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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12화 (12/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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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설삼(千年雪蔘)

정신을 차렸을 때는 포목점 주인의 집에 누워 있었다. 포목점 주인은 갑자기 기절한 나를 옮겨준 모양이었다. 보기 드물게 인정많은 사람이었기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서 그에게 감사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무슨 사정이 있길래 표사가 되려고 하는 게냐?"

"그게 가장 먹고살기 쉬운 방법일 거 같아서요."

"표사는 굉장히 구차하고 힘든 직업이거늘.. 끌끌."

포목점 주인이 혀를 끌끌 찼고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 표사는 반쯤 무림인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운송업에 고용된 몸쓰는 하인 역할이다. 표사중에 일류나 절정무공을 익힌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고 대부분은 미천한 무공으로 한평생 구르다가 죽는 경우가 많았다. 차라리 눈 앞의 포목점 주인이 더 먹고살기 쉬울지도 모른다.

포목점 주인은 말했다.

"미안하다만 나도 먹고살기 바빠서 너 돌봐줄 힘이 안 되는구나. 물이나 마시고 나가거라."

"아뇨. 충분히 감사합니다."

"아까 말했듯이 이 근처엔 표국이 없어. 한참 산을 몇개 넘어서 왕하(王河)까지 가야 사공표국(司公票局)이 있다."

포목점 주인은 곧 내게 깔끔한 옷을 건네주었다. 내 체형에 대충 맞는 걸로 봐서는 원래 있던 옷을 대충 재단한 듯 했다.

"저, 돈이 없습니다만..."

"그냥 받아가거라. 요즘 세상에 거지꼴로 보이면 길보다 흉(凶)이 많다."

"... 감사합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하핫. 포목점 송씨라고 다들 부른다."

"네. 안녕히 계세요."

나는 옷을 갈아입고 포목점을 나서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 삼송표국의 장철... 포목점 송씨... 두 사람한테는 어떻게든 신세를 갚을 것이다.'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각박한 세상에서 남한테 대가없이 뭔가를 베푸는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나만 해도 이득되지 않는 일인데도 남을 도운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 먹고살기도 바빴기 때문이다. 장철이나 송씨는 나와 별다를 바 없는 인생인데도 피해를 감수하고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인데, 이건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었다. 내가 은혜를 갚지 않는다면 내가 개새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겨서 왕하로 향하기 시작했다. 왕하로 향하는 길에는 야생동물을 잡는 요령이 늘어서 고기를 구워먹는 빈도가 늘었다. 황산 일대에는 황산파를 비롯해서 군소무림문파가 많아서 그런지 산적들이 보이지 않았다.

쏴아아아 -

차가운 폭포가 떨어지길래 내공을 끌어올려서 몸을 보호한 후 더러워진 몸을 씻었다. 보통이라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지만 영양분을 충분히 섭취한데다 내공을 잘 닦았기에 별로 춥지도 않았다. 옷을 말리고 나니 한층 기분이 개운해진 느낌이었다.

왕하 지역에 도착하자 사공표국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내가 황산 지역에 거의 온 적이 없어서 잘 모를 뿐, 사공표국 또한 이 일대에서는 가장 큰 표국이었다. 읍내에 들어서자마자 사공표국을 물어물어 찾아가는 건 쉬운 일이었다.

사공표국의 현판 앞에 서서 나는 잠시 생각을 했다.

' 사공표국... 사공씨(司公氏)가 세운 표국이라고 하는데 별로 들은 게 없어. 여기에 몸을 의탁해도 괜찮으려나? 뭐 지금은 이거 말고 방법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지...'

잠시 후 나는 사공표국 안으로 들어갔다.

웅성웅성

"야 그 짐 이쪽으로 옮겨!"

"표인(票認) 안찍었네 이거! 막내야 이거 갖고 가서 표인 찍어와라~"

"네 형님!!"

안쪽은 표국답게 여러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표물을 옮기고,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들 눈코뜰 새 없이 바쁜 틈이었지만 나는 표위에게만 찾아가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저기, 표사가 되려고 하는데 받아주실 수 있습니까?"

"어?! 꼬맹아 농담 집어쳐!! 바쁘니까 저리 가라!"

