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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오늘 밤에는 (2) (91/96)


91. 오늘 밤에는 (2)
2023.07.16.


풍덩!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호수 한복판이었다.

에셀리온은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채 일단 티온과 예니온을 끌어당겼다.

티온은 부상을 입었고 예니온은 눈을 가린 채였다. 둘 다 수영은 무리였다.


“전하, 바, 방향을 일러 주시면……,”

“시끄럽다. 힘이나 빼고 있어.”

두 사람을 가장자리까지 끌고 간 에셀리온이 티온의 몸을 먼저 받쳐 뭍으로 기어오르게 했다. 방향을 잡은 예니온이 스스로의 힘으로 물을 빠져나갔다.


“…….”

그때야 비로소 찬물의 온도가 느껴졌다.

젖은 옷이 살갗을 스칠 때마다 피부가 조금씩 베이는 것 같았다.


“전하!”

예니온이 물속에 남은 그를 다급히 끌어올렸다. 에셀리온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호수를 빠져나갔다.


“후아, 후. 여기가 대체 어디입니까?”

티온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물었다. 티온의 가슴팍에는 거칠게 뜯겨나간 것 같은 심각한 상처가 나 있었다.

레스칼이 변이한 손으로 그를 집어 내팽개친 결과였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살갗을 찢어 놓은 상처는 붉은 손톱의 흔적이었다.


“글쎄……. 나도 모르겠다.”

“그럼, 후, 전하께서 이곳으로 저희를 이동시키신 게 아닙니까?”

“아니야. 이동 스크롤은 하나뿐이었다.”

“그럼 대체……,”

그때까지 말이 없던 예니온이 나섰다.


“일단 너는 말을 하지 않는 게 낫겠어.”

예니온이 티온을 붙들어 바닥에 눕게 만들었다. 티온이 끙끙대면서도 누웠다. 아닌 척해도 눈앞이 핑핑 돌고 있을 것이다.


“전하께서는 짐작 가는 바가 없으십니까?”

에셀리온이 미간을 찡그렸다.


“……전혀.”

없었다.

그 상황에서는 그들을 도울 존재도, 방법도 없었다.

마족의 피를 이었다는 제국의 황제는 미친 괴물이었고, 갓 탄생한 소드 마스터는 지칠 기색이 없어 보였다.

델라르타의 예언자는 더 이상 자신이 예언자가 아니라 했다. 델라르타로 돌아가자는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에셀리온도 알지 못했다. 제 손으로 검을 놓고 목숨을 구걸해야 한다는 선택지 외에는 없어 보였다.

그 와중에 갑자기 그림자가 그들을 집어 삼켰다. 그리고 어딘가로 옮겨 왔다.

기분 나쁜 예감처럼 두통이 일었다. 분명히 자신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는데 머릿속을 긁어대는 두통이 사실은 알고 있노라고 속삭여대는 듯했다.


“전하께서 갑자기 예언자님을 모셔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제국의 지원도 마다하시고요. 갑자기 생각이 바뀌신 것과는 연관이 없는 겁니까?”

예니온이 예리하게 두통 사이를 파고들었다.


“내가 생각을 바꾼 것은,”

에셀리온이 예니온의 가려진 눈을 피해 변명을 찾던 순간이었다.

스르륵.

마침 에셀리온이 눈을 돌린 방향이 호수 쪽이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수면 위에 기이한 파문이 생겨났다.


“…….”

에셀리온의 시선이 그 파문에 들러붙었다.


“전하……?”

뭔가 이상하다 느껴졌는지 예니온이 에셀리온을 불렀다. 그러나 에셀리온의 귀에는 예니온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다.

그는 지금 다른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제가 하는 말을 문자 그대로 들으면 안 됩니다.

라실리아의 목소리였다.

라실리아는 이번에도 울고 있었다.


-황제가 곁에 있으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왜 저렇게 우는 것일까.

저렇게, 미칠 것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부디 나를 저버리지 말아요. 나는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길 원합니다.

라실리아가 있어야 할 곳. 이제는 예언자가 아니라면 그곳이 어디일까.


-나를 사랑하는 이의 곁에 있게 해 줘요.

“……랑하는 이의……,”

 

 


“전하!”

첨벙!

갑자기 덮쳐 오는 물소리가 에셀리온을 흔들었다.

