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오늘 밤에는 (1)
(9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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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오늘 밤에는 (1)
2023.07.12.
“……내가 얌전히 이렇게만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입술이 목에 닿아 말을 할 때는 진동이 먼저 느껴졌다.
“박쥐가 그저 박쥐라는 것을 알았어도 손을 늦출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마물로 변해 버릴 것 같았어. 새벽에 그대에게 돌아왔을 때, 나는 몹시 예민하고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대가 사라졌음에도 주술이나 마법이 반응하지 않을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런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아.”
“궁에는 저를 지키는 사람이 많,”
“그런 상황이니까 계속 확인하려고 들었을 거야. 멈추지 못했겠지.”
스륵, 입술이 움직였다.
레스칼의 두 손이 제 양손을 덮었다. 라실리아가 손가락을 꾸물대자 그는 손을 벌려 손가락을 전부 얽었다.
“가뜩이나 나는 연습을 하자는 그대의 허락에 정신이 나간 상태이기도 하고.”
“그,”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고. 얼마나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고.”
“…….”
입이 막힌 것도 아닌데 왠지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그대가 안 된다고 할 때까지 계속 확인했을 것이다.”
스륵.
레스칼의 입술이 계속 살결을 따라 내려왔다.
라실리아 역시 언제 안 된다는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을 움직였다.
라실리아의 손가락이 얽혀 있는 제 손가락을 쓸자 레스칼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래서 제가 안 된다고 하며 화를 낼 것 같았나요?”
“아니.”
살결에 남는 진동이 몹시 수상했다. 라실리아는 지금껏 이런 감각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안 된다는 그대의 말을 내가 듣지 않아서 화를 낼 것 같았어.”
어쩐지 그 말이 우스워서 라실리아가 잠깐 웃었다.
“그 전에 말을 들었으면 될 텐데요.”
“말했잖아. 그럴 수 없었을 거라고.”
레스칼이 한 손을 풀었다.
눈을 떼지 않은 그가 자유로워진 한 손으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머리칼이 넘어가고 얼굴이 전부 드러나자 입을 맞출 것처럼 입술을 가져왔다.
하지만 아직 키스로 이어지진 않았다.
레스칼은 입술에 입술을 맞닿게 한 채 속삭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나는 그대가 내게 화를 낼 것 같아. 내가 키스를 하고 나면.”
원래 입술 위에 내려앉는 숨결이란 이렇게 복잡한 걸까. 처음에는 따사롭고 간지러웠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 점점 온몸을 간지럽게 했다.
라실리아는 목이 마르는 기분에 입술을 혀로 적셨다.
“키스는 전에도 해 봤는걸요.”
“지금은 달라.”
“어째서……요.”
“그땐 연습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연습이라는 말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무얼 위한 연습이냐가 문제였다.
“키스만으로 끝날 게 아니잖아. 그래서도 안 되고.”
여전히 키스는 이어지지 않은 채, 레스칼이 머리칼을 젖혀 목덜미가 드러나게 했다. 좀 전까지 제 입술이 미끄러지던 그 살갗이었다.
금안이 천천히 움직여 제 입술이 그리던 궤적을 좇았다.
눈짓이 멎었을 때, 레스칼은 한 손을 라실리아의 뒷목으로 가져갔다.
손이 느리게 뒷목의 살갗을 쓸었다.
“이 다음에 할 일을 알려 줘. 이제 무얼 연습해야 하는지.”
“그건…… 저도 모른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도 모른다.”
그 말은 왠지 모순 같았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멈출 수 없어서 제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이 다음을 알고 계신 게 아닌가요?”
“몰라. 내가 아는 건,”
말이 잠시 끊어졌다.
레스칼이 입술을 핥았기 때문이었다.
“이 드레스의 단추를 풀고 싶다는 것이다.”
“…….”
단추를 풀면 옷이 벗겨질 것이다.
“그대가 말하는 연습에 그것도 포함되나?”
그래서 답이 곤란했다.
라실리아는 점점 더 현란해지는 레스칼의 얼굴에서 잠시 눈을 뗐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어쩌면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도 몰랐다.
