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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설삼(千年雪蔘)
"콜록."
정신을 차리고보니 나는 부스럭거리며 찬바람을 맞고 있었다. 짚으로 바람을 가려두었지만 새벽바람 때문에 기침이 조금씩 새어나왔다.
"......?!"
이게 무슨 일이지?!
나는 의식이 끊긴 후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자 당황했다. 황급히 가슴을 내려다보았지만 상처도 모두 사라져있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입고 있는 옷이 전혀 달랐고 몸의 크기가 전혀 다르다.
작아졌다.
나는 상체를 일으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짚으로 막아둔 사이로 차가운 기류가 흐르고, 소똥냄새, 그리고 을씨년스러운 나무의 그림자가 보였다.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지만 나는 이 광경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내가 지금 꿈이라도 꾸고 있는건가?'
나는 알고 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다.
그건 분명히 13세 무렵, 내가 막 부모를 역병으로 잃고 촌장집에 덤으로 맡겨졌을때의 일이다. 촌장집에 얹혀살던 나는 하인처럼 살면서 외양간 근처의 빈 헛간에서 잠을 잤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바람을 막은 짚더미를 치웠다.
보인다.
외양간이다.
"으아아아아아...!!"
나는 그만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하나 뿐이다.
과거로 회귀(回歸)했다!
그것도 무려 40여년 전의 아이 시절로!
'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걸까?'
나는 공황상태에서 어리둥절했지만 침착하기로 했다.
일단 몸을 움직여보기로 했다. 팔과 다리는 잘 움직여지고, 웅크려자서 느껴지는 뻐근한 통증과 새벽의 추위가 현실감각을 일깨워주었다. 이걸 환술(幻術)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현실감이 뛰어났다.
덤으로 살짝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소주천(小周天)을 돌려 보았다.
그러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음...!! 내공이 그대로군."
놀랍게도 아이의 몸으로 되돌아왔음에도 내가 50여년간 쌓았던 삼재심법의 내공은 그대로였다. 물론 기초심법의 얕은 효과가 어디 가는게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앞으로의 내 삶에 큰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공이 쌓여있고 아니고는 천지차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콜록. 콜록! 으... 빌어먹을 새끼들."
나는 기침을 하면서 욕지기를 내뱉었다.
욕하는 대상은 당연히 촌장과 그 가족놈 새끼들이다.
말이야 오갈데없는 고아인 나를 주워서 키워주었지만, 나는 촌장집에 맡겨지고 3년 후 독립할 때까지 완전히 하인취급을 받았다. 동네 아이들의 괴롭힘은 끊이지 않았고 어디 가서 처맞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심지어 촌장 아들놈은 내가 괴로워하는 걸 보고 낄낄대기만 할 뿐 전혀 도와줄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 이 상황도 그 중 하나다. 내가 주로 하는 일은 소 3마리를 돌보고 소똥을 치우는 것이었으며, 소먹이도 내가 줘야 했다. 내가 먹고 자는 곳은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니라 헛간을 개조해서 만든 소똥냄새 나는 짚더미 위였다. 이런 곳에서 살면서 미치지 않은 내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 하... 빌어먹을. 살아난 건 좋지만, 과거로 온 것도 좋지만 하필 이 때라니...'
인생의 지옥에 다시 발을 딛었다.
나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내 인생이 그나마 정상적인 궤도에 올라선 것은 15세에 처음으로 표국 잡일꾼으로 들어간 후, 18세에 제대로 무공을 배우며 최하급표사가 되었을 때 부터다. 지금부터 최소한 5년 이상 지옥같은 인생을 맛봐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짜증나고 두려워서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잠시동안 나는 앉아서 내 인생을 회상해 보았다.
그러고보니 정말 좋은 일이라곤 없는 삶이었다. 열여덟 즈음에 최하급표사가 된 다음부터는 그럭저럭 먹고살 만 했지만, 표사 일이란 게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산적과 싸우면서 죽을뻔한 일도 있었고 왠 강호의 귀공자가 모욕을 주며 뺨대기를 갈긴 적도 있었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몸쓰는 일이기 때문에 언제나 고단한 몸을 한 잔 술로 달래며 곯아떨어지기 일쑤인 삶이었던 것이다.
