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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마력의 근원 (94/96)


94. 마력의 근원
2023.07.26.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마족을 없애지 않는 한 마물은 계속 위협이 될 것이다. 다른 차원의 힘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단둘뿐이었다.

황실 근위대가 줄줄이 소드 마스터가 되지 않는 이상, 레스칼이 마력을 포기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앞으로는 손도 잡지 않겠다는 것은 너무 과했다.

레스칼은 마족을 없애기 전까지 손을 잡는 일도, 지금처럼 한 침대에서 잠이 드는 일도 없을 것이라 못을 박았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그가 그렇게까지 경계심을 돋우는 이유도 알았다.


“그런데 좀……,”

“삐이이.”

피피가 완전 짜증난다며 날개를 푸드덕거렸다.

손도 잡지 않겠다는 선언은 레스칼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었다. 감각이 연결된 피피도 물론이었다. 쓰다듬는 것도, 손바닥에 앉히는 것도 금지였다.


“아무래도 불편하지?”

“삐이!”

“너한테까지 그러는 건 너무하잖아. 너하고 먼저 상의한 것도 아니면서.”

“삐!”

그게 백번 옳다는 말이 절반은 레스칼의 욕에 섞여 쉬지도 않고 들려왔다.


“삐이? 삐이이?”

다시 곁으로 날아온 피피가 그냥 자신을 쓰다듬으라고 보챘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 사람이 배신감을 느낄 것 같아. 말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이미 한 상태라서.”

“삐!”

“너와 완전히 상관없는 일은 아니지. 감각이 연결되어 있다고 했으니까. 사실 감정도 연결되어 있지 않아?”

“삐이? 삐!”

그딴 건 모르겠고 일단 쓰다듬기나 하라고 했다.


“음……. 오해하지 마. 너를 만지는 게 싫다는 게 아니라 다시 얘기를 해 보는 게 순서일 것 같아서 그래.”

“삐이이? 삐잇, 삐! ……피이.”

처음에는 떼를 쓰던 피피가 이제는 불쌍한 척을 했다.

라실리아가 쓰러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기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아냐며, 펑펑 울 뻔했다고 했다. 라실리아가 쓰러져 있는 걸 가장 먼저 본 새가 자신이라고 했다.


“아, 그랬구나. 많이 놀랐어?”

“삐!”

“아냐. 다쳐서가 아니라 무리해서 힘을……, ……아, 그러고 보니 꿈을 꿨는데.”

“삐?”

“꿈에서 뭔가를 알았어.”

“삐이?”

라실리아가 이불을 걷었다.


“이럴 게 아니라 나가서 그 사람을 봐야겠어.”

황궁은 아직 경계 태세에 있었다. 레스칼은 본인의 의지와는 별개로 라실리아의 곁에 스물네 시간 내내 붙어 있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대신 피피에게 한 순간도 떨어져 있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준 뒤 자리를 비웠다.

그사이 라실리아는 제대로 옷을 입기 위해 이베트가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가만…… 그런데 나는 수건만 두르고 있었을 텐데. 이 가운은 누가 입힌 거지?”

“삐이…….”

피피가 고개를 훌쩍 돌린 채 공연히 부산하게 날아다녔다.


“너는 알고 있어?”

“피…….”

“응? 뭐라고?”

“피이…….”

“아, 그래.”

라실리아가 수건만 걸친 상태로 쓰러져 있었고, 그걸 가장 먼저 발견한 게 피피였다.

피피 말로는 너무 놀라는 와중에도 라실리아의 차림새가 부적절하다는 것을 근위대에게 알리려고 빽빽 소리를 쳐댔다고 했다.

그 덕에 라실리아를 침대로 옮긴 사람은 레스칼이 되었다.


“그럼 그 사람이 가운을……. ……그래, 그랬겠지.”

라실리아는 애써 그 다음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슈라이든 공녀는? 무사한 거지?”

“삐이.”

피피가 그건 자기도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궁인들은 따로 모아 지키게 했으니 무사할 것이라고 했다. 아직 누군가가 마물에 죽었다는 얘기는 없었다.


“내 심부름을 하다가 마물과 마주쳐서 돌아오지 못했던 걸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야겠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침실 문이 울렸다.

똑똑.


“황후 폐하.”

이베트였다.

기다리던 목소리를 들으니 반가움과 안도가 느껴졌다.

라실리아가 웃는 얼굴로 침실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공녀.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들도록.”

