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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설삼(千年雪蔘)
황산까지 향하는 여정은 대략 15일정도 걸릴 듯 했다. 물론 말을 탔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냥 대책없이 걸어다닌다면 틀림없이 한 달 이상 걸리는 거리였다. 나는 황산에 가기에 앞서서 내가 얻은 은괴를 환전(換錢)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이 세상은 은괴를 떡하니 내놓으면 아이구 대단하십니다 하고 넙죽 업드릴 만큼 만만하지 않다. 함부로 은괴를 외부에 노출시키는 순간 어중이떠중이들이 달라붙기 시작할 것이고 이내 무림인들의 쟁탈전이 벌어질 것이다. 나는 최대한 이 은금고를 숨기면서도 은괴를 적절한 비자금으로 바꿔서 가져다닐 필요가 있었다.
' 은금고는 너무 눈에 띄어. 적당한 곳에 묻어놓았다가 나중에 찾으러 오는 게 낫겠다.'
가슴에 꼭 안길 정도의 크기였으므로 갖고다니기가 만만치 않았다. 나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던 중에 갑자기 생각이 났다.
' 아 맞다! 내가 전생에 죽었던 그 동굴을 찾아 볼까?'
기관장치 때문에 뜬금없이 사망할 수밖에 없었던 그 동굴!
어쩌면 그 동굴 안에 있던 비보(秘寶) 때문에 내가 과거로 역행(逆行)해 온 게 아닐까?
' 계획을 바꿔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자 잠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우선 근처의 마을에 들러서 쇠정(丁)과 밧줄 한 묶음, 그리고 구리방패를 구입했다. 나만큼 이 일대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없었기에 나는 험난한 숲을 헤매면서도 똑바로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황산은 나중에 가도 좋다.
우선은 동굴의 비밀을 밝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곧 밤이 어두워졌다.
나는 마른 나뭇가지를 꺾어서 불을 피우고 야숙할 준비를 했다. 3년 전과는 다르게 야숙할 침낭이나 장비도 충분했고, 내공으로 몸을 추위에서 보호하는게 가능했다. 바닥의 돌멩이나 자갈만 좀 치우면 드러누워서 한숨 잘 만 할 것이다.
타다닥...
불씨가 피어올랐다. 나는 온기를 쬐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과거로 되돌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기관장치에 당해서 목숨을 잃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그 상자 안으로 손을 뻗었다.
내 손에 잡혔던 것은 한 권의 책(冊)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마지막 기억이 흐릿해서 그게 어떤 책인지는 알 수 없었다.
' 설마 그 책을 집은 것 때문에 과거로 되돌아간 걸까?'
너무 불확실한 점이 많다. 나는 고개를 흔들면서 일단 잠을 청했다. 우선은 동굴을 찾아낸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서 산을 뒤지기 시작했다. 내가 전생에 검술수련을 한답시고 박혀있던 곳이 어디인지는 잘 알고 있다. 근처에 민가(民家)가 있으면서도 너무 험하지는 않은 산골짜기였다. 이윽고 나는 익숙한 개울물을 발견했고, 내가 초갓집을 지어서 지내던 평탄한 지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 이 근처에 있을 '동굴'을 찾으면 된다. 기억을 차분하게 더듬는다. 내가 산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빛을 받으며 천천히 산길을 따라 내려가고 있을 때였다.
"......!!"
나는 도중에 멈춰섰다. 까딱하면 발을 헛디뎌서 빠질 것처럼 교묘하게 감춰져있는 삼 장 높이의 절벽이 눈 앞에 있었다. 아마 큰 나뭇가지가 절벽 사이에 우거져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힐끔 아래를 내려다보니 역시 예전에 봤던 동굴이 보였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은금고를 잠시 내려놓았다. 절벽을 타야하기 때문에 정을 땅바닥에 박은 후 밧줄을 몸에 묶어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발 디딜 곳이 느껴지자 예전처럼 천천히 게걸음을 하면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은 역시 깜깜했다. 나는 몸에 묶은 밧줄을 풀고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자 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화악!
"으... 역시..."
나는 죽기 전에 봤던 그 광경이 고스란히 보이자 침을 꿀꺽 삼켰다. 기연(奇然)처럼 보이는 상자가 동굴의 빛에 감싸여 있었고, 안쪽 공간은 제법 넓었다.
' 여긴 기관장치가 있지. 화살이 날아오는 속도가 엄청 빨라...'
지금의 나라고 하더라도 그걸 쉽게 피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나는 긴장한 채 상자를 지켜보다가 품 속에서 단도(短刀)를 꺼내서 상자에 던졌다.
째앵!
