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두 시간 전
(9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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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두 시간 전
2023.07.19.
이베트는 황족의 동침에 관한 예법 항목을 전부 훑었고, 총 여섯 명의 궁인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이 정도면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도 관련 지식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에서 노골적인 경험담을 캐묻다 보니 난처해지는 순간도 있었지만 이베트는 씩씩하게 이겨 냈다.
이건 모두 황후 폐하를 위한 일이니까.
“응응…… 그래서, 응…… 으응, 그래. 거기서 그렇다고……. 으응, 그래. ……아? 하, 그렇구나…… 아아, 알았어. 응응, 그래.”
이베트는 펜과 종이를 들고 다니며 메모까지 했다.
노골적인 단어를 순화하느라 조금 알쏭달쏭한 암호같이 되긴 했지만, 하여간 빼곡하게 적은 종이가 다섯 장이나 되었다.
지금은 막 여섯 번째 종이를 꺼내 들고 방금 전 들었던 얘기를 적어 두려던 참이었다.
“……해서 이렇게 되면 이렇게 하는 게 낫고, 거기서 만일 그게……, …….”
그렇게 중얼대며 뭐라고 계속 쓰던 중이었다.
“……어?”
어느 순간 이베트가 멍해진 눈으로 자신이 써내려간 것을 되짚었다.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더는 글자가 아니었다. 글자가 아니라 알아볼 수 없는 괴상한 문양을 그리고 있던 중이었다.
“이게…… 뭐야?”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왜 이러고 있는지.
이베트가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생각을 가다듬으려고 했다.
“거기서 이렇게……, ……아.”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손에 쥔 펜은 자꾸만 글자가 아닌 이상한 그림을 그렸다.
“왜, 왜…… 왜 이러는…… 왜……,”
이베트는 얼굴이 빨개지도록 손에 힘을 주었다. 손은 멈추지 않고 계속 무언가를 그려나갔다.
푹, 찌익.
그림을 그리다 보니 잉크가 모자랐다. 이베트가 펜촉으로 손등을 찍었다.
피가 방울져 흘렀고, 이베트는 피를 잉크 삼아 계속 그림을 그렸다.
“……다 됐다.”
종이가 알아볼 수 없는 문양으로 꽉 차게 되자 이베트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종이를 벽에 걸린 초상화 뒤쪽에 잘 감추었다.
“아직 부족해.”
멍하니 중얼거린 이베트가 다시 새 종이를 꺼내 들고 알아볼 수 없는 그림을 그렸다. 피와 잉크가 뒤섞여 검붉어지는 그림은 뭔지 알아볼 수 없어도 소름이 돋았다.
“하나 더.”
종이를 한 장 더 완성한 이베트가 또 그것을 어딘가에 숨겼다.
“하나 더.”
피가 멎어서 굳으면 상처를 헤집어 피를 더 쥐어짜 냈다. 그렇게 완성시킨 종이 일곱 장이 황후궁 구석에 숨겨졌다.
이베트가 멋도 모르고 그린 괴이한 문양은, 하스데야가 머무는 공간을 이루는 결계를 긁어 낸 것처럼 닮아 있었다.
* * *
시간은 계속 흘렀고, 이베트는 아직 소식이 없었다.
라실리아는 점점 쌓이는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슈라이든 공녀가 너무 늦어.”
“삐이?”
라실리아의 곁에서 꼬박꼬박 졸고 있던 피피가 고개를 훌쩍 들어 올렸다.
“일이 생각보다 어려운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네.”
“삐?”
자신이 가서 이베트를 불러올지 물었다.
“으음…… 글쎄.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잘 모르겠어.”
라실리아가 벽시계를 힐금 바라보았다.
레스칼이 오기로 한 시간은 아홉 시였다.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이었다. 식사는 함께 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은 도무지 레스칼의 얼굴을 보며 뭘 먹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하여간 그 전까지, 그러니까 앞으로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식사를 마치고 목욕을 한 뒤 잠옷까지 갈아입어야 했다.
