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9화 (9/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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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설삼(千年雪蔘)

내가 살던 마을의 이름은 소을(小乙) 마을이었다. 답지않게 좋은 이름이지만, 내게는 악몽같은 과거사밖에 남지 않은 곳이다. 그도 그럴것이 폐쇄적인 농촌의 단점이 모두 있는데다가 따돌림도 빈번했고 절대권력자인 촌장의 뜻에 따라 모든 일이 좌지우지되는 장소였다.

불행중 다행인지 촌장이란 놈의 수완은 꽤 좋은 편이라서, 근처에 있는 매화표국(梅花票局)과 연계해서 마을에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촌장이 예쁜 여염집 아낙을 강제로 첩으로 앉히거나 마을사람들을 개인적인 용역에 동원하는 횡포를 부려도 별탈없이 돌아가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폭군(暴君)이 사는 마을.

그게 내 고향에 대한 감상이었다.

나도 사실 과거에 매화표국에 들어갈때 반쯤은 촌장이 용인해줘서 벗어날 수 있었던 셈이다. 촌장의 영향력은 매화표국에도 강하게 작용했기에, 그 때 일이 잘못되었다면 나는 평생 하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촌장의 실낱같은 감정변화 하나때문에 내 인생이 좌지우지될 수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섬뜩하기까지 하다.

저벅

나는 소을마을에 접어들자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 그냥 있는대로 깽판 놔버리고 떠날까?'

원한다면 여기서 살겁(殺劫)을 벌이고 떠나도 무방하다. 대충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심야를 노려서 촌장네 가족만 도살(屠殺)하고 떠나면 들킬 염려가 거의 없었다. 내 과거의 한을 풀고자 하면 지금보다 좋은 기회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기 전부터 마음먹은 게 있었으므로 고개를 흔들며 촌장네 집으로 걸어갔다. 약간 긴장되면서도 어려운 발걸음이었다.

농촌의 밭길을 걷고 있자 몇 명의 청년들이 걸어와서 아는 척을 했다.

"여어~ 소똥이 아니야 이거!"

"와 진짜 오랜만이다? 크크."

"....."

대여섯 명이 뭉쳐다니는데다 밥을 잘 먹어서 투실투실하게 살찐 체형. 이 마을의 일꾼이라고 할 수 있는 청년들. 이 놈들은 3년 전, 아니 그 전부터 촌장집에서 하인생활을 하고 있던 나를 괴롭히던 놈들이다. 나는 이 놈들에게 심심하면 맞고 또 맞았으며 심부름을 하기 일쑤였다. 나이가 나보다 몇 살 많은데다가 떼로 몰려다녔기에 내가 반항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네. 너희도 잘 지냈냐?"

그러자 우두머리격인 놈이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으나, 곧 음충맞은 미소를 흘렸다.

"너희이~? 우리 소똥이가 3년동안 처맞지를 않으니까 겁을 상실했나보다~?"

"하하하하!"

"그럼 좀 더 패서 말을 듣게 해야지!"

나는 그저 멍한 눈으로 놈들을 바라보았다.

괴롭힘 당했다는 정신적 공포증따위는 없다. 도리어 나는 매일같이 이놈들을 죽이고 싶어서 칼을 갈았으므로 지금 손이 근질근질했다. 내가 살기를 억누르고 있을 뿐 실제로는 당장 칼을 휘둘러서 목을 베어도 시원치 않다.

이 놈들은 칼든 도적떼 5명보다 약하다. 칼든 도적떼 10명이라고 해도 한 식경만에 도살해버릴 수 있는 내게는 벌레만도 못한 놈들이다.

도대체 뭘 믿고 이렇게 까부는 걸까?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내가 마을을 왜 떠났지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란 걸 눈치챘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관에 입관(入館)하기 위해 떠난 내게 이렇게 깝칠 수는 없는 것이다. 무림인이라면 겁이 나서라도 일부러 피하는 게 정상이다. 촌장은 아무래도 내가 마을을 왜 떠났는지를 숨긴 모양이었다.