내가 지금의 상태에 화내는 이유? 당연히 그 고단한 하급표사의 삶보다 지금의 소년시절이 더 개같았기 때문이다! 한 번 더 개같이 살라고 하니 죽기보다 싫다. 차라리 몸이 힘들어도 내 돈을 내가 쓸 자유가 있었던 표사 생활이 훨씬 나았다.
' 이제 어떻게 하지?'
나는 한참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하루만이라도 좋다. 일단 이게 진짜 과거가 맞는지 확인을 해 봐야겠다."
다음 날, 약 세 시진이 지나서 나는 잠에서 깨어서 일단 외양간을 살펴보았다. 소들은 찬바람을 별로 맞지 않았고 건강이 나쁜 놈도 없었다. 몇십년만에 하는 외양간 일이라 처음에는 어설펐지만 잠시 후 당연한 듯이 일 내용이 기억났다.
나는 개 중 덩치가 큰 황소의 콧잔등을 쓸어 주었다.
"니 이름이 황금이였지? 기억난다."
생각해보면 나는 외양간에서 먹고살 때 소를 벗삼아서 지냈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이 덩치 큰 황소에게 황금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특히 잘 돌봐주었다. 소들의 천성이 착하고 순했다.
황금이는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듯 눈을 꿈뻑거리면서 내 손에 머리를 비볐다.
그 간단한 행동에 나는 약간 뭉클해지는 걸 느꼈다.
' 인간보다 낫구나.'
나는 정말로 50여년을 살아오면서 인간이 어떤 동물인지 질릴 정도로 알게 되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삶을 살면서 약자에게 강하고 무자비한 놈들을 숱하게 보았다. 이익이 걸리면 금새 친구고 뭐고 뒤통수치는 일도 예사였다. 차라리 말 못하는 동물이 인간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 때였다.
' 날아오는군!'
나는 재빨리 반보를 휘어돌며 피했다.
촤악!
"......"
"어어...?"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나를 곯려줄 작정으로 물을 뿌렸는데 내가 손쉽게 피해버렸기 때문에 느낀 당혹감이리라. 하지만 아무리 삼재심법이 약하다고 해도 오십 년이나 내공을 쌓으면 보통사람보다는 훨씬 발달한 육감과 반사신경을 지니게 된다. 아이의 몸이라지만 물바가지 세례 피하는 정도는 일도 아니다.
나는 내게 물을 뿌리려 했던 장본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보자마자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고, 분노가 전신의 혈맥을 장악한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말아쥐면서 간신히 분노를 참으려고 이를 으득 악물었다.
"뭔 일이세요 도련님?"
그런 분노와 달리 내 입에서는 평정심을 유지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도련님'은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헛기침하며 대답했다.
"험! 허험! 아침에 외양간 앞에 습기를 깔아줄려다가 실수했다."
"네."
개지랄같은 변명을 들으면서도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장 들고 일어나서 '도련님'을 패버리고 싶었지만 나는 참기로 했다. 왜냐하면 나는 숱한 조직생활을 겪었기 때문에, 당장 마음속에서 욱하고 밀려오는 걸 참아내는 방법을 수십 년동안 익혔기 때문이다. 지금 과거로 되돌아온 상황을 침착하고 판단하고 정리하기 위해서는 분노에 도발당해서는 안 된다.
도련님, 얼굴이 흉한 곰보에 살집이 퉁퉁한 뚱보꼬마.
저 놈은 바로 [촌장의 아들]이다.
이름은 금만재(金萬材). 이름만 쓸데없이 거창한 놈이지만 이름과는 달리 아무런 재능을 지니지 못한, 딱 나같은 놈이었다. 나이도 내 또래였다. 그런 주제에 과시욕과 허세이 거창해서 나를 쥐잡듯이 괴롭혔고, 이후 성인이 되었을 때는 주색잡기와 여자를 탐하면서 촌장이 모아놓은 재산을 탕진하며 살았다고 들은 바 있었다.
"으음~"
금만재는 트집을 잡으려는 듯 외양간 여기저기를 팔자걸음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딱히 트집잡을 게 없어보이자 나에게 시비를 걸듯 말했다.
"너, 오늘 내가 학숙(學塾)에 다녀올 때까지 외양간 안에 똥을 다 치워라."
"네?"
"하라면 해~ 안 할 생각이냐?"
뜬금없는 갑질이었다.