표사 하나를 붙잡고 시험삼아 물어봤지만, 그 자는 인상을 찡그리며 개소리 취급할 뿐이었다. 하긴 몸쓰는 일이 대다수인 표사인데 10대 초중반의 꼬마가 표사가 되고싶다고 하면 허무맹랑한 소리인 것이다. 나라고 해도 저런 대답을 했을 것이기에 이번에는 제대로 질문해 보았다.

"사공표국의 표위님을 보고 싶은데 어디 계십니까?"

"어?! 표위님 저기 계시잖아 저기! 흰 옷 입으신 분!"

스윽

나는 표사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확실히 그 곳에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새하얗게 짜낸 듯한 고급 백의(白衣)를 입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기품있는 외모로 보아서 근본부터 표사 출신이 아니라 세가 출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점에서 놀랐다.

' 여자?'

그랬다. 표위라고 지적받은 인물은 백의를 입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예전에 봤던 촌장의 첩인 서씨보다 더 예쁜 것 같았다. 나이는 이제 막 이십대 중반쯤 되었을까,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피부가 티없이 고왔다. 특히 보는 사람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듯한 맑은 눈동자가 그녀가 뛰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었다.

다만 여자 표위는 정말로 태어나서 오늘 처음 보는 존재였다. 표위가 일반표사보다 사무일을 많이 하는데다 돈도 많이 받는다고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몸쓰고 힘쓰는 직종이다. 가녀린 여자가 표위를 한다는 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여기저기를 둘러보면서 걷는 걸 목격하자 이내 납득할 수 있었다.

' 무공(武功)을 익혔군!'

그녀의 가벼운 움직임에는 그다지 낭비가 없었고 표홀했다. 저것은 상승(上昇)의 보법(步法)을 익혔을 때만 나타나는 현상으로, 걸음 하나하나에 무공의 정수(精髓)가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녀는 못해도 이류급 이상의 무공을 지니고 있을테니 표위에 걸맞는 무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여자 표위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표사가 되려고 찾아왔습니다!"

"응?"

그녀는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돌려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정면에서 그녀의 얼굴을 보자 잠시 머리가 하얗게 비는 것 같았다. 옆모습을 볼 때만 해도 미색(美色)이 한 폭의 그림같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에서 정면으로 보니 절세가인(絶世佳人)이라는 말이 아깝지가 않은 것이다.

가히 경국지색(傾國之色)!

' 와... 이렇게 예쁜 사람은 머리털 나고 처음보는구나...'

어찌나 아름다운지 성욕같은 게 일어나기보다는 그저 멍하니 감탄사만 나올 정도였다. 일개 표국에 이런 미녀가 있다는 건 생전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포시 웃더니 내 뺨을 쓰다듬었다.

"꼬마야, 이름이 뭐니?"

"백웅(白熊)입니다."

"나는 사공표국의 표위인 사공린(司公燐)이야. 미안하지만 네 나이가 너무 어려서 표사로 받는 건 힘들텐데 우선 일꾼으로 일해보는 게 어떻니?"

그녀 딴에는 아이를 배려해 준 것 같았으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일꾼으로 일하다보면 기약없이 잡일만 하게 될 것이다. 표사가 되어서 화물운송과 호위담당 일만 하는게 훨씬 편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강변했다.

"저도 충분히 표사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흐음..."

사공린은 곤란한 듯 웃었다. 그 가벼운 웃음도 뭇 남자들의 가슴을 덜컹거리게 하는 마력(魔力)이 있었다. 실제로도 주변에서 짐을 옮기는 일꾼이나 표사들도 사공린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신경쓰고 있었다. 직급은 다르지만 사내로써의 본성이 사공린에게 매달리게끔 만드는 듯 했다.

"그럼 표사가 하는 일이 뭔지 알고 있니?"

"남들만큼은 알고 있어요."

"표사라는 건 최소한의 무술(武術)과 완력을 가지고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란다. 네 나이가 그렇게 어린데..."

"잘 보세요."

슈욱!

나는 사공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번개처럼 뇌영보(雷影步)를 운용해서 근처의 표물에게로 다가갔다. 너비만 일 장에 이르고 굉장히 커다란 목제장식인 듯 했다. 무게는 아마도 장정 서너 명이 땀흘리며 옮겨야 할 정도인 게 분명하다.

"하앗."

