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연습 시간
(89/96)
89. 연습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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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연습 시간
2023.07.09.
“쳇.”
리얀은 결국 사실을 나왔다.
말이 그렇지 쫓겨난 것에 더 가까웠다.
“……쳇.”
리얀은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을 최소한의 거리를 둔 채 복도 쪽 창틀에 걸터앉았다.
“공정하지 못해.”
어쩌다 혼잣말을 내뱉고 보니 본심이 튀어나왔다.
그래, 폐하는 공정하지 않았다. 공정이라는 말을 아예 모르는 사람 같았다.
황후 폐하의 밤을 독차지하는 사람은 폐하였다. 그럼 낮에는 좀 다른 사람하고 있어도 되는 게 아닐까.
꼭 저렇게 있는 대로 눈치를 줘서 제 발로 나가게 만들어야 하는 걸까.
어제 자신이 때려잡은 박쥐 숫자만 세어도 폐하께서는 상을 내리셔야 마땅했다. 이렇게 매정히 내쫓는 건 너무 야박했다.
“아직 자랑도 다 못 했는데.”
사실 이건 리얀도 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긴 했는데, 소드 오러를 얻은 뒤로 이상하게 자꾸만 핑계를 만들어 라실리아의 곁을 얼쩡대고 싶어졌다.
소드 오러 사이로 그 보라색 눈동자를 보는 게 좋았다. 제 눈에는 한없이 비슷한 색깔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뿌듯하기도 하고 뭔가 좀 감격스럽기도 하고 그랬다.
“뭐가 공정하지 못한데?”
갑자기 발치에서 세르벤의 목소리가 불쑥 솟구쳤다.
별로 놀랍진 않았다. 세르벤이 벽을 기어오르는 기척을 진작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런 게 있어.”
리얀이 자세를 바꾸는 일 없이 심드렁하게 말하자 세르벤이 혀를 찼다.
“이젠 놀라는 척도 안 하네.”
“안 놀랐으니까. 어쩐 일이야? 바쁘신 몸이.”
그 말에 세르벤이 창틀을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린 채 울상을 지었다.
“너무한 거 아냐? 네가 황후 폐하의 개인 호위를 자청하는 바람에 내가 바쁜 몸이 됐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나도 농땡이 정도는 칠 수 있다고.”
“정신 빠졌군. 지금 황성 경비 총괄 책임자 입에서 농땡이라는 말이 나온 게 사실이야? 어디서 그런 썩어빠진 소리를 하고 있는데. 당장 돌아가지 못해?”
리얀은 일부러 짓궂은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었다.
어이가 없어진 세르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너 지금…… 대단히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고 있다는 거, 알고는 있냐?”
“경비에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가 어딨어. 그만 떠들고 돌아가라니까. 아니면 내가 내려가게 해 줘?”
저 내려가게 해 준다는 말이 왠지 손가락을 우드득 밟아 저 아래로 떨어지게 만들어 준다는 소리 같아서 세르벤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아니, 좀. 진짜 잠깐만 쉬자. 그러는 너도 지금 농땡이 아냐?”
“웃기는 소리 마. 짜증나니까.”
리얀이 진심으로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일 분 일 초도 쉬지 않고 황후 폐하를 호위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야.”
“그런데 왜 지금 내 눈에는 농땡……,”
“닥치라고.”
슷!
리얀이 손에 들고 있던 검을 거꾸로 들어 장난처럼 세르벤이 매달려 있는 창틀 바깥쪽을 그었다.
다시 말하지만 검의 손잡이 쪽이었고, 힘을 들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서걱!
“읏!”
그러나 창틀 일부가 잘려 세르벤은 하마터면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한 손으로 매달린 세르벤이 허옇게 질린 채 아예 창문을 넘어왔다.
“인간적으로 너…… 소드 마스터씩이나 됐으면 오러를 쓸 때 상대방한테 알려 주는 게 예의 아니냐? 약자에 대한 배려, 뭐 이런 거 있잖아.”
“약자라는 걸 알면 입 놀릴 때 좀 조심하지 그래?”
세르벤이 고개를 내저었다.
“입이 험해지는 걸 보니 진짜 기분 나쁜 모양이네. 대체 무슨 일로 그러는데?”
“알 거 없……, ……젠장.”
