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새로운 예언자
(96/96)
96. 새로운 예언자
(96/96)
96. 새로운 예언자
2023.08.02.
“으음…….”
트리니다드의 주술사 바딤이 한숨과 짜증 사이의 미묘한 소리를 내뱉었다.
아닌 게 아니라 골치가 아팠다.
이번 손님은 별로 손님으로 받고 싶지 않은 자였다. 그가 얽힌다면 제 입장이 상당히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물론 트리니다드의 손님이란 돈 떼먹고 달아나는 사기꾼에 악덕 노예상에 살인마 귀족 나리까지, 문제가 없는 인간이 오히려 드물었지만 그래도 이 손님은 유난했다.
“으음…….”
“네놈의 반응이 무얼 의미하는지 모르겠군. 설마 나를 몰라보는 것은 아닐 테고……. 네까짓 게 감히 나를 저울질하겠다는 뜻인가?”
저울질이라니. 저울에 올려놓고 싶지도 않았다.
눈앞의 손님, 그러니까 가문에서 쫓겨나 지금은 제국의 수배자 신세가 된 전 피엘리온 소공작은 골칫거리가 분명했다.
피엘리온 소공작과 얽히면 또다시 제국의 황실과 척을 지게 된다는 말이었는데, 그건 정말이지 하고 싶지 않은 짓이었다.
‘제국의 황제는 무섭지. 그보다 더 무서운 건 황후지만.’
진짜 표식을 지닌 제국의 황후는 이제껏 어디서도 보지 못한 인물이었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손발이 묶인 것처럼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도저히 상대가 안 되겠구나 싶었고, 그보다 앞서 저절로 몸이 공손해졌다. 제 몸에 흐르는 주술사의 피가 진짜 황후가 지닌 힘을 알아보는 게 아닐까 싶었다.
최초의 반려는 대륙에서 가장 위대했던 주술사였다. 주술사가 반려에게 경외감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제국의 황후는 최초의 반려 못지않은 힘을 지녔을 것이다.
하여간 이런저런 이유로든 제국의 심기를 거슬리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황후를 불편하게 만드는 짓은 절대로 조금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뜻은 아니옵고,”
바딤이 일부러 질질 끌듯이 말끝을 늘였다.
그렇다고 매몰차게 소공작을 쫓아낼 수도 없었다.
의뢰금도 문제였지만, 저를 찾아왔다는 것은 제 주술이 개입할 여지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럼?”
수배자 신세가 된 소공작은 아직 제 처지를 모르는 듯 여전히 귀족처럼 굴어댔다.
바딤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공께서 하실 의뢰가 제 능력을 넘어설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였습니다. 오해 없으시길.”
테르나덴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런 말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려는 것이냐? 괘씸하군.”
“…….”
피엘리온의 소공작은 그새 좀 달라져 있었다.
수배령을 피해 제국 밖으로 떠돌았던 시간 동안 그는 불신과 고생을 배운 듯했다.
뭐, 그를 위해서는 나쁘다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은 고통스러운 만큼 성장하기 마련이었으니까.
철컹!
테르나덴이 바딤의 앞에 제법 무게가 나가는 돈주머니를 던졌다. 바딤은 쫓겨난 주제에 어디서 이만한 현금을 마련했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누이를 만나기를 원한다. 나를 누이에게 인도해.”
“으음…….”
바딤은 테르나덴이 불쾌해한다는 것을 잊고 또 비슷한 숨소리를 흘렸다.
그 누이가 제국의 황후를 말하는 것이라면 굳이 힘들게 저를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아무래도 피엘리온 소공작은 지금 황후가 카르타헤나 피엘리온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그럼 제국으로 가시면 되지 않습니까? 이 돈이라면 수배령을 피해 제국에 들어가는 방법도 얼마든지 있을 텐데요.”
일단 시치미를 떼 봤다.
바딤이 진짜 황후를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테르나덴은 그의 속내를 모른 채 이렇게 답했다.
