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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룡출도(雷龍出道)
천년설삼의 힘을 얻고 나니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무림인에게 있어서 내공이란 초인(超人)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근간으로써, 내공이 많다는 것 자체로 한차원 다른 실력을 가지는 게 보통이었다. 물론 내공에 못지 않게 전투술과 무기술도 중요했으나 우선 내공이 받쳐주면 뭐든 해볼 수 있는 것이다.
' 그러고보니 경공술은 얼마나 늘어났을까?'
나는 이 장 높이에 있는 절벽동굴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정상적이라면 여기에서 샛길을 통해 나가는 게 옳겠지만, 한번 내 경공이 어느정도 진보했는지 시험해보고 싶어진 것이다. 게다가 마침 기운을 써서 그런지 배가 고팠기에 빠르게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도 강했다.
본래 내가 경공술을 발휘하면 정확히 오 척(五尺) 정도를 뛰어오를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의 키만큼 뛰어오를 수 있는 셈이니 이것만 해도 굉장했으나 왠지 지금이라면 그 이상도 가능할 것 같았다. 나는 절벽 앞에 서서 발에 힘을 주고 뛰어올랐다.
투웅!
"허어엇! 얍!"
나는 갑자기 이 장 위까지 솟구쳐 올라서 훨훨 날자 깜짝 놀랐다. 그 와중에도 재빨리 동굴벽에 손을 갖다대서 붙잡은 건 반사신경 덕분이었다. 놀랍게도 예전에 비해서 두 배 이상 경공술의 탄력이 늘어난 것이다!
이 정도면 내가 뛰어오를 수 없는 암초나 담장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동굴으로 걸어들어가면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 이... 이거 듣던 것보다 더 엄청난 내공인데?'
원래 내가 알기로 천년설삼은 절세의 영약으로, 한 번 복용하면 굉장한 내공을 손에 넣는다고 했다. 그러나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으므로 실감이 가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간단하게 장법(掌法)을 뿌리는 것만으로도 개세(蓋世)적인 위력이 날 것 같았다.
휘이잉!
"빠르다..."
나는 날듯이 산골짜기를 달려가면서 내 감각이 한층 다른 지평으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험난한 바위와 좁은 길가를 퉁퉁 뛰어다니면서 전혀 힘들거나 어렵지가 않았고, 마치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느긋하게 주변의 광경을 볼 수도 있었다. 제 3의 눈이 뒤통수에 달린 것처럼 등 뒤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도 대충 감지할 수가 있었다.
심지어 발이 미끄러운 바위에 갑작스럽게 내려앉았는데도, 발에 공력을 두르고 있기 때문인지 전혀 미끄러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천지가 마치 내 것이 된 것처럼 자유롭게 새처럼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내가 정상적으로 무공수련을 해서 이 정도 내공을 손에 넣으려면 얼마나 되는 세월이 걸렸을까?
50년? 100년?
확실한 것은 나도 나름대로의 노력을 한 결과 천년설삼을 손에 넣었고 그 보답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원하는대로 이 힘을 사용할 일만 남아있었다. 나는 이제 설령 죽는다고 해도 초반이 전혀 괴롭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평소의 다섯 배는 되는 속도로 날듯이 산행을 해서 그런지 해가 지기 전에 내 초갓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건 물론이고 3년동안 시간이 남을 때마다 보수를 해서인지 지금은 일반 가정집이라 해도 될 정도로 튼튼해져 있었다. 나는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서 짚더미에 풀썩 드러누웠다.
"아얏."
그 와중에 손톱이 뽑힌 부분이 아팠다. 짚에 닿이면 상처환부가 감염되어서 고름이 나올 게 뻔했으므로, 나는 적당히 상처를 천으로 감쌌다. 생필품은 다 챙겨놓았기에 이럴 때는 편했다.
고통이 좀 가라앉자, 나는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힘을 얻고싶어서 무진장 갈망했었지만, 막상 손에 넣고 보니 너무 할 게 많아서 감이 잡히지 않았다.
' 촌장에게 복수하고 싶다. 하지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암살청부를 해서 나를 죽인 촌장에게 복수하는 것. 그야말로 피의 복수를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왠지 그건 지금 우선순위에 놓기 싫은 일이었다. 힘을 얻은 김에 촌장을 개박살나는 건 호쾌한 일이지만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
과거, 내가 마도팔문 흑야문 살수조와 맞닥뜨려서 죽기 직전 생각했던 것은 [세상은 무섭다]라는 한 문장이었다.
그래.
세상은 무섭다.