하지만 나는 무거운 목제장식을 가볍게 두 손으로 머리 위에 들어올렸다. 한 손으로도 가능했을테지만 너무 세 보이는 걸 피하고 싶었기에 일부러 안정적으로 들어올린 것이다.

"허억!"

"무, 무슨 힘이..."

"저게 애 힘이야?"

주변에 있던 표사와 일꾼들이 웅성거리며 당황해했다. 실제로도 이건 성인남성 한 명의 완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들어올릴 수 없는 무게다. 숙련된 일꾼들이 두세 명씩 달라붙어서 힘의 가감을 잘 조정해야 옮길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런 걸 나같은 어린애가 들어올렸으니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공린도 놀란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아... 상당한 내공(內功). 너는 고명한 무가(武家)의 자제였구나?"

그녀도 무공을 익힌 몸이라서 내가 뇌룡일기공의 힘으로 목제장식을 들어올렸다는 사실을 간파한 모양이었다. 숨기는 게 의미가 없었기에 나는 적당히 사공린에게 둘러대었다.

"부모님과 일찍 사별해서 그동안 익힌 무공을 쓸 데를 찾고 있었습니다. 표사로 꼭 일하고 싶습니다."

"잠깐 여기서 기다리렴."

휘리릭!

그녀는 마치 구름이 일렁이는 듯 몽환(夢幻)적인 보법으로 장내에서 사라졌다. 안쪽의 건물로 들어간 것 같았는데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녀의 보법 수준이 나를 능가한다는 걸 깨닫고 놀라운 생각이 들었다.

' 저건 표위가 지닐만한 무공이 아니잖아? 죽기 전 2번째인생의 나보다 강할지도 몰라.'

최소한 일류고수!

사공린이 익힌 무공은 표사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근성과 노력으로 발달시킨 자기류의 무공이 아니다. 틀림없이 오랜 세월 명문무가에 전승되는 일류무공이었다. 게다가 보법을 암향(暗響)의 경지로 운용한다는 건 사공린의 무공이 일개 표위따위는 서너명이 덤벼도 때려눕힐 수준이란 걸 의미했다.

나는 표사들의 시선을 받으며 뻘쭘하게 그 자리에 서 있는 상태로 기다렸다. 그리고 나는 사공표국이 범상치 않은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사공표국... 사공린... 사공씨의 직계혈족이 운영하는 표국인 건가? 그렇다면 이 표국의 표위급 이상 간부들의 무공은 왠만한 대문파에 못지 않을 것이다.'

이런 곳이 중원에 이름을 떨치지 않은 게 신기한 수준이다. 나는 전생(轉生)을 반복하면서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아간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렇게 중원을 여행하다보면 언젠가는 무불통지(無不通知)가 되어서 천하제일의 지식을 자랑하게 되지 않을까?

한참 후 사공린은 왠 백의(白衣)를 입은 무인 세 명과 함께 돌아왔다. 그들은 사공린과 달리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들이었는데, 하나같이 준수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못생긴 외모인 나로써는 살짝 기가 죽는 헌앙한 기골이었다. 아마도 사공씨의 혈족들일 것이다.

개 중 제일 앞에 서 있던 키 큰 백의무인이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았다.

"우릴 따라와라!"

휘익

그리고는 바람소리나게 등을 돌려서 넷이서 어디론가 걸어갔다. 나는 그들을 따라갔는데 이내 사람기척이 없는 한적한 공터가 나왔다. 내가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 그 백의무인이 말했다.

"린아에게 듣기로 네 무공이 나이에 맞지 않게 뛰어나다고 들었다. 틀림없이 명문세가(明門世家)의 자제일 것 같은데, 출신과 무공연원을 밝혀라."

린아라고 애칭으로 부르는걸 보면 그는 사공린의 손윗혈육인 듯 했다. 확실히 외모를 보면 닮은 점이 많았고 그 또한 준수한 미남자였다.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게 꼭 필요합니까? 제 이름과 사정을 밝혔을 텐데요."

"미안하지만 우리 사공표국은 함부로 무림세가의 사정에 얽힐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다. 네가 그걸 밝힐 수 없다면 무공이 아무리 강해도 쫓아보낼 수밖에."