일의 얼개를 대충 파악한 나는 피식 웃었다. 처음에 생각했던 걸 더욱 거침없이 행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내가 웃는 모습이 고까웠는지 맨 앞에 서 있던 청년 한 명이 주먹을 날려 왔다.

뻐억!

"크에엑!"

타격음이 울렸으나, 그것은 주먹을 달린 놈의 팔뼈가 이상한 방향으로 꺾인 소리였다. 동시에 명치에 발차기를 두 방 맞은 놈은 구토를 하더니 벌벌 떨며 앞으로 쓰러졌다. 청년들은 갑작스러운 일에 어찌할 바를 몰라서 허둥댔다.

"뭐... 뭐?"

"이게 무슨..."

꽈앙!

가볍게 두 명의 머리를 붙잡아서 서로 박치기를 시켰다. 그 두 놈은 단숨에 눈이 까뒤집혀서 기절했다. 상황이 이해 안되는지 나머지 놈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서자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내 움직임이 보이냐? 뭘 하는지도 모르겠지?"

아마 대응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삼 년 동안 놀고먹은 게 아니다. 할 게 무공수련밖에 없었고, 강해져야만 했기에 독기를 품고 수련했다. 재능이 평범해서 확실히 일류고수급으로 올라서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인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실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 이... 이새끼..."

"야 너희 세 명. 내 이름이 뭔지 말해 봐라. 그러면 봐 준다."

내 요구를 듣자 놈들은 현실을 믿을 수 없는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도저히 상대가 안 된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으아아아!"

"튀려고 하면 더 맞을건데."

나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놈의 멱살을 순식간에 잡아서 바닥에 패대기쳤다.

퍼억

바닥에 얼굴부터 떨어진 놈은 코뼈가 부러지고 이빨 하나가 튕겨서 날았다. 순식간에 날듯이 움직인 것이었기에 아마 격차를 깨달았으리라.

"말해 봐."

"......"

과거의 잔인한 농촌 폭력배들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리고는 서로 눈치를 보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꿀먹은 벙어리였다. 나는 녀석들이 내 본명을 진짜 모른다는 걸 깨닫자 정말 기가막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이놈들에게 괴롭힘당한 기억을 50년 가까이 간직하고 있었는데, 이 놈들은 여태 내 이름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이 놈들에게 있어서 '소똥이'는 그냥 적당히 괴롭히면 좋을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속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걸 느끼고는 사납게 웃었다.

"하하! 정말 잘됐군. 잘됐어!"

"뭐... 뭐가 잘됐단 말이냐?"

"제물이 있다면 감사하게 잘 먹어야지! 안 그러냐!"

나는 히쭉 웃었다.

"그럼 뒈져라 씨발새끼들아!"

우두둑

퍼벅!

"크아악!"

잠시 후 놈들의 목이 꺾이고 가슴팍이 내려앉아서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게 되었다.

투콱

"끄에엑!"

"아악!"

나는 기절해 있던 놈들의 머리통을 축국(蹴鞠)하듯이 뻥뻥 차서 죽여 버렸다. 인간 대여섯 명의 목숨을 거두는 데는 숨 몇 번 쉴 정도의 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으하하핫!!"

반 세기를 묵혀놓은 복수를 하고 나자 약간의 허탈감과, 극렬한 쾌감이 솟아 올랐다. 기분이 좋아서 손이 부르르 떨렸다.

해냈다!

개새끼들을 다 죽여 버렸다!

' 복수가 허무하다고? 개뿔이! 해보지도 않은 놈들의 헛소리일 뿐이야!'

나는 송곳니를 강하게 악물었다.

전신에서 피가 끓어오른다. 과거 나를 핍박하고 괴롭히던 놈들을 전부 찢어죽이고 내장을 땅바닥에 흩뿌려버리고 싶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구석에 끌려가서 한 시진 넘게 몽둥이찜질을 당했을 때의 기분, 바지를 벗겨져서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개처럼 얻어맞던 기억이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생생하게 솟아올랐다.

복수는 반드시 해야 한다!

나는 그 사실을 앞으로 삶의 신념으로 삼기로 맹세했다.

그리고 약간 흥분을 가라앉히며 차분히 촌장의 집으로 걸어갔다.