“네, 황후 폐하.”

  

* * *



“…….”

그러나 이베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웃음이 사라졌다.


“삐이…….”

이베트는 이베트가 아니었다.

적어도 마지막으로 봤을 때의 그 이베트가 아니었다.

이틀 만에 이베트는 사람이 달라졌다고 느껴질 정도로 핼쑥하게 살이 빠져 있었다.

눈 밑이 움푹 꺼져 까맣게 보이는 얼굴로 이베트가 다가왔다.


“황후 폐하. 명하신 일을 완수했습니다.”

이베트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작고 동글동글한 글씨가 빼곡히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이베트가 짓는 웃음이었지만 지금은 그 웃음조차 심지가 까맣게 닳아 버린 양초 같았다.

지금 이베트는 이베트가 아니라 이전에 보았던 다른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그건 이젠 괜찮아. ……아, 손을 다쳤네. 상처는 치료했나?”

라실리아는 종이가 아닌, 종이를 내미는 손을 바라보았다.

이베트의 왼손 손등에는 거칠게 찍힌 상처가 남아 있었다.

상처 주변이 붉었다. 대신 피부는 종이보다 더 창백했다. 피를 많이 흘린 것 같았다.


“네? 제가 다쳤나요? 어마, 정말 상처가 있네.”

이베트가 다친 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걱정 마세요, 황후 폐하. 치료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그렇게 심한 상처가 났는데, 다친 것을 몰랐다는 건가?”

“으음……? 네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틀이나 지나서 그럴 거예요.”

“이틀 동안 공녀는 앓기라도 한 건가?”

라실리아는 이베트가 내미는 종이를 받아 들며 물었다. 저절로 눈이 글자를 향했다.


“네? 앓다니요. 그런 일은 없었나이다, 황후 폐하.”

“그런데 왜 그렇게 안색이 좋지 않은 거야. 서 있지 말고 앉도록.”

“그리 명하신다면.”

이베트가 수줍게 웃으며 라실리아가 가리키는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갑자기 몸이 옆으로 휘청 기울었다.


“공녀!”

“삐이!”

의자 아래로 넘어지려는 이베트의 옷자락을 피피가 물었다. 날개를 파득파득대며 이베트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피피는 너무 작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라실리아가 이베트를 붙들어 주었다.


“수고했어, 피피. 공녀는 아예 눕는 게 좋겠어.”

“네? 누우라고요? 왜 그러시는지요, 황후 폐하. 저는 누울 이유가 없는데요.”

이베트가 통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깜박거렸다. 표정만 보면 안쓰러울 정도로 창백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없어 보였다.


“삐이이…….”

피피가 아무래도 괜찮지 않은 것 같다며 이베트의 주위를 빙빙 맴돌았다.


“앉아 있다가 또 넘어지면 안 되니까. 갑자기 어지러워진 건가?”

“제가요? 넘어졌다고요? 어…… 그랬나?”

이베트가 계속 고개를 갸웃댔다.


“아무래도 공녀는 누워 있는 게 좋겠어. 옷을 갈아입는 것만 거들어 주고 쉬도록. 나는 폐하를 뵙고……, …….”

문득 라실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다급하게 이베트를 붙잡느라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종이들이 흩어지면서 가장 아래에 있던 종이가 드러났다.

처음 몇 장이 정갈하고 빼곡하게 글씨가 적혀 있던 것과는 달리, 마지막 장은 필체도 흐트러졌고 줄 간격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라실리아의 눈을 끌어당긴 것은 글자의 색깔이었다.


“…….”

라실리아가 몸을 굽혀 마지막 장을 집어 들었다.


“……공녀. 그 상처가, 어떻게 생겼다고?”

라실리아가 다시 이베트를 향해 물었다.

이베트가 해맑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황후 폐하. 그냥 다친 것 같아요.”

“혹시 이 종이에 글을 쓰면서 난 상처인가?”

“아……? 그랬나? 잘 모르겠습니다.”

“잘 생각해 봐. 상처에서 피가 많이 흘렀나?”

“그게, 음…….”

마지막 글씨 몇 개는 알아볼 수가 없었다. 엉망으로 흘려 쓴 것 같아 보였지만 어쩌면 글씨가 아닐 수도 있었다.

게다가 잉크 색깔이 달랐다.

이상하게도, 탁한 갈색을 띠는 글자들은 잉크만이 아니라 피가 섞인 것 같았다.