그들은 내가 명문세가의 자식이고 무단가출을 한 철부지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다른 표국이라도 거절할 판에 사공표국이 혈족운영으로 이루어지는 표국이니 거부감이 더 심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변명할 말이 마땅치 않아서 궁색해졌다. 내가 익힌 무공은 청룡무관의 비전무공인데, 저 자들 중에 눈썰미가 있는 자가 있을 경우 뭐라 할 말이 없어진다. 기껏해야 청룡무관주 삼절 이광의 자식이라는 식으로 둘러대는 수준인데 그게 얼마나 통할지도 의문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다가 도박을 걸어보기로 했다.

"정말로 제가 익힌 건 가전무공(家傳武功)이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먹고살 길이 없어서 표사가 되려고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믿어주시겠습니까?"

만에 하나 저 백의무인들이 내 무공이 청룡무관 것이란 걸 알아채면 일이 복잡해진다. 하지만 나는 저 놈들이 그 사실을 모른다는 데 도박을 걸기로 했다. 여기서 청룡무관은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서로 교류가 있을 가능성이 낮았다.

그러자 아까부터 나를 추궁해 오던 미남자가 훗하고 웃었다.

"시험해보면 알겠지. 현(顯)!"

미남자 옆에 서 있던 백의무인 중 한 명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 또한 사공씨 일족의 무인으로 보였는데 주무기가 검인 듯 했다. 미남자가 양쪽에 목검을 던져주며 말했다.

"사공현과 목검으로 오십 초만 대련해 봐라. 네가 어느 세가의 출신인지 알아내고 말겠다."

나는 허공에서 목검을 잡아채며 말했다.

"... 아까부터 툭툭 무례한 말을 해대는데, 그러는 당신 이름은 뭡니까?"

"음? 패기있는 놈이군..."

미남자는 황당한 듯 말하다가 대답했다.

"나는 사공패(司公覇)다."

"사공린 표위와 가족이십니까?"

"친오빠다. 그리고 여기 있는 모두는 같은 친족(親族)이고."

그랬군.

나는 대충 예상이 맞아들어가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 어디 해 볼까.'

근골이 다 자라지 않은 아이의 몸이지만 수련했던 무공의 기억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게다가 산과 수풀을 헤치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몸도 충분히 풀린 상태이다. 몸이 조금 작다는 걸 빼면 크게 실력차이가 나진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공현과 목검을 마주든 채로 일 장 거리를 유지했다. 서로가 강하게 노려보다가 갑자기 찔러들어갔다.

첫 공격은 서로가 가볍게 탐색하고, 다음 공격에서 참격(斬擊)이 부딪혔다. 불꽃이 환영처럼 튀기다가 번개처럼 찔러들어가기를 반복했다.

까아앙!

"헉...?! 이, 이런."

결판이 나는데는 고작해야 칠 초(七招)밖에 걸리지 않았다. 내가 전개한 뇌영검법은 뱀처럼 유려하게 빈틈을 파고들어가서 사공현의 목검을 반토막내버린 것이다. 곧이어 사공현의 목젖에 검극을 갖다대자 변명할 여지없는 승리가 확정되었다.

"와아..."

"아니 저럴수가."

사공린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다가 사공패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자 나는 약간 흐뭇해진 기분이 들었다.

' 죽기 전보다 내공 절대치가 늘어난 것 같은데? 외양간에서 내공이 한단계 진일보한 건가.'

나는 투지가 샘솟는 상태로 사공패에게 이죽거렸다.

"너무 빨리 끝나서 제 무공이 뭔지 보여드릴 기회가 없었네요."

"흠... 그래. 네 또래 중에서는 과연 적수가 없겠구나."

어라 거기서 솔직하게 감탄해 버리냐?

사공패의 대응에 조금 김이 빠져버렸다. 열등감을 폭발시키면서 찌질대는 전개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침착한 것이다. 나는 이제 사공패가 나서서 나와 한판 겨룰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예상을 빗나갔다.

"린아. 네가 상대해 보거라."

"네, 오라버니."

"......?!"

나는 목검을 들고 걸어나오는 사공린을 보자 당황했다. 여기서 왜 사공린이 나온다는 말인가? 당연히 사공패가 나서서 멋진 실력을 보여주려고 할 것 같았는데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여자와 싸우는 게 껄끄러운데다가 사공린과 겨루게 되면 왠지 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오빠이신 사공패 님이 나서는게 이치에 맞지 않습니까?"

