받은 합격자는 평생 잊을수 없는 자랑거리이고 몇대에 걸칠 가문의 영광이다. 을(乙) 일갑(一甲)과 수십명의 2갑 상위권 중에서 상위권은 한림원으로 천거되고 2갑 나머지는 육부(이호예병형공)에 배치, 대부분의 3갑은 보통 지방 수령직부터 시작하게 된다.

즉 눈 앞에 있는 망량선사는 - 중원 전역의 문사 중에서 가장 뛰어난 천재 중 한 명이라는 뜻이었다.

망량선사가 말했다.

"세습직인 천문관의 비밀을 지켜야 하기에 수도에서 내쫓겼지만, 이 대륙의 모든 문사(文士) 중에 나보다 뛰어난 자는 거의 없으리라고 확신하오.

내가 공부한 언어는 16종류나 되며, 서역어와 천축어도 다 알고 있으며, 그 중 열 개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소. 그런 나조차도 무명제사서와 천암비서의 글자는 어디에서도 단서를 찾을 수 없었던, 완벽한 외계어(外界語)란 말이오."

============================ 작품 후기 ============================

선작추천 코멘트 부탁드려요 ㅠㅠ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