머리도 빗어 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동침에 관한 예법도 알아 두어야 했다.
이베트가 늦는 것은 그만큼 알아야 할 게 많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었다.
그러니까 더 기다려야 하는 걸까.
“한 시간 정도는 더 기다려 보는 게 좋을까?”
어차피 긴장이 식욕을 잊게 했다. 식사는 거르면 되고 목욕은 혼자서도 할 수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삐이?”
피피가 자기도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 그럼 제가 가 보고 올까요?”
대답은 엉뚱하게도 창문 쪽에서 들려왔다.
“…….”
창문으로 다가간 라실리아가 피식 웃었다.
창틀에 앉아 고개를 빼끔 내밀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도 리얀이었다.
“나는 경이 옆방에 있는 줄 알았는데.”
“가끔 바람이 쐬고 싶어질 때도 있어서요. 아, 혹시 언짢으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자면 대화가 들리는 건 당분간은 어쩔 수가 없겠습니다. 청력이 유감스러울 정도로 너무 좋아져서요.”
청력뿐 아니라 오감이 전부 그랬다. 리얀도 종종 곤란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제 입은 믿으셔도 좋습니다, 황후 폐하. 불사조님과 무슨 말씀을 나누시건 간에 절대 허락 없이 제 입 밖으로 나갈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건 경의 말을 믿도록 하지. 그리고 슈라이든 공녀는……. ……경이 나서지 않아도 돼.”
말이 끊어지는 짧은 틈을 타 볼이 살짝 붉어졌다.
“앗, 그 정도 일은 시키셔도 됩니다. 깜짝 놀라실 정도로 빠르게 다녀오겠습니다.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이제 두 시간도 안 남은 것 같은데요.”
“아니, 그래서가 아니라……. ……잠깐, 뭐라고?”
“시간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습니까?”
리얀이 정말 몰랐다는 얼굴을 해서 라실리아가 더 난처해졌다.
“시간을…… 그러니까 폐하께서 오신다는 걸…… 다들 알고 있는 건가?”
“모를 수가 없는 일이라서요. 황제궁이 하도 소란스러워서.”
“…….”
라실리아가 귀 끝이 붉어진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그렇긴 하겠지. 폐하를 시중드는 사람들만 알게 되어도…….”
“네. 그리고 황제궁의 시종장 페르손 공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합니다.”
“…….”
리얀이 위로랍시고 이런 말을 덧붙였다.
“황후궁이 상대적으로 조용한 건 아마도 지금 시녀가 한 명밖에 없어서 그럴 겁니다. 여덟 명이 전부 남아 있었으면 황제궁이 비할 바가 아니었겠지요.”
“…….”
잠시 시선을 피하며 왠지 모를 부끄러움을 수습하던 라실리아가 다시 시계를 쳐다보았다.
“슈라이든 공녀가 필요한 시간이긴 해.”
“그럼 다녀올까요?”
리얀이 비좁은 창틀이라는 공간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는 것처럼 가뿐하게 몸을 일으켰다.
“……엇?”
분명히 가뿐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리얀은 스스로도 어이없이 균형을 잃고 삼 층 아래로 떨어졌다.
“으엇!”
“시그레스 경!”
“삐잇!”
라실리이와 피피가 다급히 창문 너머로 몸을 굽혔으나 리얀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창틀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이럴 수가…… 피피! 가서 시그레스 경이 어떤지 보고 와 줘.”
“삣!”
피피가 잽싸게 아래로 날아갔다.
잠시 후 황후궁을 둘러싼 회양목 덤불 사이에서 리얀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저는 무사합니다, 황후 폐하!”
“뭐……?”
라실리아가 눈을 깜박였다.
“삐이?”
리얀의 주변을 날고 있는 피피도 마찬가지였다.
리얀은 전혀 무사해 보이지 않았다. 지금 리얀의 온몸에는 보라색 오러가 뒤죽박죽 날뛰고 있었다.
“정말입니다. 다친 데는 한 군데도 없는데…… 그것 참, 이상하네요?”