세르벤을 무시하려던 리얀이 마음을 바꾸었다. 그랬다는 걸 세르벤이 기막히게 알아차렸다.
“왜, 뭔데.”
“……황후 폐하 말이야.”
“응. 황후 폐하께서?”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음……?”
세르벤이 고개를 갸웃댔다.
“그건 뭐, 반어법인가? 여덟이나 되는 시녀를 다 내보내신 뒤 시중드는 사람은 제1시녀 한 명만 딱 두고 계신 분인데?”
“아, 그런가?”
“그렇지.”
이번에는 리얀이 고개를 갸웃댔다.
“그런데 왜 나하고 단둘이 계시는 시간은 이렇게 없지? 생각해 봐. 너하고 내가 폐하의 개인 호위일 때. 그때는 지겹도록 폐하의 얼굴만 보고 있지 않았어?”
“그때는 폐하께서 황후 폐하를 찾으시는 일이 없었으니까.”
“아, 그렇지. 그랬어.”
리얀이 입꼬리를 삐죽였다.
“지금 황후 폐하는 진짜시니까. ……음, 그래도 역시 공정하지 못해.”
세르벤이 잠시 눈치를 보더니 물었다.
“리얀. 그 공정하지 못하다는 게 혹시 폐하를 두고 하는 말이야? 네가 별로 예법에 엄격한 인간은 아니라는 건 알지만 말이야, 그래도 폐하께 그러는 건 불경 아닐까?”
리얀이 레스칼은 그 정도 말을 들어도 된다는 듯 코끝을 실룩여댔다.
“불사조님이 다른 새들을 싫어하시잖아.”
“그렇지.”
라실리아의 무릎에 올라온 비둘기 머리통을 피피가 가차 없이 발로 찼다던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는 몰랐다.
“그때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불쌍해졌어.”
자신이 비둘기에게 동병상련을 느낄 줄은.
세르벤은 이해가 갈 듯 말 듯 한 그 말에 그저 리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래도 황후 폐하가 너를 무릎에서 내려가게 만드시진 않을 거잖아.”
“그러기엔 너무 인자하신 분이지.”
“응. 그러니까 괜찮은 거 아냐? 적어도 한 분은 공정하시잖아.”
“괜찮은 건가…….”
리얀이 무릎을 세워 턱을 괸 자세로 중얼거렸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될 테지만 마물이라도 한두 마리 나타났으면 싶었다.
자신이 소드 오러를 번쩍대며 마물을 가뿐히 처리하는 모습을 보이면 황후 폐하께서 개인 호위가 옆에 꼭 붙어 있을 필요성을 알아 주실지도 몰랐다.
그리고, 생각은 종종 씨가 되는 법이었다.
* * *
“이런 식은 곤란합니다. 폐하.”
라실리아는 조금 마음이 불편했다.
누가 봐도 그건 레스칼이 리얀을 쫓아내는 모양새였다.
리얀은 언제 어디서 마물이나 마족이 관여한 위협이 나타날지 모르니 자신이 멀어지면 안 된다고 열변을 토했다.
레스칼은 그런 위협을 놓치지 않는 게 네 일이라며 리얀을 내보냈다.
억지로 사실을 떠나는 리얀의 표정이 너무 시무룩해 보여서 라실리아는 왠지 모를 미안함을 느꼈다.
“……곤란한가? 왜?”
레스칼은 조금도 모르겠다는 식이었다.
“리얀은 뛰어나다. 한 방에 있거나 옆방에 있거나 별 차이는 없어.”
“시그레스 경의 생각은 다르던데요.”
“그건 그냥 하는 소리야.”
“그걸 어떻게 아시나요?”
“그게……,”
“삐이.”
레스칼이 눈을 느리게 굴렸고 피피가 괜히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둘이 똑같은 짓을 하니 더 수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연습을 핑계로 대신 것 같습니다, 폐하.”
라실리아가 잘라 말하자 레스칼이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끌어올렸다.
“왜 핑계라고 생각하지? 연습이 필요하다고 한 건 그대였는데.”
“이 시간에는 적절치 않으니까요.”
“시간이 무슨 상관인데.”
“폐하도 저도, 아직은 일과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삐이삐이.”
피피가 파드득 주변을 날아다니며 연습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시끄럽다. 조용히 해.”