“나는……. 미친 소리 같지만, 지금 황후는 누이가 아닌 것 같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비유 같은 겁니까?”
“……망할! 닥치고 좀……!”
테르나덴이 울컥 소리를 질렀다.
그가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적어도 너는 내 말을 믿어야 해. 그 망할 주술을 건 게 너잖아. 그 주술 이후로 누이는……. 그 주술이 문제였어!”
“아…….”
바딤이 아차 싶은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피엘리온 소공작이 다시 저를 찾아온 이유를 이제 알았다.
표식을 진짜에게 되돌리는 그 주술을 썼을 때부터 자신은 황후에게 얽혀든 셈이었다. 뒤바뀐 두 존재가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제 일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주술은 성공했습니다.”
“빌어먹을! 그래! 성공한 모양이지! 그래서 누이가 다른 사람이 되었으니까!”
쾅!
테르나덴이 발을 굴렀다.
그러나 그는 성질을 내며 횡포를 부리는 귀족이 아니라, 주저앉아 울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도무지…… 잊지를 못하겠다. 누이가 그때 하던 말, 그때 짓던 표정…… 그리고 레스칼 엘리아든이 하던 미친 짓까지……. 그건…… 그건 절대…….”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황후와 카르타헤나 피엘리온은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다른 어떤 감각보다 시각에 가장 많이 의지하는 존재였다.
두 사람이 다르다는 걸 다른 감각 전부가 느끼고 있어도, 두 눈이 같다고 해 버리면 그저 같은 사람이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피엘리온 소공작의 경우는 달랐다.
그건 아마도 그가 카르타헤나 피엘리온을 마음에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국의 황제도 단숨에 제 반려를 알아보았으니까. 피엘리온 소공작은 그보다는 시간이 더 걸린 듯했지만.
“레스칼 엘리아든은 절대…… 절대 누이를 그렇게 바라보지 않았어. 누이도 마찬가지였어. 누이가 황후 자리를 탐내긴 했어도, 미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레스칼 엘리아든에게 집착하긴 했어도…… 그를 그렇게 감싸 안을 것처럼 바라본 적은 없었다고. 빌어먹을, 나는 그러니까 그게……,”
“끼어들 여지가 없다고 느끼셨다는 말이겠군요. 예전과는 다르게.”
바딤은 말끔하게 테르나덴의 말을 정리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느끼셨을 테고.”
“……그래.”
테르나덴이 고통스럽게 내뱉었다.
바딤이 두 손을 뒤통수에 얹고 잠시 고민하다 결론을 내렸다.
여전히 제 주술이 개입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의뢰는 피할 수 없었다.
‘황후 폐하는 칼에 찔려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두 사람의 몸이 바뀐 것이라 한다면 카르타헤나 피엘리온은 시체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 시체를 수습하는 것이 소공작의 몫인가.’
바딤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제국에서도 시체를 찾으려 들 텐데……. 뭐, 잘하면 소공작도 수배 생활을 끝낼 수 있겠네.’
마음을 굳혔다. 이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피엘리온 소공작의 역할이 뒤바뀐 시체를 찾는 것이라면 제국의 화를 살 일은 없을 것이다.
“좋습니다.”
바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먼저 돈주머니를 챙겼다. 그런 다음 양손을 모으고 주문을 외울 준비를 했다.
“이쪽으로 서십시오. 의뢰금이 충분하니 주술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
테르나덴이 허탈한 숨을 내쉬며 바딤이 시키는 대로 섰다.
바딤이 그를 향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스스스슷.
기대했던 대로 테르나덴의 발 밑에 통로가 생겨났다. 그를 원하는 곳까지 데려가 줄 수 있는 통로였다.
통로가 완성되자 바딤이 그에게 그 안을 손짓했다.
“향하십시오. 원하시는 바가 기다리는 곳으로.”
“너 같은 인간을 믿는 건 아니지만 네 주술을 믿겠다.”