예니온이 제 팔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었다.


“왜 이러십니까, 전하!”

“아……,”

예니온 덕에 에셀리온은 자신이 물에 뛰어들 것 같은 자세로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물속에 뭐가 있는 겁니까? 뭘 떨어트리기라도 하신 겁니까?”

“…….”

에셀리온은 끝내 답을 하지 못했다.
 

* * *



“워, 이렇게 간단할 수가.”

미끈한 청년의 얼굴을 한 하스데야가 손바닥을 부딪치며 웃었다.


“의식을 빼앗는 것보다 훨씬 더 쉽잖아. 그때는 마력이 지금의 두 배는 더 소모되었던 것 같은데.”

히죽 웃음이 입꼬리를 늘렸다.


“뭐, 잘된 일이지. 앞으로 두고두고 부려먹을 수 있을 테니.”

에셀리온 일행을 도피시킨 것은 하스데야였다. 한번 꿈으로 연결이 되자 마치 길을 하나 뚫어 놓은 것처럼 다시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제 마력이 조금씩 늘어나는 탓도 있겠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델라르타의 왕자에게는 빈틈이 있었고, 그만큼 쉽게 자신이 파고드는 것을 허용했다.

거짓 꿈이 보여 주는 대로, 그 여자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한 델라르타의 멍청이는 앞으로도 유용하게 바하무트의 신경을 거스르는 역할을 해 줄 것이다.


“바하무트를 귀찮게 하려면 놈에게도 세력을 만들어 주는 게 좋겠는데. 뭘 어떻게 하면……. 아, 가만.”

뭔가가 떠올랐던 하스데야가 손짓을 멈췄다.


“두 번째는 연결이 쉽다고?”

자신이 한 말을 되짚던 하스데야가 갑자기 펄쩍 뛸 것처럼 반색을 했다.


“그 여자 옆에는 이미 연결이 되었던 것들이 있잖아!”

그 여자의 시녀와, 기사 하나가 있었다.

그 여자의 힘으로 의식을 되찾았지만 그들의 존재는 제게도 각인이 되었을 것이다.


“어디, 이렇게 되나 볼까.”

하스데야가 고개를 치켜들고 양손을 모은 채 손가락을 움직였다.
 

* * *



“……네, 황후 폐하?”

툭, 덜컹!

이베트가 새로 가져온 찻잔 뚜껑을 떨어트렸다.


“아, 맙소사. 이런 실수를……!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송구합니다!”

입으로는 열심히 말을 했지만 이베트는 누가 봐도 정신이 없어 보였다.

사실 그건 라실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천천히 하도록. 급한 일은 아니니까.”

“예, 예. 황후 폐하. 급한 일이 아니…… 아니, 아니. 급한 일 아닌가요?”

몇 번 헛손질 끝에 찻잔 뚜껑을 집어 드는 데 성공한 이베트가 울상을 지었다.


“오늘 밤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럼 급한 일이 맞는 것 같은데……,”

“밤은 아직 멀었으니까.”

라실리아가 차분한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그래 보이는 것뿐이었다. 레스칼이 오기 전 따라 두었던 차는 다 식었을 뿐 아니라 향도 날아가 그냥 차고 떫은 물과 다를 바 없었지만, 라실리아는 맛도 모른 채 차를 꿀꺽 삼켰다.


“차갑지 않으세요, 황후 폐하?”

뒤늦게 찻잔에서 김이 오르지 않는 것을 눈치챈 이베트가 조심스레 물었다.

따듯한 차를 마실 때처럼, 다 식은 차를 후후 불고 있던 라실리아가 조금 민망한 얼굴이 되었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라실리아가 공연히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그러게. 다 식었네.”

“네에……. 그렇죠. 한참 됐으니까요.”

“응, 그러게.”

“그러니까요.”

“…….”

“…….”

새로 차를 따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치맛자락을 만지작대던 이베트가 마음을 굳힌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알겠습니다, 황후 폐하.”

이베트와 비슷한 자세로 있던 라실리아가 당황으로 살짝 뺨을 붉혔다.


“그게…… 반드시 따라 달라는 뜻은 아니었다. 공녀가 불편하다면,”

“아니요, 황후 폐하. 생각해 보니 제 일이 맞습니다.”