2번째 삶에서 고작해야 촌장 하나 협박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이류무사는 상대도 되지 않는 암살자들이 무더기로 출동한다.
지금 내가 촌장일가와 마을을 싹 쓸어버리면 마음은 속시원하겠지만, 그 살겁(殺劫)을 조사하기 위해 관아에서 파견을 나오거나, 촌장과 평소에 거래를 하던 매화표국이나 개방에서 진상조사에 나설 것이다. 그 와중에 내 정체가 밝혀지면 새로운 살성(煞星)이 강호에 알려지게 될 것이고 각지의 정파무림인들과 쉴 새 없이 싸워야 될지도 모른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다. 규칙이 있고 질서가 있다. 그걸 어기게 되면 그에 상응하는 벌(罰)이 주어진다. 힘이 강할수록 그 한계를 무시하기 쉽지만, 역시 누군가의 영향력을 늘 신경써야 한다.
나는 촌장일가 하나 없애버리고 평생에 걸쳐서 도망질이나 하고싶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촌장일가의 목숨과 내 인생을 동급에 놓고싶지 않았다. 기왕 복수를 할 거면 내 인생을 반석(盤石)에 올려놓고 탄탄하게 다진 후, 촌장을 벌레처럼 짓눌러 죽이는 복수를 하고싶어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힘을 휘둘러서 박살내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내가 그 행동을 해도 세상사람들의 제재나 견제가 최소한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나에게 그만큼의 힘과 지위나 명성이 존재해야 했다. 혹은 부(富)라고 해도 좋았다.
"하핫."
나는 피식 웃었다. 이런 생각들은 사실 천년설삼을 찾아서 먹기 전에 진작에 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무려 30개의 봉우리를 뒤져야 하는 극도의 노동과 정신적 압박에 시달리는 중이라서, 허무맹랑한 앞일생각을 하다보면 힘만 더 빠졌다. 하나에 몰두하다보면 미래의 일을 어떻게 할지 생각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제일 '해야만 하는 일'부터 생각해 볼까."
복수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그렇다면 내게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천암비서(天暗秘書)를 해석하는 것이다."
이게 우선이었다. 당장 부와 명성을 얻기 위해 날뛰는 것도 좋겠지만, 사실 천암비서가 과거로 역행(逆行)시켜주는 능력은 너무 의문스러운 게 많았다. 막말로 지금까지 2번의 역행이 끝이었고 3번째는 없다고 해도 나는 할 말이 없다. 나는 천암비서의 제목 빼고는 내용을 한 줄도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역행이란 잘만 사용하면 천하의 지배자로 군림할 수도 있는 힘이다. 나는 천암비서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이 역행능력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도는 파악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천하에서 가장 똑똑한 현자(賢者)를 찾아야 한다.
가장 똑똑한 자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한참 골똘히 생각하다가 행선지를 결정할 수 있었다.
낙양(落陽).
천하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자, 대륙의 황제(皇帝)가 거주하는 수도. 나는 복잡한 건 잘 몰랐지만, 세상에서 가장 권세와 부가 밀집한 곳에 가장 똑똑한 인간들도 무더기로 존재할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 흠. 그러고보니 포목점 송 씨한테도 빚을 갚아야 하는데.'
내가 처음 황산에 왔을 때 친절하게 밥을 먹여주고 새 옷을 줬던 사람이다. 비록 옆 마을에 있는 사람이라서 천년설삼 탐색동안에는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사실은 명확히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목재소에 나무를 갖다주면서 번 돈을 갖다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 때 느꼈던 은혜는 그정도가 아니었다.
좀 더 큰 것으로 갚아주고 싶다.
은혜든 원수든간에 감정이 가는 수준, 그 이상으로 돌려주고 싶은게 내 심정이었다.
나는 우선 뭘 돌려주던간에 일단 물어보기나 하기로 했다. 어차피 옷도 새로 한 벌 해야하던 참이므로, 나는 다음 날 초갓집 생활을 정리하고 황산을 떠났다. 그리고 포목점 송 씨를 찾아갔다.
포목점 송 씨는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 자리에서 여전히 영업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가서 빙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간만입니다."
"어... 누구였더라..."
"그 때 한 끼 얻어먹은 덕분에 사공표국까지 잘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 그때 그 소년!"
그는 나를 명확히 기억하는 듯 했다. 그 사실이 더 반가워서 나는 송 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오 그래... 그 후로 표사가 되어서 살았다는 거군."
"네."
"그런데 왜 또 거지꼴인가?"
"산속을 헤매다 보니..."