단도는 정확하게 상자의 입 부분을 타격하고는 옆으로 날아갔다. 기관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걸로 봐서는 사람의 몸뚱이가 접근하면 발동하게끔 되어있는 구조일 듯 했다. 아마 바닥이나 벽면에 감지하는 장치가 있겠지만 내 능력으로 그걸 간파하는 건 불가능하다. 전문적인 도적이나 도굴꾼이 와야 한다.
"하지만 사람은 도구를 쓴다고."
나는 마을의 대장장이에게서 구입했던 구리방패를 슬쩍 들었다. 화살을 신법만으로 피해내는 것보다는, 구리방패로 급소를 재빨리 보호하면서 전진하는게 더욱 현실적이었다. 이런 기관장치 앞에서 고수의 자존심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타닷
까앙!
' 해냈다!'
구리방패의 앞면에 화살이 부딪혀서 튕겨져 나갔다. 화살의 속도는 역시 내 동체시력으로 아슬아슬하게 보일만큼 빨랐고, 게다가 지금 내 실력으로 피해내는 건 어림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화살이 발사될만한 예상위치에다가 구리방패를 갖다대서 막는 것밖에 없다.
사람이 쏘는 것보다 기관장치가 쏘는 화살이 몇 배는 빨랐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상자에 한 걸음 더 접근했다.
더 이상의 기관장치는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칼집으로 두들겨보다가 상자를 열었다.
끼이익...
"......"
나는 안에 들어있던 한 권의 책(冊)을 꺼내 들었다. 책을 꺼내드는 순간 과거로 돌아가 버리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기색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서 책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책의 제목은 천암비서(天暗秘書)이라고 되어 있었다.
' 뭐지...?'
비급이라기엔 뭔가 특이한 이름이었다. 마도문파의 마공처럼 패기넘치는 이름도 아니고, 정파명숙의 무공비급같은 느낌도 아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책이름안의 내용을 보려고 첫 장을 넘기자마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게 뭐야?"
괴어(怪語)!
생전 처음 보는, 말 그대로 이 세상의 언어가 아닌 듯한 괴상한 말이 벌레기듯이 잔뜩 쓰여져 있었다. 정성들여서 쓰여있는 걸 보면 틀림없이 체계를 가진 언어인 건 분명한데 - 문제는 정말로 이런 말은 본 적이 없다. 나는 불교의 범어나 서역의 글자도 표사생활을 하면서 본 적이 있으나 이 글자는 그런 글자와도 완전히 차원이 틀린 글자였다.
확실한 건 이 천암비서는 내 능력으로는 해석할 수도 읽을수도 없는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이 내 시간을 되돌려서 역행시켜준 건 틀림없는 사실으로 보였다.
이 수상쩍은 책을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미간에 힘을 주며 책을 한참동안 들여다 보았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앉은 채 고민하던 나는 천암비서를 주워서 내 품속에 넣었다.
"갖고다닐 수밖에 없겠군."
어떤 의미에서는 이 책이 은괴보다 훨씬 중요하다. 나는 다시 절벽을 왕복해서 은금고와 은괴를 동굴 안쪽에 넣어둔 후 밖으로 나왔다. 환전할 은괴 하나만 있으면 아마 여비는 걱정없을 것이다.
굉장한 모험이 기다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허탈하고 맥빠지게 끝난 동굴탐험이었다. 아직 제대로 의문이 해결된 것이 아니라 찝찝하긴 했지만, 목숨의 위협을 한 번밖에 감수하지 않았다. 책 한 권을 손에 넣었다는 느낌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천암비서에는 단순한 무공비급을 뛰어넘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 나중에 대학자(大學者)라도 찾아다녀야겠군. 세상의 현자(賢者)들 중에는 분명히 천암지서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야.'
동굴을 빠져나온 다음에는 황산으로 직행하듯이 여행을 개시했다.
촌장집을 습격해서 은괴를 털어버린지 며칠이 지났지만, 관아의 포쾌들이 나를 수상하게 보는 기색은 없었다. 단순히 지명수배서가 이 지역까지 오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 그것보다는 촌장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는 쪽이 합당하리라.
사실 그럴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실질적으로 행한 일은 마을의 불량배 대여섯명을 때려죽인 것밖에 없고 그나마도 목격자가 없어서 내가 했다는 걸 누구도 모른다.
게다가 촌장과의 거래가 바깥으로 알려질 경우 촌장이 떼부자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셈이다. 촌장에게 '은금괴가 더 있느냐'고 찾아올 무림의 낭인들이 끝도 없을 게 뻔하므로, 관아에 신고를 하면서 날 찾아다니지는 못할 것이다.
' 아직 안심할 수는 없지. 무림고수를 고용해서 날 추살(追殺)하려 들지도...'