약 오 리(五里) 정도 산길을 걸었을까, 조그마한 마을에 어울리지 않게 큰 촌장의 사택(私宅)이 눈에 띄었다. 나는 인기척이 거의 안 느껴지는 걸 알아챘고, 대부분의 인간이 외출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끼익

현관문을 열고 걸어들어가자 촌장의 첩인 서 씨(徐氏) 아낙네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물을 긷고 있다가 나를 발견하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녀가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빠르게 접근해서 아혈(亞穴)을 찍었다.

"..... 읍... 읍..."

목소리가 안 나오자 그녀는 버둥거리며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팔을 잡아서 부드럽게 제압하며 문지방 앞에 앉혔다. 그리고는 냉막하게 말했다.

"당신도 촌장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으니 해를 가하기는 싫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마라. 그러지 않는다면 당신의 아들 목숨은 보장할 수 없어."

그녀에게는 세 살바기 아들이 있었다. 촌장의 첩으로 들어와서 낳은 아들이며, 본처와 금만재에게 경원시당하는 아이였다.

"......!!"

"이해했으면 고개를 끄덕여. 아혈을 풀어줄 테니까 소리지르지 마."

서 씨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아혈을 풀었다. 그녀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두려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백웅아... 이 무슨 무서운 짓이냐? 무관에 들어갔다는 건 들었는데 기별도 없이 갑자기 침입하는 건 안될 일이야."

나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당신은 나와 원한이 없어. 내가 이 집의 외양간에서 썩을 때 딱히 잘해준 건 없었지만 욕하고 괴롭히진 않았지. 가만히 있으면 당신과 아들이 다칠 일은 없을테니 안심해도 좋아."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니? 설마 촌장님을..."

나는 서 씨의 목소리가 떨리자 차갑게 웃었다.

"걱정 마. 그 놈을 죽이진 않을테니까. 해야할 일이 있어서 이 마을에 돌아온 것 뿐이야. 일을 귀찮게 만들지 말고 얌전히 있어."

"......"

"촌장은 어디 있지?"

"... 지금 소작을 걷으러 다른 마을에 갔어."

그녀는 상황을 이해한 듯 했다. 자신이 나설수록 손해를 입는 상황이란 걸 알았으므로 재빨리 발을 빼기로 한 것이다.

"언제쯤 오겠나."

"한 시진쯤 후에... 해가 질때쯤 올 거야."

딱 적당한 시간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본처와 금만재는 어딨지?"

"안채에... 그리고 금만재는 학숙(學宿)에서 먹고자는 생활을 하고 있어."

"먹고자기는 개뿔... 요맘때쯤이면 여자를 끼고 홍루(紅樓)에서 떡이나 치고 있겠군."

확실하다. 내가 하인처럼 지내던 시절, 금만재가 심부름을 시켜서 먹을 것과 노잣돈을 갖고 홍루로 배달간 적이 있었다. 그 때 금만재는 여자와 함께 뒹굴면서 질펀하고 역겨운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

내가 차갑게 비웃었지만 서 씨의 표정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아마 그녀도 금만재가 타락해서 공부 안하고 주색잡기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리라. 나는 그녀를 보자 약간 씁쓸함을 느꼈다.

' 서 씨는 가난한 여염집 규수였는데 돈에 팔리듯이 촌장의 첩으로 들어왔지. 용모와 재색이 아주 뛰어나고 순결한 여자였다고 했는데, 세상에 찌들면 역시 달라지게 마련이군.'

지금도 서 씨의 외모는 30대 초중반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리고 아름다웠다. 배불뚝이에 털이 수북히 난 촌장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다. 나는 더 이상 뭐라할 생각이 들지 않았으므로 말했다.

"나는 이제 당신을 점혈(點穴)하고 내 일을 볼 거다. 움직일 수도 없겠지만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도 나올 생각을 하지 마. 그럼 피해갈 일은 없을 테니."

투둑

서 씨의 혈도를 찍어서 움직일 수 없게 만든 뒤 방에 넣어두었다. 그녀는 겁먹은 표정이었으나 내 말을 확실히 들을 생각인 듯 했다.