끝까지 모난 소리를 한 테르나덴이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그게 이 주 전이었다.
그리고 이 주 후에 피엘리온의 소공작이 다시 그를 찾아왔다. 새로운 의뢰를 하고자 했다.
바딤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의뢰였다.
* * *
“하아…… 돌겠네.”
바딤이 고개를 숙이고 제 발 밑으로 똑똑 떨어지는 핏물을 쳐다보았다.
“으아, 삭신이야.”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팔을 흔들자 철컹철컹 쇠사슬 소리가 울렸다.
그는 지금 사지가 묶인 채 천장에 매달린 상태였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지하는 고문실이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주변에는 여기저기 보기만 해도 섬뜩한 고문 기구가 널려 있었고 폐를 찌르는 공기는 몸을 썩게 만드는 것 같았다.
부러진 코에서 아직도 피가 한 방울씩 떨어졌다.
진짜 사악한 인간이었다. 구두 끝으로 코를 걷어차다니.
천장에 매달리기 전까지 꽤 악랄한 고문을 당했지만, 바딤은 아직도 제 코를 부러트린 그 발길질이 제일 충격적이었다.
-이런 거 해 보고 싶었어.
그렇게 말한 아름다운 얼굴이, 나비처럼 사뿐히 다리를 들어 올려 아주 우아하게 제 코를 걷어찼다.
-칼은 이제 재미가 덜해졌거든.
가르릉, 낮은 숨소리처럼 웃는 특이한 웃음소리가 인상적이었다. 가늘게 접히는 눈매가 더럽게도 사악하고 더럽게도 매혹적이었다.
가느다란 몸 위를 흘러내리는 드레스가 다리 선을 드러냈다. 인간의 종아리와 발목이 그렇게나 아름다운 것인지 처음 알았다.
그가 코피를 쏟으며 쓰러지자 조각처럼 아름다운 손이 불에 달군 고문 도구로 제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건 반응은 좋은데, 냄새가 싫어.
달캉.
고맙게도 그 손은 고문 도구를 휙 내던졌다. 버릇없는 귀족집 아이가 흥미를 잃은 장난감을 버리는 모양새였다.
-그래서, 답은?
가르릉, 심술궂고 예쁜 고양이처럼 웃으며 그 아름다운 얼굴이 발끝으로 제 턱을 치켜들었다.
바딤은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정말이었다.
의뢰의 내용이 달랐다면.
바딤이 피를 줄줄 흘리면서 비굴하게 웃었다.
-외람되지만 그 의뢰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
툭.
아름다운 발이 제 턱을 의외로 곱게 내려 주었다. 하지만 속단은 금물이었다. 제 몸은 보다 전문적인 고문 기술자에게 맡겨졌다.
코딱지만 한 왕국에 전문 고문 기술자라는 직업이 버젓이 있다는 게 기가 찼다. 제국에도 그런 직업은 없을 것이다.
-죽지 않을 만큼 망가트려 놔. 양 팔은 놔두고. 아무래도 팔은 주문을 외울 때 쓰는 것 같았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매혹적인 목소리였다.
너무 높지 않은, 차분하고 맑은 음성은 귀가 겪는 호사였다.
그런 목소리가 저런 말을 했다. 바딤은 앞으로 두 다리는 영영 못 쓰게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아니, 그러셔도 어차피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주술사는 같은 의뢰인에게 같은 주술을 두 번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얼굴이 웃었다.
검은 비단 같은 머리칼이 몸짓에 따라 흔들렸다.
-그럼 문제없겠군. 같은 의뢰인이 아니니까.
-네……?
그건 너무 뻔뻔하지 않나 싶었다. 누군지 뻔히 아는 저 얼굴로.
-이전에 네게 의뢰했던 사람은 내가 아니었잖아.
영롱한 보라색 눈동자가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마음을 뽑아 가기라도 할 것 같은 눈이었다.
그 눈이 제 마음을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델라르타의 예언자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