사공패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린아가 나보다 훨씬 강한데, 네 실력을 측정하려면 당연히 린아가 나서야겠지."

"......"

담담하게 자신이 여자보다 약하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사공패였으나 옆에 서 있던 백의무인들 중에 표정이 변화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 모두가 사공린을 최강으로 인정하는데 주저함이 없다는 증거였다.

내가 사공린을 쳐다보자, 그녀는 이미 자세를 잡고 있었다.

고아한 기품을 지닌 흑발미녀가 목검을 들고 자세를 잡는 건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사공린이 나와 눈을 마주치자 생긋 웃으며 말했다.

"잘 부탁해요."

그녀의 말투는 반존대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도 예의를 차렸다.

"네, 저야말로."

나는 약간 긴장하는 마음이 들었다. 여자라고 얕볼 게 아니라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잉 - !!

대결이 시작되자 서로의 검이 휘둘러지며 순식간에 십여 초가 지나갔다. 광풍(狂風)처럼 휘몰아치는 검격 사이에서 나는 빈틈을 찾아보려 했지만, 사공린의 검세(劍勢)는 사공현 따위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엄밀하고 빨랐다. 게다가 한 수 한 수에 묵직한 힘이 담겨있어서 섣불리 힘으로 대응하기도 껄끄러웠다.

꾸웅!

' 윽...!!'

나는 한 차례 검날이 부딪히자 손아귀가 찢어지며 피가 터지는 걸 느꼈다. 사공린의 검격에 실린 내공이 막강해서 약간 내상을 입은 느낌이 들었다. 놀라운 일이지만 사공린의 내공은 지금의 나보다 훨씬 윗줄에 있는 것이다.

휘리릭 휘릭

갑자기 사공린의 몸이 팽이처럼 휘돌더니 환영(幻影)처럼 무려 열두 개의 방위를 찔러들어왔다. 급히 동체시력을 발휘하며 사공린의 공격을 걷어냈으나 완벽하지 못해서, 결국 나는 갈비뼈 아래쪽과 허벅지를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이내 사공린이 목검을 내 관자놀이에 갖다대자 나는 패배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졌습니다."

나는 자괴감이 들었다.

세 번째 전생(傳生)을 거치면서 이제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로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자한테도 질 정도로 약했단 말인가? 세상에 나보다 강한 놈이 많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억울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백의무인들의 반응은 달랐다. 특히 사공린의 오빠인 사공패는 정말 놀랐는지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험, 험험... 린아를 상대로 백오십 초라... 정말로 장래가 두려운 꼬마로군."

"놀랍습니다. 어떻게 저 나이에 저런 내공을?"

"훌륭하군요..."

엥?

그들은 내가 졌다는 사실보다는 사공린을 상대로 백오십 초를 버텼다는 사실에 순수하게 놀라워하고 있는 듯 했다. 즉 사공린의 실력은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윗줄에 있다는 뜻이었다. 사공패가 사공린에게 물었다.

"린아야. 그 아이의 무공이 어디의 것인지 알겠느냐?"

사공린은 질문을 듣자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의 눈이 너무 맑아서 잠시 숨이 막혔다. 동시에 그녀에 대한 열패감 보다는, 그녀를 언젠가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소유욕이 문득 치솟는 게 느껴졌다.

곧 사공린은 맑게 배시시 웃었다.

"잘 모르겠어요. 백웅 소협의 말은 사실같아요."

"음... 네가 그렇게 말하면 그런 거겠지."

사공패는 잠시 후 흡족한 듯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좋아! 너를 사공표국의 신입표사로 받아들이겠다."

나는 그 날 사공표국의 주인인 사공환(司公煥)을 만나러 갔다. 그는 50대 초입에 접어든 장년인으로 보였는데 상당히 근엄한 인상이었다. 사공패의 전후설명을 듣던 사공환은 사공린과의 비무결과를 듣더니 눈에 이채를 띄었다.

"뛰어난 소년이군. 앞으로 우리 사공표국을 위해 열심히 일해 다오."

"네, 국주(局主)."

이제부터 정식으로 사공표국의 표사가 된 것이다.