“여길 봐. 이 글자를 어떻게 썼는지 기억해?”

“아…….”

마지막 장을 내밀자 이베트는 뭔가를 기억할 것처럼 눈을 깜박댔다.


“아……? 아……,”

“공녀!”

“삐!”

라실리아가 다급히 이베트를 붙잡았다. 피피가 옆에서 이베트의 소맷자락을 물어 잡아당겼다.

종이를 보던 이베트는 어느샌가 손가락으로 손등의 상처를 헤집고 있었다.

주르륵.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흘렀다. 이베트가 멍한 눈으로 라실리아를 바라보더니 피에 젖은 손가락으로 제 드레스에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 마, 공녀! 뭘 하는 거야!”

라실리아가 팔을 붙잡았으나 말릴 수가 없었다. 이베트가 울상을 지으며 라실리아를 매단 채 오른손을 마구 움직여 치맛자락에 처음 보는 문양을 그려냈다.


“저도…… 모르겠어요, 황후 폐하. 멈출 수가…… 멈출 수가 없어요. 왜……,”

스르륵.

이베트의 옷자락이 꿈틀거렸다. 뭔가가 스며 나오는 것처럼 울렁대기 시작했다.


“삐이!”

화르륵!

피피가 이베트의 드레스를 향해 불꽃을 내뱉었다.


“피피!”

화르르륵!

피피는 라실리아의 외침에도 아랑곳없이 다시 불꽃을 뱉어냈다.

이베트의 드레스가 타들어 갔다.


“삐이, 삐이!”

피피가 불을 끄지 말라고 외쳐댔다.


“……그래. 그래야 될 것 같아.”

라실리아가 동작을 멈추고 불에 타는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피피가 일으킨 백색의 불꽃에 어른대는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키이이욱.

작은 소리기는 했지만 분명히 마물이 내는 울음이었다. 마물이 하나둘씩 머리를 내밀다 타들어가는 곳은 이베트의 드레스 위였다.


“공녀…….”

라실리아가 이베트를 바라보았다. 이베트가 충격으로 벌어진 눈을 한 채 라실리아를 마주 보았다.


“황후 폐하, 저는…… 제가 왜……. ……흣,”

이베트가 눈을 감고 쓰러졌다.


“공녀!”

이베트는 그 잠깐 사이에 더 야윈 얼굴이 되어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 * *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실리아의 사실이 가득 찼다.

세 그림자 기사들과 근위대 수석기사 열 명, 거기에 마법사 길드의 마스터와 상급 마법사 둘까지 끼어 있었다.

한 자리에 모일 일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넓다고는 해도 방 하나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광경은 조금 낯설긴 했다.

그러나 근위대와 그림자 기사들의 눈에는,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옆에 어떤 핑계를 대든 붙어 앉아 있는 게 아니라 그 맞은편에 앉아 있다는 게 더 낯설었다.

라실리아가 일인용 소파에 앉으면 팔걸이에 가서 앉는 게 레스칼이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긴장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데칸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는 라실리아와 뚝 떨어진 맞은편 자리에 앉은 레스칼을 자꾸 쳐다보지 않으려고 몹시 애를 쓰는 중이었다.


“한 번 마족과 접촉한 자들은, 이후로도 다시 연결이 가능하다고.”

이번에 벌어진 사건을 두고 내린 결론이었다.


“기존에 의식을 빼앗겼던 슈라이든 공녀를 움직여 마물을 불러오는 소환진을 그리게 했을 겁니다.”

“아, 그래서…….”

“으어…….”

마법사들이 점잖지 못한 소리를 내는 가운데 세르벤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그럼 나도……,”

거의 들리지 않는 혼잣말을 놓치지 않은 레스칼이 세르벤을 힐긋 돌아본 다음 물었다.


“단순히 그림을 그렸다고 그게 소환진이 되지는 않아. 마력이든 뭐든 진을 구동시키는 힘이 필요할 것이다. 공녀에게 그럴 힘이 있었겠나?”

대답은 라실리아가 했다.


“인간의 생명력을 빌려 쓰는 것 같아요.”

그 말에 마법사들의 안색이 허옇게 바랬다.


“아니, 그게 무, 무슨…….”

“서, 섬뜩하게……,”

리얀이 마법사들을 향해 조용히 입 다물라는 손짓을 보내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다시 조용해진 방 안에 라실리아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마족이 숨어 있는 이유가 하나 더 있지 않을까, 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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