나는 새삼 갑작스러운 분노가 뇌까지 차올라서 할 말을 잊어버렸다.
' 이 개새끼가?'
당장이라도 금만재 이새끼를 죽도록 패버린 다음, 주방에 들러서 식칼 한자루 들고가서 촌장가족들을 도륙내고싶다. 실제로 충분한 가능한 일이었기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과거 이정도 갑질은 일상사였다는 걸 떠올린 후 가슴을 진정시키며 침착하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다 해놓겠습니다."
"......?"
내 말투가 묘하게 차분하자 위화감을 느낀 듯 금만재가 멈칫거렸다. 하지만 역시 애라서 그런지 더 이상의 생각은 하지 않고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금만재의 모습이 근처에서 사라지자 바닥에 침을 뱉었다.
퉷!
"시벌놈... 두고보자."
나중에 힘을 얻게 된다면 예전 3년동안의 굴욕감에 더해서 복수해 줄 생각이다. 촌장가족 전체를 도륙내 버리던가 금만재 놈을 팔다리 병신으로 만든다던가 하는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은 때가 아니다.
나는 어제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그리고 '당분간' 이 촌장집에서의 생활을 유지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냥 다짜고짜 세상으로 가출해 버리면 마음이야 편하겠지만 앞으로 먹고 살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먹을 것과 잘 것을 주는 생활을 유지하는 편이 좋았다.
대신, 나는 과거처럼 표국으로 무작정 들어가는 선택을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 또 표사로 살 수는 없어.'
어차피 표국에 들어가서 표사가 되어봤자 육합검법과 삼재심법밖에 안 가르쳐준다.
그렇게 살 바에야 조금이라도 고급무공을 배워서 잘 나갈 방법을 찾는게 나았다.
이전의 생에서도 당연히 이런 생각을 했었지만, 그 때는 촌장 집에서 탈출하려는 절박함이 너무 강하고 능력도 없어서 포기했었다. 사실 그 때 최하급 표사로 채용된 것도 운이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전생에 수련했던 삼재심법의 50년치 내공을 지니고 있는데다가 칼질도 이류 수준으로 할 줄 안다. 지금 당장 식칼을 들어도 왠만한 성인남성 하나 도륙내는 건 힘들지 않을 것이다.
무림의 일류고수를 만나면 단숨에 죽겠지만 그래도 어중이떠중이 삼류무사보다는 강한 게 현재의 내 무공수준이었다.
' 이런 성취를 무림인(武林人)들에게 보여주면 나를 제자(第者)로 받아 주겠지?'
명망있는 무림고수의 제자가 되는 것!
그야말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내가 꿈꿨던 고수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방법이야말로 현재 상황에서 최선이라는 걸 깨닫고 약간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동시에 나는 이 외양간에 열두시진 붙어사는 생활에서 벗어나서 조금이라도 정보를 모아야 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일단 무림인이 어디에 살고 어떻게 돌아다니는지부터 알지 않으면 계획을 시작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으 제길... 우선 소똥부터 치워야 하나."
나는 투덜거리면서 갈퀴와 삽을 들고 외양간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철벅철벅하게 널려 있는 소똥이 역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소가 제멋대로 싸지르기 일쑤였기에 매번 청소하는 건 무리였고 삼일에 한 번씩 청소를 했었는데, 고약한 금만재놈이 때가 아닌데도 또 청소하기를 명한 것이다.
물론 소똥을 치워야 소의 건강이 보호되긴 하지만 순전히 갑질하려는 의도였기에 좋게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결국 소똥 치우는 건 나인데 금만재가 촌장에게 생색 낼 게 뻔했다.
"우웩..."
전신에 소똥내가 배이도록 소똥을 치우고 있을 때였다.
나는 소똥냄새가 너무 심해서 어지럼증 때문에 수풀쪽으로 가서 한 번 토악질을 했다. 먹은 것도 없는데 위액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잠시 나무등걸에 앉아서 쉬며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벼락같은 깨달음이 관통했다.
입이 덜덜 떨렸다.
"그, 그래! 그게 있었잖아!!"
나는 바보다.
왜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로 돌아가려고 했던 걸까?
천년설삼(千年雪蔘)!
복용하면 단숨에 천하를 오시할만한 공력을 얻게 해준다는 전설의 영약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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