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싸움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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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싸움의 기술
2023.07.30.
“아…… 단순히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고요?”
리얀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라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단 한 번. 그것도 목적이 있어서였어.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사람들을 부리지.”
“으음…… 그러니까 그게……?”
“자신은 숨고, 사람들을 이용하고. 마물을 이용해도 내게 해를 입힐 수는 없었어. 그렇지만 계속 마물을 소모하지. 질 게 분명한 싸움을 즐기는 게 아니라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음…….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만 아직 마물이 소용없다는 걸 잘 모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제 좀 요령이 생긴 거지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는데요.”
리얀이 조금 머쓱한 얼굴로 덧붙였다.
오러를 얻은 지금에서는 마물 사냥도 여유로워졌지만 그 전에는 에셀리온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마물이 노리는 것은 나지. 하지만 마물은 나를 해칠 수 없어. 내가 마물을 두 차례 돌려보냈으니 마족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베트의 몸을 빌려 다시 같은 시도를 했다.
“아, 음. 그렇겠군요. 그럼 계속 소용없는 짓을 하는 이유가, 음…….”
“제 힘을 온전히 쓸 수 없는 상황이라고 가정해 보면 어떨까. 소용이 있는 짓을 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어……?”
리얀이 눈을 끔벅댔다.
“자기는 계속 숨어 있고, 아랫것들을 시켜 승산도 없는 잔싸움만 걸어대고…….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황후 폐하.”
데칸이 다급히 끼어들었다.
그답지 않은 일이긴 했다. 지금 몹시 흥분했다는 뜻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런 가정도 가능합니다, 황후 폐하. 마족이 숨어 있는 곳에는 늘 시체가 남을 겁니다. 사인이 명확하지 않은 시체가.”
“마력이 부족한 상태고, 그 부족함을 메꾸기 위해 인간의 생명력을 필요로 한다면 반드시 그럴 것이다. 이목을 끄는 건 달갑지 않은 테니 시체가 매일 생겨나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곳에 은신하고 있을지도 몰라.”
“맞습니다! 그러니 이제껏 들키지 않고 지내 왔을 겁니다. 신전같이 음침하고 폐쇄적인 곳에서는 누가 죽어도 쉬쉬하기 마련이니까 그런 곳만 골라서 숨었을 겁니다.”
리얀이 저도 모르게 큰 목소리를 냈다.
데칸이 그 말을 받았다.
“가능성이 있는 곳을 추려 보겠습니다. 잘하면 마족의 근거지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근위대와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술렁술렁 동요가 일었다.
“그럼 원정입니까, 폐하?”
리얀이 곧장 레스칼을 향해 물었다.
레스칼은 리얀이 아니라 라실리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있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다면 빠르게.”
“알겠습니다. 다른 일을 제쳐 두고 근거지를 찾는 데 주력하겠습니다.”
“아, 그 전에 하나만.”
라실리아가 데칸의 시선을 붙들었다. 레스칼이 그 장면을 말없이 응시했다.
데칸은 레스칼이 오늘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라실리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명하십시오, 황후 폐하.”
“주술로도 치유가 가능한가?”
“슈라이든 공녀를 염려하고 계시는군요.”
라실리아의 눈가에 그늘이 생겨났다.
그렇게 쓰러진 뒤 이베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시시각각 몸이 쇠약해져 가는 게 느껴졌다. 자꾸만 공작저에서 본 피엘리온 공작의 마지막 모습과 겹쳐 보였다.
“신관이 치유를 시도했지만 효과가 미미하다고 했어. 다른 방법이 필요해.”
“으음……. 아마도 생명력이 거의 다 고갈된 상태라 높은 치유력을 가진 고위 신관이 필요할 겁니다.”
그러나 하리오스 대신전의 참사로 고위 신관들은 모두 죽었다. 타국의 고위 신관을 청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테고, 이베트가 그 시간을 버텨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치유의 주술도 있을 겁니다. 송구하게도 제가 거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치유력을 지닌 신관들이 있는 곳에서는 치유의 주술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데칸의 주술은 특히 은의 방패가 맡은 임무를 위한 것이라 치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쪽은 아마도……. ……아! 트리니다드의 주술사를 고용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정도의 주술사라면 치유의 주술도 알고 있을 겁니다.”
트리니다드라는 말에 리얀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쪽은 너무 수상쩍지 않아? 피엘리온 소공작 일도 있는데.”
거기까지 말한 리얀이 레스칼의 눈치를 살폈다.
레스칼은 아무 말 없이 라실리아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게 유일한 방법이라면.”
라실리아가 레스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스스로 돈을 위해 청탁을 받는다고 했으니 다른 의도를 숨기지는 않을 겁니다.”
“반대할 생각은 없다.”
그 말대로 레스칼에게는 꺼리는 기색이 없었다.
“준비가 되는 대로……. 아, 빠를수록 좋겠군. 지금 불러들이도록.”
불러들이라는 말은 데칸을 향하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폐하.”
데칸이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레스칼은 내내 그랬듯이 라실리아만 바라보며 뒤로 손짓을 했다.
“나머지는 나가도 좋다.”
리얀과 세르벤이 뭔가 석연찮은 표정을 했지만 레스칼의 말대로 사실이 비워졌다.
* * *
“오래 걸리는군.”
데칸이 주문을 외운 지 삼 분쯤 지났을 것이다.
레스칼이 툭 내뱉듯이 이런 말을 했다.