“삐이?”
“네가 알 바 없다.”
그게 바로 적절치 않다는 증거였다.
“보세요. 아직 피피가 잠들 시간도 아닙니다. 시그레스 경을 명령으로 내보내실 수는 있지만 피피한테도 그러실 수는 없을 겁니다.”
“삐이! 삣!”
피피가 당연하다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해도 이 방에서 쫓아낼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나도 꼭, 지금 연습을 하자는 건 아니었어.”
레스칼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아무리 요새 머릿속에 그 생각밖에 없다고 할지라도 이 시간부터 그대를 난처하게 만들 마음은 없었다.”
“…….”
머리칼을 넘기며 목소리를 좀 작게 하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시무룩해져 보일 수 있는 것도 재주였다.
“그냥 단둘이 있고 싶었던 거야. 어젯밤에는 그러지 못했으니까.”
박쥐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을 때가 된 것은 거의 아침이 다 된 시간이었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라실리아도 내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러다 깜박 눈을 감았을 때 레스칼이 다녀갔다.
잠결에 레스칼이 제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만 주무세요, 라고 했더니 레스칼은 잠시 후 사라졌다.
“그대가 눈을 뜨면 같이 있고 싶었는데 자꾸 시간이 어긋났다.”
레스칼이 씻고 났더니 라실리아가 씻거나 하는 식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아침을 함께 먹으려고 했지만 라실리아는 이미 침실에서 아침을 먹었다.
비둘기가 나타나기 전까지, 계속 일과가 엇갈렸다.
“아침에는 왜 그냥 사라지셨습니까?”
라실리아가 소파를 톡톡 두들기자 레스칼이 저를 보는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라실리아가 다시 소파를 두들겼다. 그러자 레스칼이 고개를 갸웃대며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게 맞나?”
“네. 조금 더 오세요.”
“그래도 되는 건가? ……화가 난 줄 알았는데.”
“어쩌면. 그러니까 가까워져야 할 것 같습니다.”
“……뭔가 좀 이상한데.”
평소 생각과 어긋난다 생각하면서도 레스칼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바싹 다가와 몸을 붙였다.
“이 정도도 괜찮을까?”
“네. 딱 좋은 것 같습니다.”
라실리아가 레스칼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답을 해 주세요. 아침에는 왜 그냥 사라지셨습니까? 같이 있고 싶었다면 그 시간이 가장 적당했을 겁니다.”
“그대를 깨울 게 뻔하니까.”
레스칼이 한숨을 쉬듯 라실리아의 어깨로 이마를 툭 기댔다.
“말했듯이, 그대가 연습이라는 말을 한 뒤로 내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밖에 없다. 깨우고 싶지 않았어도 깨웠을 거야.”
“깨우면 안 되는 겁니까?”
“안 돼. 그대가 화를 낼 테니까.”
자신은 그렇게 화를 자주 내는 편이 아닌 것 같은데 레스칼에게는 다른 사람이 되는 모양이었다.
“폐하 앞에서 화를 낸 적은 몇 번 되지 않는 것 같은데요.”
“아…… 그런가?”
“네.”
레스칼이 조심스럽게 라실리아의 팔에 손을 얹었다.
“그럼 정정하지. 화를 자주 내지 않는 그대가 혹시라도 화를 내게 될까 봐.”
“그 정도는 괜찮았을 거예요.”
“그걸 어떻게 장담하는데.”
레스칼이 이마를 댄 상태에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동작을 멈추고는 휙 고개를 들어 올렸다.
금안이 뜨거웠다.
눈이 마주친 상황에서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몸을 천천히 뒤로 밀었다. 미는 대로 저항 없이 있으려니 소파에 눕는 자세가 되었다.
“그대는 이렇게 누워서 자고 있었고,”
넉넉한 카우치는 빠듯하긴 해도 두 사람이 누울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라실리아를 눕게 한 레스칼이 양팔 사이에 라실리아를 가두듯 놓고 몸을 기울였다.
“그 상황에서 내가 돌아가지 않았다면……,”
레스칼이 느릿하게 말을 잇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리다고 생각했던 말투는 곧이어 속삭이듯 빨라졌다.
“……나는 반드시 이렇게 했을 거야.”
곧이어 레스칼의 입술이 목덜미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