“……네. 그것도 포함이 되는 것 같아요.”
순간 금안에 번쩍 불꽃이 이는 것 같았다.
“그럼,”
“그래서 지금은 아닙니다.”
라실리아가 레스칼의 손을 잡았다. 레스칼은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았는데, 순순히 손을 내어 주었다.
“지금은 왜?”
“지금은,”
“삐이!”
때를 맞춘 듯 피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실리아가 고개를 홱 돌려 피피를 찾았다.
어느 순간부터 두 사람은 피피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정확히는 레스칼이 멈출 수 없었을 거라고 하면서 라실리아를 소파에 눕혔을 때부터였다.
“삐이이!”
맞은편 소파 밑에서 피피가 퉁퉁 부은 볼을 한 채 기어 나왔다.
“삐이이, 삐이.”
어떻게 자신이 있는 걸 까맣게 잊을 수가 있냐는 투정이었다. 덕분에 보고 싶지 않은 걸 봤다고 했다.
민망해지는 건 라실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거기 있다는 걸 좀 더 빨리 알려 줬어도 됐잖아. 나는 네가 진작 나간 줄 알았어.”
라실리아가 그런 말을 하자 피피가 울컥 성질을 부렸다.
“삐이! 삣삣!”
레스칼이 무슨 짓을 더 할 줄 알고 나가겠냐고 했다. 레스칼의 말대로 라실리아가 화를 낼 땐 자신이 냉큼 나와서 거들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래, 알았어.”
“삐이이! 이이잇!”
피피가 계속 투덜대자 레스칼이 피피의 꼬리를 홱 잡아 옆으로 밀어냈다.
“지금은 왜 안 된다고?”
“폐하. 피피가 다칠 수도 있습니다. 피피, 괜찮아?”
피피의 대답을 레스칼이 가로챘다.
“새는 멀쩡하다. 다칠 만큼 거칠게 다루지 않았어. 그리고 왜 안 된다고?”
레스칼은 답을 꼭 들어야겠다는 듯 집요했다.
“오해할까 봐 다시 말하지만 나는 지금 꼭 연습을 하자는 게 아니야. 이유가 궁금한 것이다. 제안을 한 건 그대였지만 안 된다고 하는 것도 그대야. 혹시 그사이 마음이 변했다면 내가 알고 있어야 하니까.”
레스칼의 문제는 라실리아의 말을, 그게 아무리 사소하다고 해도 전부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이었다.
이제 조금씩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남자에게는 아직도 새로 알아 가는 사실들이 있었다.
그게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 드는 것도, 자신이 레스칼에게 유독 마음이 약해진다는 증거 같았다.
“지금은 일단 피피가 있고요.”
“삐이.”
피피가 부리를 비죽대며 날아왔다. 방금 레스칼이 잡아당긴 꼬리가 너무너무 아프다고 엄살을 부려댔다.
라실리아는 피피가 내미는 꼬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곧 슈라이든 공녀가 새 찻주전자를 들고 올 거라서요.”
“오지 말라고 미리 말을 해 두면?”
레스칼은 연습을 계속 하자고 우기는 게 아니었다. 라실리아의 생각이 여전히 같은지 묻는 것이었다.
“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제가 싫습니다.”
“왜? 나보다 공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좋은 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도, 레스칼이 너무 진지하기 때문이었다.
“폐하.”
라실리아가 피피의 힐긋 본 다음 레스칼을 향해 고개를 숙여 달라는 손짓을 했다.
“삐이, 이?”
피피가 갑자기 귓속말을 하는 건 치사하다고 난리였지만 라실리아는 레스칼의 귀에 입술을 댔다.
“저는 사실 더 서둘러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뭐를?”
“연습을.”
레스칼이 주춤 굳은 채 라실리아를 응시했다.
방금 들은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하려는 눈동자가 부산히도 흔들렸다.
“저를 해치려고 드는 마족에게는 의도가 있을 겁니다. 그건 아마도 피의 종속을 방해하려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건…… 지금 시점이라면 가장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던 레스칼이 다급히 덧붙였다.
