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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실패라서 다행이야 (93/96)


93. 실패라서 다행이야
2023.07.23.


차르륵!

몸을 일으키자 그새 식은 물이 살갗을 차갑게 했다.

뭔가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이상해.”

이베트가 너무 늦었다.

자신이 맡긴 일이 아무리 곤란해도 이베트가 시간을 잊고 있진 않을 것이다.


“피피도 소식이 없잖아.”

라실리아가 욕조에서 일어서 수건으로 몸을 감쌌다.

아무래도 제 손으로 물기를 닦고 옷을 갈아입어야 할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며 라실리아가 욕실 문을 열었다.

끼이익.

오늘따라 욕실 문이 밀리는 소리가 예리하게 공간을 울렸다.

다른 시녀를 두지 않은 게 처음으로 불편하게 다가왔다.

라실리아는 옷을 입고, 리얀을 대신해 방을 지키고 있을 근위대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근위대를 동원해서라도 이베트의 행방을 찾아야 할 때였다.


“…….”

욕실과 침실 사이에 자리한, 화장대와 서랍장을 놓아둔 방문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막 손잡이를 돌리려던 라실리아가 문득 손을 멈췄다.


‘뭐지……. 이상한데.’

왠지 이 문을 열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 맨몸에 수건을 두른 상태였고, 옷은 그 안에 있었다.


‘낮에 입었던 옷을 다시 입어야 하는 걸까.’

황실 예법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래야 할지도 몰랐다. 그만큼 문을 여는 게 내키지 않았다.

라실리아는 손잡이를 놓고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덜컹!

문이 저 혼자 흔들렸다.


“음?”

라실리아가 홱 고개를 돌렸다.

덜컹!

문이 흔들리고 있는 게 맞았다.

더 따질 것도 없이, 라실리아가 몸을 가린 수건을 움켜쥔 채 밖으로 뛰어나갔다.


“밖에 누가 있,”

덜컹!

키이이이욱!

캬우욱!

하지만 늦었다.

방문이 벌컥 열리며 그 안에서 마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캬욱!


“읏!”

갑자기 달려드는 마물을 피하려다 라실리아의 걸음이 꼬였다. 한쪽 발목이 꺾이며 라실리아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캬아아욱!


“그만둬! 저리 가!”

라실리아가 바닥에 앉은 채 마물들을 쳐다보았다.

제게는 저것들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돌아가. 너희들이 온 곳으로.”

“…….”

마물들은 더 이상 달려들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가지도 않았다.

라실리아는 머릿속에 날카롭게 전해지는 저항을 느꼈다.


‘이전하고는 달라. 이 마물들은 의지가 확고해. 나를 죽이고 싶어 해.’

그때 돌려보냈던 마물들은 의지를 잃고 혼란스러워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쉽게 움직일 수 있었다.


“……읏,”

키우욱.

라실리아와 마물들이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를 이루었다.

이마에서 땀이 솟았다.

알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집중력을 잃는 순간, 저 마물들이 달려들 것을.


“누구든…… 불러야 해. 그런데 누가……,”

마물들에게 일반적인 공격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라실리아도 알았다.

마물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단둘이었다. 그중 리얀은 오러열로 쓰러졌고, 레스칼은 황제궁에서 오늘 밤을 준비하고 있을 터였다.


‘어떻게 이렇게 기가 막힌 틈을 노렸지. 이상해…….’

계속 신경을 집중하고 있으려니 두통이 밀려왔다. 어쩌면 인간의 몸으로 마력을 쓰는 것에 대한 반동일 수도 있었다.

라실리아가 인상을 쓰며 마물들을 노려보았다.

키이익!

마물들은 라실리아가 조금씩 지치는 것을 눈치챘는지 사납게 날개를 퍼덕이며 거리를 좁혔다.


‘계속 가까워지고 있어. 어떡하지…….’

라실리아가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짚으며 상황을 살폈다.