다만 이것도 가능성일 뿐이다. 뛰어난 일류고수나 절정고수들은 자존심이 높아서 촌장따위가 돈을 주고 의뢰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대다수였다. 내가 손도 발도 쓰지 못할 정도의 고수를 고용하려면 내가 뺏았던 은금고만큼의 돈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즉, 지금 당장은 촌장의 후환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황산을 향해 걸어가는 게 너무 귀찮고 힘든 것 같아서 도중에 역참에서 말을 빌려서 타고 다녔다. 말은 확실히 빨라서 걷는 것보다 세 배는 빠르고 편하게 거리를 단축시켜 주었다. 며칠 후 황산에 도착해서 산밑마을에서 황산을 올려다보자 이제 고생이 다 끝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그닥
말 등 위에 앉아 있으니 절로 푸념이 나온다. 산봉우리를 둘러싼 안개구름을 보니 고생길이 느껴졌다.
' 후... 하지만 황산의 크기가 굉장하니 쉬운 일이 아니겠구나.'
황산.
대륙에서는 오악(五岳)보다도 높이 평가하고 있는 명산이며, '5악을 보고 나면 산을 보지 않고, 황산을 보고 나면 5악을 보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명소였다.
게다가 황산은 총 칠십이봉(七十二峰)으로 이루어져 있고, 하나하나가 오륙백 장을 쉽게 넘나드는 높은 산봉우리다. 비교적 사람의 손길이 많이 탄 곳이 황산봉우리이긴 하지만 아직 인간이 간 적 없는 험지(險地)도 매우 많으므로 조심해서 탐색해야 했다.
칠십이봉을 모두 찾아본다!
그것도 어디있을지 모를 천년설삼(千年雪蔘)을 찾기 위해!
어지간히도 미친짓이었지만 나는 할 수밖에 없었다. 천년설삼이라는 기연을 몰랐다면 상관없지만 나는 황산에 천년설삼이 존재한다는 걸 경험으로 확신(確信)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천년설삼을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세 개나 알고 있었다.
첫째.
천년설삼은 외곽봉우리인 이십사봉(二十四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최초발견자인 단목세가 소공자 단목소가 천년설삼을 발견한 장소는 내부의 사십팔경(四十八景)이라고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외곽봉우리와 달리 내부는 아직 사람의 손이 별로 타지 않는 비경(秘景)이 많은 장소다. 이것만으로도 탐색범위를 크게 줄일 수 있다.
둘째.
천년설삼은 황산파(黃山派) 주위의 봉우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천년설삼 쟁탈전을 듣기로 황산을 거점으로 하는 무림방파인 황산파는 한참후에야 쟁탈전에 뛰어든 걸로 알려졌다. 그 이유는 순전히 발견장소에서 황산파의 본거지가 꽤 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황산파의 위치 근처를 탐색범위에서 뺀다면 또다시 찾아볼 곳이 줄어든다.
셋째.
천년설삼은 '백색(白色)과 흑색(黑色)의 연꽃이 함께 피는 장소'에서 발견되었다. 그게 비유인지 뭔지는 모르겠으나 가장 확실한 정보였으므로 이것만 유의한다면 머지않아서 천년설삼을 찾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나는 훗하고 웃으며 앞으로의 탐색을 예상해 보았다.
' 은괴 하나를 근처 전장(錢場)에서 바꾸면 적어도 일백 냥은 되겠지... 탐색비나 식비로는 충분해. 넉넉잡아서 일 년이면 충분히 천년설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황산파의 거점 근처를 빼고나면 범위가 많이 좁혀질 것이다. 일주일에 한 봉우리씩 탐색한다는 마음으로 샅샅이 뒤지다보면 1~2년 안에 천년설삼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배가 출출해서 밥이나 한 끼 먹을 겸 근처의 객잔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싶을 때였다.
"여, 청년! 반가워!"
객잔 입구에 왠 흑색 옷을 치렁치렁하게 입은 사내가 내게 손을 들며 반가운 척 하고 있었다.
' 뭐야 저건?'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었기에 무시하려고 했으나, 그가 이어서 하는 말은 도저히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거 뭐냐... 이름이 백웅(白熊)이라고 했지? 청년 목에 상금이 오백 냥 정도 걸려있거든? 얌전히 목이나 좀 내밀어 주게."
채채채챙!
그 순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객잔의 1층과 2층에서 요란하게 칼 뽑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그 소리에서 무사(武士)들의 숫자가 최소한 스무 명에서 서른 명을 넘나든다는 것을 감지했다.
"......!!"
"표정이 왜 그래?"
흑색 옷을 입은 무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우리는 고문하는 취미가 없으니 단숨에 목만 베고 끝내 주마."
전혀 위로가 되는 소리가 아니다.
' 이... 이건 못 이겨!'
나는 객잔을 포위하고 있는 무사들의 수준을 한 눈에 확인하자 전신이 얼어붙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검을 잡은 자세나, 풍겨오는 살기나, 내공의 위력 어느 하나 삼류인 자가 없었다. 하나같이 제대로 훈련받은 정예급 무인들이었다. 이런 자들을 상대로는 내가 십대 일은 커녕 삼대 일이나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들이 내게 한 번에 덤벼든다면 속절없이 전신이 꼬챙이처럼 되어서 죽고 말 것이다.