나는 안채로 걸어가서 촌장의 본부인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느긋하게 앉아서 실뜨기를 하고 있었는데 내 모습을 보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소똥이 이 놈! 감히 이 집에 함부로 들어오다니!"

"조용히 해. 뒈지기 싫으면."

"뭐..."

퍼벅

"......"

내가 품 속에 있던 단도(短刀)를 날려서 그녀의 얼굴 옆에 있던 기둥에 꽂아버리자 촌장의 본처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명백히 살기를 머금고 왔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그녀는 두려운 눈으로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으나, 소리를 지를 경우 살해당한다는 사실을 직감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벌벌 떨며 말했다.

"워... 원하는 게 뭐냐? 돈이라면 얼마든지 주겠..."

"닥쳐. 너같은 암퇘지년과 이야기하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나는 사납게 으르렁거린 후 말했다.

"개짓거리 하면 오늘이 너희 일가 마지막 날이야."

"......"

나는 본처의 혈도도 짚어서 안에 처박아 두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돌아다니던 하인들도 재빨리 제압해서 방 안에 쑤셔넣었다. 어차피 내 내공으로 강한 점혈은 힘드니 대략 한두 시진이면 다들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차분하게 안방에 앉아서 벽에 등을 기댔다.

잠시 후.

기다리던 인물은 정해진 때에 만날 수가 있었다.

촌장은 아무 인기척도 없는 자택을 의아한 듯 둘러보더니 걸어서 안방 쪽으로 왔다. 그리고 안방 문을 여는 순간, 내가 창(槍)을 빗겨든 채로 벽을 기대서 앉아있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

"여어, 촌장님. 오랜만입니다."

촌장은 잠시 기절할 듯이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침착하게 그 자리에 섰다.

그리고는 말했다.

"역시 네가 돌아왔구나..."

"뭐 돌아왔죠. 예상하고 있던 거 아닙니까?"

촌장은 입을 꾹 다문 채 불안한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나는 촌장을 노려보다가 말했다.

"일단 거기 앉으시죠. 할 얘기도 있으니."

"그래..."

촌장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이 개같은 가문의 최고 지휘자, 소을마을의 독재자답게 침착한 모습이었다. 나는 촌장을 느긋하게 지켜보다가 말을 꺼냈다.

"당신은 내가 이 마을과 이 가문에 원한을 품은 걸 알면서도 바깥세상으로 보내줬죠.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다면 지금 해 보십쇼."

"... 그래, 맞다. 네가 이렇게 나올 줄은 3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촌장이 잠시 꺼지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말로 청룡무관에서 일류고수가 된 모양이구나. 아랫마을에서 난리가 났는데 그것도 네 짓이냐?"

"글쎄? 나는 처음 듣는 일인데."

"......"

나는 빈정거리듯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 집안에 발을 들이는 순간, 씨암탉 한마리 안 남기고 모조리 죽이고 모가지를 베고 싶었다. 특히 촌장님은 특별히 사지를 찢어죽이고 싶었어."

"으으..."

"...하지만 꾹 눌러참고 촌장님과 일단 얘기를 해 보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촌장님이 3년 전부터 오늘을 예상했을 텐데도 나를 세상에 풀어준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죠."

그렇다.

내가 복수를 하러 찾아올 걸 알면서도 세상에 보내준 게 너무 궁금했다.

촌장은 바보가 아니라서, 내가 세상에 나간다면 언제고 오늘같은 일이 벌어질 거란 걸 알았으리라. 그런데도 노잣돈까지 쥐여주며 청룡무관에 보낸 게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다.

"그랬군... 우리 집에서 살겁(殺劫)을 벌이지 않아서 고맙다."

"됐고 말이나 해 보시오.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나는 너를 믿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촌장을 바라보자, 그는 긴장하면서도 떨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일가가 네게 못할 짓을 하고 괴롭힌 건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네 부모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고, 때가 되면 독립시켜주려 했었다. 하인처럼 지내게 한 것은 네가 홀로 독립할 때 자립하기 쉽게끔 해주려는 거였다."