이 거리를 유지하면서 뒤로 몸을 움직이면 문을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밖에는 근위대가……. 하지만 평범한 기사들은 마물을 상대할 수 없어.’

그렇다고 레스칼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레스칼이 온다고 해도 마물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누군가는 죽거나 다칠 것이다. 안타깝게도 황궁 안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중 태반은 궁인이었다.


‘어떻게든 돌려보내야 해.’

라실리아가 입을 열었다.

할 수 있었다. 해야 했다.

이것들을 보낸 게 마족의 힘이었으니 같은 힘이라면 돌려보낼 수 있어야 했다.


“돌아가.”

라실리아는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양손을 꾹 움켜쥐었다. 두통이 거세졌고, 몸이 파도를 탄 것처럼 어지러웠다.

그러나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 목소리지만 어딘가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느낌이었다.


“내 말을 따라. 돌아가.”

키이이익!

마물들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날갯짓이 난폭해졌지만 거리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마물들은 저들을 이곳으로 보낸 힘과 라실리아의 저항에 갇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중이었다.


“돌아가!”

라실리아가 힘을 전부 쏟아 붓는 느낌으로 소리를 질렀다.

캬우우욱!

퍼억! 챙그랑!

마물들이 한꺼번에 몸을 돌렸다. 검은 그림자 자락 같던 마물들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유리창이 깨지고 문이 박살났다.

파드드득!


“갔…… 다행,”

마음을 놓자마자 머리가 핑 돌았다. 라실리아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입가로 가늘게 피가 흘렀다.
 



* * *

간만의 꿈이었다.

꿈인데 아팠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고 몸 속의 장기들이 전부 뒤집어진 기분이었다.


-그만둬.

비늘이 돋은 손이 제 손을 잡았다.

잡았다고 하기에는 좀 애매하긴 했다. 그는 극도로 조심스럽게, 살갗이 쓸리지 않도록 잡는 시늉 정도만 하고 있었다.

새삼스럽지만 슬펐다.

지금 당장의 두통은 이 슬픔에 비하면 아무렇지 않았다.


-인간의 몸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야. 그 힘을.

죽을 정도는 아니잖아.

그 말에 금안이 일그러졌다.


-네게 이런 고통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내가 어리석었어.

그냥 살면서도 이 정도는 아플 수 있어. 나는 인간이니까.


-거짓말을 하고 있군.

그가 손을 놓았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제 손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지금이라도 그만두는 게 낫겠어. 내가 인간이 되려는 이유는 네가 있는 이곳에 머물기 위해서다. 그 대가가 네 생명이 된다면 인간의 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있어.

그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피를 종속시켜 그에게 온전한 인간의 몸을 주려는 것은 이미 제 욕심이 되었다는 것을.

당신에게는 없다 해도 내게는 있어.

다시 손을 뻗어 그가 놓아 버린 손을 힘껏 움켜잡았다.

비늘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그가 괴로운 얼굴로 놓으라고 했다.

나는 이 힘을 다스릴 거야. 그래서 당신을 내 곁에 붙잡아 놓을 거야. 평생토록.

그가 한없이 무거워진 얼굴로 말했다.


-이 힘은 위험해. 네가 이 힘을 다스리지 못하면 이 힘이 너를 잡아먹을 것이다.

그 말은 조금 우스웠다. 말 자체가 우스운 게 아니라 그가 인간처럼 그런 비유를 든다는 게 재미있었다.

어떻게 잡아먹는데?


-말 그대로.

그는 비유를 한 게 아니었다.


-마족에게는 인간과 다른 심장이 있어. 마력의 근원이 되는 심장이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지.

그래……서?


-내게서 옮겨 간 힘이 온전히 네 힘이 되지 않는 한, 이 힘은 네 생명력을 취해 스스로를 유지하려 들 것이다. 지금 네가 아픈 이유야.

아…….

피를 종속시키는 주술이 다 완성되지 않은 어느 날의 일이었다.

* * *

……톡.