엄청 강하다!
문제는 이런 정예무인들을 대거 동원할 수 있는 문파가 어째서 내 목을 노리냐는 것이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그리고 누가 시켜서 날 죽이려고 하는 것이오?"
"물론 알려드려야지. 나이어린 청년을 죽이는 게 꽤 마음이 불편하니까."
엇차, 하고 제대로 앉은 흑색옷의 무사가 턱을 괴며 말했다.
"우리는 흑야문(黑夜門) 살수조(殺手組)다. 혹시 우리를 알고 있나?"
"... 마도팔문(魔道八門)!!"
"오, 알고 있군."
나는 경악해서 비명을 내질렀다.
마도팔문!
그것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 맞먹을 정도의 성세를 구가하고있는 사파와 마도의 대문파 여덟 곳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 중에서 흑야문은 전문적으로 암살청부업을 하는 문파인데 문파원 개개인의 무공이 마도팔문 중에서도 가장 고절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특히 흑야문의 살수조는 정파에서도 두려워할 정도로 무서운 존재들이라서 사신(死神)이나 다름없었다.
설령 날고기는 절정고수라고 하더라도 흑야문 살수조에 찍히면 살아날 수 없다. 그런 소문이 강호 전역에 퍼졌고 기정사실화 될 정도로, 흑야문과 살수조는 무서운 존재였다.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어질어질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물었다.
"참고로 나는 살수조장(殺手組長)이야. 만나서 반갑네, 백웅."
흑색 옷의 사내는 빙긋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물론 전혀 반갑지 않은 자기소개였다.
"누가 시킨 거요?"
살수조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알고 있을텐데? 자네가 원한 진 사람이라고 해봐야 요근래 한 명밖에 없을 게 아닌가."
"촌장..."
"뭐 다 그런거라네. 의뢰인에게도 큰 출혈이 있었겠지만, 그는 자기 재산이 거덜나는 한이 있어도 자네에게 원한을 갚고싶은 모양이더군."
나는 그를 힐끔 보며 말했다.
"나를 살려주면 그 돈의 배를 주겠소. 진짜요."
그러자 살수조장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하...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우리는 못 받아들인다네. 돈을 더 준다고 해서 함부로 배신한다면 누가 우리를 신용해서 청부를 하겠나? 못다 쓴 돈은 저승 노잣돈으로 쓰도록 하게."
나는 살수조장이 명령을 내리려고 하자 다급해져서 다시금 외쳤다.
"그럼 다른 제안이 있소!"
"뭔가?"
"내가 당신을 상대로 일대일로 이긴다면 추적을 그만둬 주시오."
살수조장이 살수조 무인중에서 가장 강할 테니, 이런 제안은 쉽게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흑야문이 암살청부를 받는데도 무림공적으로 찍혀서 공격받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명목상으로는 무인임을 내세우기 때문에 타 문파의 비무신청이나 도전을 거절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고 들었다.
"호오... 패기 좋군!"
웅성
살수조 무인들은 내 말을 듣자 숫제 미친놈 보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살수조장은 재밌다는 듯 그냥 피식하고 웃을 뿐이었다.
"소원이라면 뭐... 어차피 자네 목은 내가 직접 베어갈 생각이었으니 수고를 덜겠군."
스르릉
살수조장이 등에 메고 있던 장검(長劍)을 뽑아서 천천히 내 맞은편에 섰다. 살수조 무인들이 객잔을 포위하고 둘러싸서 내가 도망 못치게 하려는 듯 했다. 나는 철검을 한 손에 든 채로 이를 악물고 투기를 북돋았다.
살아남아야 한다.
어떻게든 오늘까지 배웠던 무공을 발휘해서 살아남아야만 한다.
아직 천년설삼을 제대로 찾아보지도 못했는데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
"그럼 해 볼까."
살수조장이 상쾌하게 웃으며 검을 날려왔다.
슈슈슈슉!
슈콱!
나는 십 초만에 검이 부러지고 명치에 격공장(隔空掌)을 얻어맞은 직후, 하늘을 훨훨 날았다. 왜 이렇게까지 수준차이가 나는지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 어...?'
이 느낌은 어디선가 느껴본 적이 있는데...
슈슈슝
"잘 가게."
나는 다음 순간 검기(劍氣)의 푸른 빛을 보자 그제서야 납득할 수 있었다. 살수조장은 진소청 사범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절정고수였던 것이다.
곧 내 목이 날아갔다.
숨이 끊어질 듯한 고통과 함께 기억이 넘쳐흐른다.
' 아 씨발....'
이것이 나의 두 번째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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