나는 어금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창을 쥐고 있는 팔뚝에 혈관이 꿈틀거린다.

"흐흐... 꿈보다 해몽이 좋군. 사람을 외양간 옆에서 소똥치우는 하인으로 살게 하곤 뭐가 어째?"

"......"

"청룡무관에도 적당히 쫓아보내려고 한 주제에 참 잘도 둘러대는군."

"그... 그건..."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은 처음부터 내가 청룡무관에 붙을거라고 생각지도 않았어. 내가 어디서 객사하면 그걸로 좋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렇게 호되게 얻어맞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겠지."

촌장이 우물쭈물하다 말하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나는 이기적인 놈이라서 너에게 그 이상 대우해줄 생각이 들지 않았다."

"흠..."

"제발 살려다오. 제발..."

촌장은 아예 도박을 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속마음을 과감없이 털어놓았다. 예상했던 소리가 들리자 속에서 아주 화가 머리끝까지 뻗쳤다. 촌장이 내게 절을 하고 비는 순간 창으로 대가리를 깨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 참는다. 여기서 촌장을 죽여버리면 똑같은 놈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살기를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

"크크... 촌장 당신이 거둬주지 않았으면 나는 고아(孤兒)로 유랑하다가 어디서 굶어죽거나 거지새끼가 되었겠지. 그래도 먹고살게는 해 줬고, 청룡무관에도 보내주긴 했으니 그것도 당신 은혜로 쳐 주지."

촌장은 불안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입은 물질적 정신적 피해는 보상받아야겠다."

"내가 뭘 해주면 되겠나?"

"은자 오백 냥 내놔."

"헉......!!"

촌장이 눈을 부릅떴다.

은자 오백 냥!

그 정도 돈이라면 촌장의 전재산 중 절반 이상이 거덜날만한 돈이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있는 촌장이라지만 결국은 일개 시골마을 촌장이므로 지닌 재산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는 애걸하면서 말했다.

"제... 제발... 지금 내 재산이 사라지면 소을 마을이 통째로 굶어죽는다. 매화표국에 조금씩 상납하면서 마을의 일거리를 늘이고 있는데 그것만큼은..."

"지랄하는군. 나는 당신 비자금을 이야기한 거야."

촌장은 벼락맞은 표정을 지었다.

"뭐?"

"이 집의 어딘가에 은(銀)으로 만든 금고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헉... 그... 그런 건 없다."

쐐액!

내 창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더니 촌장의 코 앞에서 멈췄다. 한 치만 더 움직였다면 촌장의 미간이 쩍하고 갈라지면서 뇌가 보일만큼 베어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뇌령팔식(雷靈八式)은 내 적성에는 별로 맞지 않았으나 일류 창법이었으므로 내 실력도 나름대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정말 죽고 싶나?"

"으으...!! 대체 어떻게 안 거냐!"

"글쎄."

나는 피식 웃었다.

' 네 아들놈 금만재한테서 들은 얘기지만.'

과거 내가 이 집에서 하인처럼 일하던 시절 - 술에 취해서 주정을 부리던 금만재가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인 촌장에게는 재산을 축적해서 모은 은금고가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돈은 은자 오백 냥이 훨씬 넘는다는 소리를.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은금고를 가지고 튀려는 생각을 했었으나 그 장소는 촌장만이 알고 있었으므로 결국 빈털터리로 떠난 적이 있었다.

잠시 후 촌장은 나를 등 뒤에 둔 채로 어물쩡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방에서 벽을 조심스럽게 눌렀는데, 놀랍게도 쿠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벽의 문이 열렸다.

' 자기 방에 비밀리에 기관장치를 설치해둔 거였군. 정말 돈도 많은 인간이야.'

딱 사람 한 명이 들어갈만한 크기의 문이었고 그 통로 안으로 촌장이 들어가자, 잠시 후 촌장은 가슴 한가득 은색 금고를 안고 걸어나왔다.

"열어."