“그쪽에서 찾아오는데도 시간이 걸릴 테니까요. 계속 기다리실 건가요?”
“그럴 생각인데.”
라실리아가 소파 옆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렇다면 이쪽에 앉으세요.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르니 차라도 나눌까요?”
“차는 좋아. 하지만 자리를 옮기는 건 안 돼. 여기 있겠다.”
“삐이?”
피피가 좀 어이없다는 듯 레스칼을 쳐다보았다.
그건 라실리아도 마찬가지였다.
“폐하께서 하신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굳이 그렇게 멀찍이 떨어져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의자라도 당겨 오는 게 어떻습니까?”
“안 돼.”
레스칼은 오히려 의자를 더 뒤로 밀었다.
“삐이.”
피피가 하나도 안 어울리는 짓이라고 하며 혀 차는 소리를 보탰다. 찹찹, 하는 소리가 들릴 텐데도 레스칼은 피피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렇게 멀리 있으니 제가 좀 서운해요.”
저도 모르게 본심이 나왔다.
말이 나왔을 땐 놀랐지만, 라실리아는 곧 당황을 지우고 레스칼을 천천히 마주 보았다. 어느샌가 자신도 레스칼이 옆에 나란히 앉는 데 적응이 된 모양이었다.
이제는 바싹 붙어 앉은 그의 체온이 느껴지는 일도,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음성도, 그러다 은근슬쩍 손을 잡거나 어깨에 입술을 붙이는 일도 없으면 허전했지만 레스칼은 그 사실을 모르는 듯 저렇게 멀리 있었다.
“폐하는 괜찮으신가요?”
“아니. 괜찮을 리가.”
말은 그랬다.
하지만 레스칼은 요새 내 머릿속에 그 생각밖에 없어서 안 된다는 말을 하려는 그런 얼굴이 아니었다.
지금 레스칼의 금안은 녹을 것처럼 뜨겁지도, 다정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차갑게 굳어 있었다.
“멀리 있어야 잘 보일 테니까.”
“어떤 게요?”
“그대가 얼마나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는지.”
“……네?”
평소와는 다른 온도를 띄는 금안이 무섭도록 일그러졌다.
“내가 그걸 모르고 있었다. 그대가 말을 하고 나서야 알았어.”
“무슨 말인가요, 폐하.”
“그대가 마물을 돌려보낸 힘. 그것도 마력이라는 걸.”
“…….”
“피를 토한 게 그 이유겠지. 몸이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니까. 내 말이 틀렸나?”
레스칼의 지금 표정이 꿈 속의 마족과 겹쳤다.
둘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차가운 얼굴도 사실은 아주 다정했다.
“……지금 잠깐일 겁니다.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되면 사라질 문제입니다.”
“그게 언젠데?”
레스칼이 손을 꾹 움켜쥐었다.
“글쎄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놈이 마물을 계속 보내는 이유가 이걸 알아서인가? 그대가 힘을 쓸수록 생명을 갉아먹게 된다는 것을 알아서?”
“그건……,”
라실리아도 몰랐다.
하지만 왠지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시시한 공격이 자신을 죽일 수 없다고는 해도 손해가 쌓이다 보니 무리가 생기고 있었다.
“피를 완전히 종속하고 나면? 그때는 더 많은 마력이 전이될 수도 있다. 그럼 그대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것도 몰랐다.
“나는 끝내 몰랐을 것이다. 슈라이든 공녀의 일이 없었다면.”
“…….”
레스칼을 가장 많이 괴롭히는 일이 그것인 모양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라실리아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는 게.
“그건 조금도 괜찮지 않아.”
라실리아가 멀찍이 떨어져 앉은 레스칼을 눈으로 쓰다듬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몰랐다.
자신이 꿈에서와 똑같은 말을 하게 될지.
“저는 이 힘을 다스릴 겁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그전까지 고통을 겪게 되겠지. 그걸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
그렇게 말하는 레스칼이 더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래서 생각했다. 그가 자신을 죽이는 미래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럼 제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레스칼이 말을 대신해 시선을 보내왔다.
라실리아가 웃으며 옆자리를 톡톡 두들겼다.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머릿속에 가득한 그 생각은 저를 위해 조금 미루시고 손을 잡아 주세요. 그럼 한결 나을 것 같습니다.”
“……그대는,”
레스칼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며 괴로운 소리를 냈다.
“그저 말을 할 뿐인데, 나를 괴롭게 해.”
“공평하군요. 저도 폐하 덕분에 몸이 조금 괴로우니까.”
그런 이유라면 레스칼은 절대 라실리아가 하라는 일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레스칼이 결국 자리를 옮겼다.
옆자리에 앉은 그가 거리를 벌려 앉을까 봐 라실리아가 먼저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내가 인간이었다면 지금 죽었을 것이다. 심장이 멎었을 테니까.”
레스칼이 엄살 같기도 하고 고백 같기도 한 말을 중얼대며 라실리아를 덥석 끌어안았다.
“이제야 폐하가 폐하 같아요.”
라실리아가 웃으며 중얼대자 레스칼이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죽었을 것 같다고 엉뚱한 말을 해댔다.
트리니다드의 주술사를 기다리는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주술사를 기다리며 초조해하는 건 레스칼이 더 했다. 라실리아에게 이베트를 회복시킬 방법이 간절히 필요한 것처럼, 그 역시 라실리아를 위해서 치유의 주술을 원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도록 트리니다드의 주술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