이베트가 비장하게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그러니까 황후 폐하께서는 동침에 관한 예법을 아무것도 모르고 계신 거잖아요. 그게 맞지요. 네, 저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덜컥 날짜를 정하고 보니 아는 게 없었다.

말로는 예법을 모른다고 둘러댔지만 정확히는 동침이 뭔지도 제대로 몰랐다.

델라르타의 예언자와 제국의 공작 영애가 아주 다른 삶을 살아왔다는 게 이런 데서 드러났다.


“보통 그런 건, 음…… 혼인 전에 배울 거예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어머니나 친지들로부터 배울 테지만 귀족들은 여성 가정교사를 고용하기도 한대요. 그런…… 예법만 배우기 위해서요.”

“그렇겠군.”

“만약 황후 폐하가 되실 분이 그런 교육을 받을 기회를 놓쳤다고 한다면…… 그럼 시녀 분들이 알려 주시지 않을까요?”

“그런……가?”

이베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제가 황후궁의 제1시녀입니다. 마땅히 제가 할 일이 맞습니다.”

치맛자락 사이로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쥔 이베트가 결연하게 말했다.


“잠시만 제게 시간을 주세요, 황후 폐하. 제가 어떻게 해서든 알아 오겠습니다. 황실 예법서를 뒤져 보면 동침에 관한 부분도 분명히 있을 거예요.”

라실리아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런 거면 그냥 내게 예법서를 가져다줘도……,”

“듣기로는 예법이 다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책으로는 말하지 않는 것도 많고, 또 많이 다르기도 하다고요. 아는 궁인들에게 자문을 구하겠습니다. 가능한 한 자세하고 정직한 지식을 얻어 오겠어요!”

이베트가 벌떡 일어나 유난히 정중한 인사를 했다. 온몸에 힘이 불끈 들어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황후 폐하!”

이베트가 씩씩한 걸음걸이로 사실을 떠났다.

라실리아가 괜히 차가워진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이상하게 어렵네.”

“삐이이.”

어디선가 피피가 나타났다.

설탕 단지의 별 장식을 밟고 선 피피가 어려우면 하지 말라고 했다.


“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잖아.”

“삐?”

“그리고 이상한데. 너는 왜 말리는 거야? 결국 필요한 일이잖아. 그렇기에 처음부터 한 쌍으로 태어난 거고.”

“피이이. 삐이. 피이 삐.”

말이 길었다. 짧게 줄이자면 피가 종속되고 난 뒤 레스칼이 얼마나 더 꼴값을 떨어댈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라실리아가 피피의 부리 끝을 가볍게 톡 쳤다.


“그 말은 너무하잖아. 그리고 음, 지금과 많이 달라질 것 같진 않아.”

“삐!”

그건 모르는 일이라고 소리치며 피피가 방 안을 붕붕 날아다녔다.

그런 걸 보면 피피도 꽤 많이 자랐다. 처음 태어났을 때는 날지도 못해서 일일이 손으로 옮겨 줘야 했다.


‘피피가 저만큼 자랐다는 게 그 사람과 나의 사이도 그만큼 달라졌다는 뜻 같아.’

그러니 오늘 밤도 당연한 일이 맞았다.

자라는 것을 말릴 수 있는 법은 없었으니까. 피피는 성체가 될 때까지 하루가 다르게 계속 자랄 것이고, 반려의 운명도 그럴 것이다.


“피피.”

“삐이?”

라실리아가 부르자 피피가 다시 날아왔다. 손바닥을 내밀자 그 위에 얌전히 앉았다.


“네가 내게 어떤 존재인지, 나는 이제 알아.”

“삐이이.”

심장에서 태어난 피피가 어째서 불사조가 된 것인지도 알았다.

영원히, 반려를 지키기 위해. 꺼지지 않는 불꽃의 형태로 깨어났을 것이다.


“이제는 내가 네게 어떤 존재인지, 네가 알게 될 차례야.”

“삐이…….”

피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슴털을 부풀렸다. 전혀 닮지 않은 레스칼과 피피가 가끔 아주 똑같아 보일 때가 있었는데, 지금이 그랬다.

라실리아가 웃으며 피피에게 대고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오늘 밤은 방해하지 마.”

 

밤은 아직 멀고도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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