끼익

나는 은색 금고가 열리자 눈이 약간 부셔서 손을 올렸다. 촌장의 은색 금고 안에는 순은(純銀)으로 만들어진 은괴(銀塊)가 한가득 들어있었던 것이다! 은자를 가득 채워둔 게 아니라 은괴를 보존하고 있었다. 나는 이 은괴의 가치가 오백 냥을 훨씬 넘는다는 것을 직감했다.

촌장이 은금고를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 이제 됐지?"

"그래. 이제 물러가 주지. 두 번 다시 이 마을에 얼씬도 않겠어."

"고맙다..."

"물론 오늘 일을 관아에 신고하거나 하면, 그날 당신 일가는 하나도 살아남지 못할 거다."

"알고 있다."

나는 등을 돌리고 촌장에서 멀어지다가 말했다.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고. 당신 아들놈한테 이 돈이 건네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테니까."

"으으... 적당히 해 다오. 제발..."

"금만재가 요즘 학숙에서 공부는 안 하고 홍루에서 주색잡기에 빠져있다는 걸 모르는가? 어차피 그 놈은 당신 재산을 평생 축낼 놈이야."

"......"

나는 금만재의 실체를 말하면서 촌장을 비웃었지만 촌장은 뜻밖에도 그냥 우울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서 촌장이 금만재의 타락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어? 이게 무슨... 촌장은 자기 아들놈이 열심히 공부한다고 착각하던 게 아닌가?'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했다.

"촌장 당신 그걸 알고 있었던 건가."

촌장이 바닥에서 긁어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모를 수가 있겠느냐. 매화표국주와 내가 절친한 친구인데다 옆마을에 있는 개방(?幇)과도 알고 지낸다. 아들놈이 못났다는 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안다."

나는 황당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째서 학숙에 보내고 타지에서 비싼 글공부를 시키며 허송세월 시키는 거지? 돈이 아깝지도 않은가? 그 놈이 과거(科擧)에 붙는 게 가능 할 것 같아?"

절대 무리다.

나는 금만재의 심부름을 하던 시절, 그 놈이 책 펴놓고 공부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진사(進士)는 커녕 수재(秀材)도 힘들다.

그러자 촌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눈은 약간 충혈되어 있었다.

"넌 모른다... 남들이 뭐라하건, 부모만큼은 자기 자식을 믿어주면서 끝까지 잘해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녀석이 지금은 한눈을 팔고 있어도 언젠가는 정신을 차릴 것이다. 난 내 자식을 믿는다."

"......"

모르겠다.

너무 어렸을 적에 부모님이 돌아가신데다가, 나도 전생에서 결혼을 하거나 자식을 만들어본 적이 없었다. 촌장이 말하는 부모의 마음이란 건 이해할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다만 마음속에서 뭔가 뜨끔하는 게 일어나고 있었다.

휘익

나는 금고 안에 들어 있던 열 개의 은괴 중에서 한 개를 꺼내서 촌장에게 던졌다. 촌장이 허둥대며 받자 나는 끌끌 혀를 찼다.

"흥... 조금은 남겨 주지. 앞으로는 착하게 사쇼."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저 인간이 착하게 살지는 않겠지만, 그냥 한 번 해보는 소리다.

' 이젠 어디로 가지?'

바로 청룡무관으로 돌아가는 건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 촌장이 신고할 확률이 낮은데다가 얻을 건 다 얻었지만 어쨌든 껄끄러운 짓을 저지르긴 했다.

' 관아에 신고하고 무림고수를 고용할 수도 있겠지만, 그 때는 정말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일가를 몰살(歿殺)시켜 버리겠다.'

약간 생각없이 행동했다는 생각도 들지만, 지나간 일은 더 생각하지 말자.

앞으로 잘 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세상을 떠돌면서 하고싶은 일을 하고나서 돌아가고 싶었다.

그 때 머릿속에 생각이 나는 게 있었다.

"아 그래 천년설삼!"

지금까지 수련을 하며 살다보니 까먹고 있었던 일이다.

촌장에게서 은괴도 받아서 챙겼고, 무공도 충분히 쌓았으니 이제 황산(黃山)에서 천년설삼을 찾아서 먹으면 된다!

자, 이제 황산에서 영약을 찾아 볼까?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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