나는 사공환의 허락이 끝난 후에야 신입표사의 표식, 의복, 무기를 지급받았다. 내가 옷을 다 갈아입고 나오자 왠지 땅딸보같은 외형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 해도 앞으로 먹고살기에 감지덕지란 걸 알고 있으므로 취업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숙소로 걸어가던 중 다시 사공린을 만났다. 그녀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나를 보자 곧장 눈을 마주쳤다.

잠시 후 나는 벼락같이 놀랐다.

[ 소협. 청룡무관(靑龍武館)과 무슨 관계가 있나요?]

"......!!"

전음(傳音)!

진정한 일류고수, 또는 절정의 단계로 넘어가는 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고수의 인증(認證)이 들려온 것이다. 내가 봤던 중에는 진소청 총사범밖에 쓸 수 없었던 무예의 고급경지가, 사공린에게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것은 사공린이 아까 나를 봐주면서 싸웠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진작에 내 무공이 청룡무관의 것이란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표정관리를 하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요."

"그런가요...?"

그녀는 청초한 꽃처럼 웃더니 말을 이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저는 태산노옹(泰山老翁)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답니다. 청룡무관주이신 삼절(三絶) 이광(李光)님의 스승과 태산노옹 어르신은 절친한 친구시죠. 그래서 태산에서 수학(修學)할 때 직접 삼절 이광님의 무공을 견식한 적이 있어요."

"......!!"

태산노옹!

그 이름은 앞으로 삼십여년 후에도, 그리고 현재도 정파의 최대기인(最大奇人)으로 남아있는 이름이었다. 정파에서 최고연배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천하십대고수(天下十代高手)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태산 일대의 모든 정파인들에게 숭앙받는 큰어르신이다.

' 그, 그래서였구나! 사공린은 태산노옹에게 가르침받은 희대의 절세기재(絶世奇材)!'

오빠인 사공패나 사공씨 무인들이 그녀에게 숙이고 들어가는 것도 당연하다. 아마도 여자치고는 굉장히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서 더 이상 가문 내에서 배울 게 없어지자, 추천을 통해서 정파의 최대기인인 태산노옹의 제자로 들어간 것이다.

사실상 사공린은 현 시점에서 중원에서 다섯 손가락에 손꼽히는 후기지수!

나는 그런 존재와 초수를 겨룬 것이었다. 물론 사공린이 많이 봐 주었겠지만 여하튼 뜬금없이 거대한 존재와 만나버려서 숨이 막혔다. 내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자 사공린이 부드럽게 내 뺨을 어루만졌다.

"소협에게 사정이 있는 건 알 것 같아요. 그리고 검을 나눠보니 사악한 심성이 아니란 것도 알 수 있었어요."

"... 고맙습니다."

나는 그녀가 다 알면서 일부러 넘어가 주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대충 사실을 다 꼬발랐다면 즉시 청룡무관주가 소환되고, 사실을 확인하기위해 대질심문이 시작되고, 일이 미친듯이 꼬여가기 시작했으리라. 하지만 그녀가 나를 배려해서 일부러 진실을 숨겨준 덕에 표사가 될 수 있었다.

사공린은 밝게 웃었다.

"앞으로 소협이 우리 표국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갈 수 있기를 바랄께요."

나는 그녀의 신형이 사라지는 것을 먼 발치에서 보았다.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녀를 얻을 수 있을까?

나이차이는 둘째치고, 나중에 그녀와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올까?

' ... 무리겠지.'

지금까지 힘을 얻는데 급급해서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나의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더 생각났다.

나는 못생겼다.

지금은 어린아이라서 아직 얼굴에 애살이 남아있어서 덜 못생겨보인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못생긴 편이다.

장성하더라도 평균이하의 외모가 되었기에, 내 짝으로는 평범한 여자도 감지덕지였다. 실제로 첫번째 삶에서 표사로 살 때 결혼을 하지 않았던 이유도 그것때문이다. 내 얼굴만 보면 식겁하는 여자들이 많아서 정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 무공을 쌓아서 강해져봤자 외모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건가."

꼭 사공린과 연애하거나 결혼을 해야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든 그녀를 생각하며 내 상황과 처지를 떠올리다보니, 인생에 대한 자괴감이 새삼 흘러넘쳤다. 제아무리 천하제일의 무공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선천적인 외모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 정신 차리자.'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진소청이 말해준 격언을 중얼거리면서.

"강해지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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