그러자 송 씨는 혀를 끌끌 찼다.
"미안하지만 나도 요즘은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아서 공짜로 옷을 해줄 수는 없겠네..."
"아뇨 옷이라뇨. 신세를 아직 갚지도 못했는데..."
나는 슬며시 물어 보았다.
"그런데 사정이 안 좋은 이유가 뭡니까?"
"별거 있나. 옷은 언제나 잘 팔리는데 상납금이 점점 많아지는거지, 엥이."
그는 옆에 놔두었던 연초를 꺼내서 뻑뻑 피우는 듯 했다. 연초가 그리 몸에 좋지도 않은데 장죽으로 피우는 걸 보면 그만큼 속이 상하는 듯 했다. 물론 송씨같은 전문직 장사치는 거의 필연적으로 누군가에게 상납금을 내게 되어있으나, 그 정도가 지나친 모양이었다.
"누구에게 상납을 하는 거죠?"
"자넨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나?"
"황산이죠."
송 씨가 연초장죽을 툭툭 바닥에 두드렸다.
"그럼 황산파지."
"아..."
말장난하는 듯한 문답이었으나 나는 그 순간 황산파의 위세가 얼마나 강한지를 체감할 수 있었다. 황산 근처에 무림문파가 한두개도 아니었고, 내가 아는것만 열 개가 넘었는데 '당연히' 황산파에 상납한다고 하는 말에서 영향력을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상납하시길래 여유가 없으신지..."
"말도 말게. 내가 한달 내내 포목 팔고 재단을 해서 은자 두 냥을 벌까말까 해. 그런데 황산파 놈들은 늘 은자 한 냥을 요구하네. 날강도도 이런 날강도 놈들이 없어."
"......!!"
그 정도면 날강도라고 불러도 상관없는 수준이었다. 아무리 잘나가는 무림문파라도 정파(正派)라는 간판을 앞에 붙이고 있다면, 적당한 선에서 상납금을 멈추라고 하는 법이었다. 사파가 아닌 이상 과도한 상납금은 틀림없이 문파의 평판을 떨어뜨리고, 나아가서는 관아의 개입을 불러오게 마련이었다. 사파나 마도문파인 경우는 폭력으로 협박해서 관아에 이를 수 없도록 하는 방법을 썼다.
그렇기에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했다.
"어르신만 그렇게 내는 겁니까?"
"아닐세. 이 마을은 물론 근처마을 사람들은 다 그렇게 낸다네."
"못 내면 어떻게 되는데요?"
"이 마을에서 먹고살 수 없게 되지. 황산파가 지주(地主)들에게 압박을 해서 소작농을 쫓아내게 하거나, 혹은 장사를 못하게끔 해 버려. 어찌할 방법이 없는 게야."
"......"
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관아에 행패를 고하면 안됩니까?"
"후... 그게 되면 진작 했겠지. 관아의 지부대인은 물론 성주 아래까지 황산파의 영향력이 미치는 거 모르는가?"
송씨는 답답한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번 꼬바르면 황산파가 잠시 주춤하긴 하겠지만, 고발한 당사자는 반드시 황산파에게 해꼬지를 당할 게야. 누가 알아서 고양이 목에 쥐방울을 달려고 할까?"
"그렇군요..."
황산파는 정파지만 패도를 지향하는 문파다. 직접적으로 대놓고 손을 쓸 수는 없어도 평민 하나 족치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그냥 가면 쓰고 찾아와서 무공으로 때려눕히는 방법을 쓴다고 해도 이 근처에 황산파에 거역할 무림문파가 없는 탓에, 그 누구도 따지고 들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생각보다 황산파의 행패가 심한 걸 깨닫고 침음성을 흘렸다.
' 암만 그래도 구파일방이고 정파인데 너무하는군. 비교적 행패가 심하다는 점창파의 속가제자들도 이정도는 아닐텐데 도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동시에 내 머릿속에는 생각보다 빠르게 은혜를 갚을 때가 찾아왔다는 신호가 울려퍼졌다. 송 씨에게 은자 몇 푼 내놓는 것보다는, 황산파의 간섭을 줄여주는 거야말로 고마운 일일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황산파와 직접 대적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아무리 천년설삼의 내공을 얻게 되었어도 진정한 초절정고수와 상대할 수는 없다. 나는 머리를 써서 이번 일을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 아! 그러면 되겠군!'
나는 좋은 생각이 나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송 씨에게 말했다.
"뭐... 가만 기다려 보십쇼. 사흘 내에 좋은 소식이 있을 거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