“하지만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내 머릿속에 그 생각밖에 없어서 그대 생각에 동의하는 건 아니야. 그대의 짐작이 맞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라실리아는 묘한 지점에서 허둥대는 레스칼이 사랑스러웠다.
“네. 그러니 가능한 한 빠르게…… 사실 연습보다는 진짜 종속이 필요할 겁니다.”
“그러…… 아, 잠깐.”
레스칼이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추었다. 손 밖으로 드러나는 눈가의 피부가 미세하게 붉어졌다.
“폐하? 왜 그러시나요?”
“아니, 좀……. 정신을 차려야 하니까.”
“어디가 안 좋으신가요?”
“그럴 리가.”
“그럼……?”
이상하긴 피피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피피도 가슴 쪽의 솜털 같은 깃털을 부풀리더니 숨쉬기가 힘들다며 괜히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그대가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한 이유를 알겠어.”
한참 만에 레스칼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면 못난 꼴을 보일지도 몰라.”
레스칼이 좀 이상한 짓을 한다고 해도 사실 저 외모 덕에 우스꽝스러워질 일은 없을 것이다.
라실리아가 레스칼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럼 동의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레스칼이 눈과 이를 동시에 질끈 물었다.
“그럴 리가.”
“언제가 좋을까요?”
“……. 가능한 한 빠르게. 그대가 말한 대로.”
“그러니까, 언제?”
눈꺼풀 너머에서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한참만에야 레스칼이 느릿느릿 입술을 열었다.
“오늘 밤……이라고 하면, 내가 너무 미친놈처럼 보일까?”
순간 당황했다. 오늘 밤은 너무 급작스러운 느낌이었다.
“오늘 밤……은 너무 이를 것 같긴 한데……,”
“역시.”
레스칼이 다시 눈을 떴다.
표정이 묘했다. 다시 차분한 무표정이 된 것 같기도 했고, 그 와중에 눈꼬리가 아래로 처진 것 같기도 했다.
“날짜는 그대가 정하는 게 좋겠어. 오늘 밤이 아니라고 하니 오늘 새벽이나 내일 아침이라는 말밖에 안 떠올라.”
“…….”
오늘 새벽이라면 뭔가 달라질까.
내일 아침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다못해 시간이라도 밤인 게 좋을 텐데, 레스칼에게 시간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나도 잘 모르겠어.’
내일 밤이라고 하면 좀 더 나은 걸까. 모레 밤이라고 하면 급하다는 마음이 들지 않게 될까.
‘……그러면 또 똑같잖아.’
결국 같은 일을 계속 미루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오늘 밤으로 해요.”
라실리아가 마음을 먹었다.
“……쿨럭!”
레스칼이 갑자기 헛기침을 했다. 아니, 헛기침이라고 하기엔 너무 과격했다. 숨을 잘못 들이쉰 모양이었다.
라실리아가 기침하는 레스칼의 등을 쓸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별로 안 괜찮……,”
“그럼 내일로 미루지요.”
“괜찮아.”
거짓말처럼 기침이 딱 멎었다. 레스칼은 이를 악물고 기침을 참았다.
“오늘 밤.”
“네, 오늘 밤.”
두 사람의 표정이 비슷해졌다. 둘 다 굳은 결심을 한 것처럼 경직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제 저 얼굴에서는 칼을 꽂고 돌아서는 차갑고 잔인한 표정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엇비슷한 무표정이라고 해도 지금 라실리아의 눈에는 반려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자신의 운명으로 보였다.
‘피가 종속되면 마족이 말한 종말 같은 것도 없을 거야.’
레스칼은 이대로 온전히 인간이 되고 신이 보여 주신 제 죽음은 달라질 것이다.
라실리아는 충동적으로 몸을 일으켜 레스칼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이제 이베트가 필요한 시간이었다.
라실리아가 아는 한 황실의 예법과 기타 등등의 일에 대해 가장 해박한 지식을 가진 이가 이베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