리얀이 어딘지 모르게 멍해 보이는 얼굴로 제 몸에서 끓어 넘치는 오러를 살폈다.
“왜 이렇게 어지럽고 몸은 말을 안 듣고…… 어어, 이러는 걸까요?”
“삐잇!”
리얀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황실 근위대가 한둘씩 달려왔다.
마침 그중에는 세르벤도 있었다.
“우어, 이게 뭐야.”
세르벤은 리얀에게 함부로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채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이거 혹시…… 말로만 듣던 오러열이야?”
“응? 그게 뭔데? 그런 게 있어?”
“오러가 발현되면 몸에 자리 잡기 위해서 오러열이 한 번은 난다고 했어. 들어본 적 없냐?”
리얀이 입을 벌렸다.
“없어……. 뭐 그런 거지 같은 게 다 있어? 아니, 그리고 왜 이제 와서? 발현한 그 날도 아니고?”
“난들 알겠냐. 네가 몸 생각 안 하고 오러를 펑펑 써대니까 무리가 됐던 거 아냐?”
“나 참. 오러 주제에 뭘 그렇게 따지고 들어. 펑펑 써대라고 발현된 거 아냐?”
“다시 말하지만, 난들. 오러가 발현된 적이 있어야 알지.”
“씨, 그럼 언제까지 이런,”
“열이 내릴 때까지.”
“아니, 나는 지금 슈라이든 공녀를……,”
……쿵!
거기까지 말한 리얀이 갑자기 쓰러졌다.
“으아앗!”
“삐잇!”
오러가 출렁이는 바람에 주변은 난리도 아니었다. 땅이 들썩대고 나무가 흔들리더니 옆으로 홱 쓰러져 뿌리를 드러냈다.
근위대는 쓰러진 리얀을 옮기기는커녕, 가까이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근위대가 참 난감하다는 눈으로 세르벤에게 물었다.
“저, 그럼……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턱을 괴고 고민하던 세르벤이 결단을 내렸다.
“그냥 놔둔다. 저건 아무도 못 건드려.”
“네? 곧 밤이 될 텐데요?”
“소드 마스터가 밤이슬 좀 맞았다고 죽진 않겠지.”
“아, 그건 맞는 말입니다.”
리얀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근위대가 조심조심 뒷걸음질로 주변을 벗어났다.
“삐이이.”
다시 날아온 피피가 아래서 벌어진 일을 알려 주었다.
“저런……. 이불이라도 덮어 줘야 하지 않을까?”
“삐이.”
“이불이 무사할지 모르겠다고? 그런가.”
라실리아가 안쓰러운 얼굴로 리얀이 누워 있는, 엉망이 된 정원을 바라보았다.
“열이 빨리 내려야 할 텐데.”
“삐이이?”
피피가 이베트를 어떻게 할지 물었다.
“아, 그러게. 이젠 정말 시간이 없어.”
라실리아가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그럼 부탁할게, 피피. 슈라이든 공녀를 찾아서 데려와 줘. 나는 목욕을 하고 있을게.”
“삐!”
“응. 욕실로 곧장 와 달라고 해. 아, 오늘 입을 잠옷을 골라서.”
“삐이.”
“고마워.”
“삣.”
피피가 후다닥 날아갔다.
“아, 정말 시간이 없어.”
라실리아가 혼자서 욕실로 향했다.
창밖으로는 노을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벌써 밤에 더 가까운 시간이었다.
리얀의 말에 의하면 난리가 났다는 황제궁에서는 레스칼이 벌써 목욕을 마치고 머리 손질을 하는 중이었다.
아침도 아니고, 성장을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페르손은 이발사를 네 명이나 불러 왔다. 시종들은 오늘 밤 레스칼이 입을 옷을 고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다들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지만 정신이 없는 저녁이었다. 그 와중에 리얀이 오러열로 쓰러졌다는 소식은 레스칼의 귀에 닿지 못했다.
아홉 시를 앞두고, 라실리아의 곁에는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던 공백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