이마에 무언가 차가운 게 닿았다.

감겼던 눈꺼풀이 꿈틀거렸고, 이어서 눈이 떠졌다.


“지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레스칼의 금안이었다.


“……폐하?”

“깨어났어.”

레스칼이 무너지는 것 같은 한숨을 내쉬며 제 몸을 끌어안았다.

제 무게를 떠받치는 팔은 단단했지만 어쩐지 떨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라실리아가 손을 뻗어 레스칼의 머리칼을 쓸었다. 그가 얼마나 걱정을 했을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친 데도 없고……,”

그를 안심시키려는 말을 하다 말고 라실리아가 인상을 썼다.

이상했다. 레스칼의 머리칼이 축축했다.


“폐하?”

라실리아가 레스칼을 억지로 밀어냈다. 처음에는 두 번 다시 놔주지 않을 것처럼 고집을 피우던 레스칼이 결국에는 떠밀려 주었다.

머리가 엉망이었다.

옷차림도 마찬가지였다. 찢기고 피가 묻어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황궁이 소란스러웠다.”

“어떻게요? 마물이 더 나타나기라도 했나요?”

“음.”

레스칼은 정말로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대가 쓰러져 있는 것을 늦게 알았다. ……끔찍했어.”

라실리아가 쓰러지고 나서 벌써 이틀이 지나 있었다.

황궁 안에는 이틀 동안 마물이 끝도 없이 나타났다. 마법사 길드의 모든 마법사가 불려 와 궁인들을 보호했고, 레스칼과 데칸이 마물을 상대했다.

중간에 리얀이 깨어나지 않았다면 상황은 더 심각했을 것이다.


“고된 날을 보내셨군요.”

그리고 이틀 전의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제 침대를 지켰다.

레스칼은 가능한 한 말을 아꼈지만 라실리아는 지난 이틀이 어땠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은 괜찮은 겁니까?”

“알 수 없다.”

사실 그게 더 문제였다.

마물이 어디서, 어떻게 나타나는 것인지 이틀이 지난 지금도 알 수가 없었다. 피엘리온 공작저에서 그랬던 것처럼 몸에 괴상한 문양을 새긴 낯선 자들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어느 틈엔가 나타났다. 어떻게든 없애고 나면 또 다른 곳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러기를 무려 여섯 차례였다. 라실리아에게 나타난 것까지 더하면 일곱 번이었다.

지금은 궁에 남은 사람들을 전부 보호 마법진 안에 몰아넣은 뒤 근위대가 황궁 어딘가에 있을 소환진을 찾는 중이었다. 급작스럽게 조짐도 없이 나타났으니 답은 소환진밖에 없었다.


“보호 마법진은 안전한가요?”

“딱히. 그저 마물의 존재를 알려 주는 정도야. 다른 차원의 힘이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만들기 힘들다고 했다.”

“큰일이군요.”

레스칼은 별다른 말 없이 라실리아의 손등에 이마를 꾹 눌렀다.

눈을 잘 마주치려 들지 않는 모습이 뭔가를 자책하고 있는 듯했다.


“유감입니다. 우리의 계획이 어긋나서.”

라실리아는 그를 위로할 겸, 일부러 가볍게 말을 꺼냈다.

속으로는 레스칼이 아무리 요새 내 머릿속에 그 생각밖에 없다지만, 이라면서 말을 이을 것을 상상했다.

그러나 레스칼은 뜻밖의 말을 했다.


“다행이다. 어긋나서.”

“……어, 네?”

축축하게 이마에 들러붙은 머리칼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라실리아가 깜짝 놀랐다.

다행이라니. 레스칼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내가 지닌 마족의 피를 그대가 온전히 종속하면 내 몸은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남을 것이다. 아직 그래서는 안 돼.”

레스칼이 이마를 붙이고 있던 손을 놓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린 그는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인간보다는 마족에 더 가까워 보이는, 그런 얼굴이었다.


“그 마족을 먼저 없애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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