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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잊지 말아야 할 것 (88/96)


88. 잊지 말아야 할 것
2023.07.05.



“앗!”

“삐잇!”

눈 깜짝할 새였다.

검은 소용돌이가 세 사람을 꿀꺽 삼켜 버렸다.

아지랑이 같기도 하고 왜곡된 그림자 같기도 한 소용돌이는 사실 결계를 이루는 문자였다.

꼬리를 문 벌레처럼 이어진 문자들이 세 사람을 어딘가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삐이잇!”

피피가 검은 소용돌이를 향해 불꽃을 내뿜었다.

스슷…… 핏!

땅속으로 파고들어 가는 것처럼 사라지던 문자의 끄트머리가 조금 탔다.


“으, 놓쳤습니다.”

리얀이 뒤늦게 소드 오러를 일으키며 애꿎은 땅을 후려쳤다.

장난 같은 동작에 땅이 쩌저적 갈라졌다.


“삐이…….”

피피가 완전 놀랐다며 고개를 뻐끔 내밀어 땅이 얼마나 깊이 갈라졌는지 살폈다.


“뭐였을까요? 마족이었을까요? 분명히 마법 스크롤을 찢거나 하진 않았는데.”

레스칼이 세 사람이 사라진 허공을 더듬었다.


“그랬다면 스크롤이 남았을 것이다. 사용한 스크롤을 자동 소멸하게 하는 마법까지 걸려 있던 게 아니라면.”

“아…… 그렇긴 하지요. 그리고 마법과는 좀 다른 느낌이기도 합니다. 이동진이라면 일단 세 사람이 진 가운데 위치를 잡았어야 하니까요. 지금 바닥에 남은 자국을 보면 위치가 제각각입니다.”

“삐잇!”

피피도 수상한 냄새가 장난이 아니라며 말을 보탰다.
리얀이 콧등을 구겼다.


“그럼 진짜 골치 아파지겠군요. 마족의 손이 닿는 범위를 제국 정도가 아니라 델라르타까지 포함해서 생각해야 할 테니. 아, 델라르타가 아니라 그 어디라도 될 수 있겠습니다.”

“경계를 늦추지 마라.”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손을 꾹 쥐며 내뱉었다.


“이제부터는, 단 한 순간도.”

“물론입니다, 폐하.”

마족이 언제 어디서 누굴 보내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단순히 공격을 받아치는 것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어디 숨어 있는지를 찾아내야겠어.”

마족의 근거지를 찾는 일을 시작해야 했다.


“삐이이.”

피피가 날개를 푸드덕거렸다.

배도 고프고 졸리니 이제 그만 돌아가자고 했다.


“저도 동감입니다, 폐하.”

라실리아가 투정을 부리는 피피를 손바닥에 앉히며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고 싶어요.”

에셀리온이 한 짓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를 남겼다. 라실리아에게 돌아갈 곳이 어딘지 명확히 알게 해 주었다.

그곳은 델라르타가 아니었다. 레스칼이 있는 곳이었다.


“기꺼이.”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손을 들어 손가락 새에 입을 맞췄다.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푸드드득!

한적한 오후였다.

라실리아는 최초의 반려가 남긴 수기를 읽는 중이었다.

따듯한 계절 덕에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은 노곤했고 은은한 꽃향은 마음을 느슨하게 해 주었다.

이베트가 식기 전에 다시 따듯하게 데워서 건네는 차는 온도가 딱 좋았다.

이런 것을 두고 황궁의 평온한 일상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런 곳에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구구.”

비둘기가 작달막한 머리로 유리창을 톡톡 두드리는 순간이었다.


“삣!”

우웅!

팟!


“황후 폐하!”

그리고 평온이라는 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피피가 화르륵 불꽃이 되고, 마법진 일곱 개가 동시에 구동되었다. 보라색 소드 오러가 벽을 잘라내며 리얀이 잽싸게 나타났고, 이어서 황후궁의 경비를 서던 근위대가 우당탕 문을 열고 뛰어들었다.


“화, 황후 폐하…….”

이베트가 침을 꿀꺽 삼키며 작게 라실리아를 불렀다.

그러는 이베트도 손에 찻주전자를 꾹 움켜쥐고 있었다. 만일 누구든 침입자가 나타난 거라면 뜨거운 물이라도 부어 줄 생각이었다.


“다들 놀랄 것 없다. 비둘기가 나를 찾아온 모양인데.”

“구, 구우…….”

비둘기가 오르르 떨며 애처로운 소리를 냈다.


“삐잇! 삣!”

피피가 네까짓 게 뭔데 창문을 건드리냐고 잔소리를 해댔다.
 

 


“아, 하. 방패가 보낸 새인가 보군요. 이쯤 되면 데칸은 주술을 새로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리얀이 근위대에게 나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근위대 수석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짓으로 뻥 뚫린 벽을 가리켰다.


“저건 수리가 필요할 텐데요.”

“아, 내가 급해서 그만. 데칸에게 마법사 하나 보내 달라고 하면 안 되겠냐? 회복 마법에 능통한 쪽으로. 황후 폐하의 사실인데 흔적이 남으면 좀 그렇잖아.”

“일단 말은 전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필요 없는 일이었다.

우우우웅.

멀쩡한 벽 쪽으로 주술이 만들어 내는 통로가 생겼다.

이어서 그 통로에서 레스칼과 데칸이 걸어 나왔다.

리얀이 쑥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폐하까지 오셨습니까. 그러지 않으셔도 될 일이었는데요. 보시다시피 제가 경계를 늦추는 일 없이 잘 지키고 있었습니다.”

얼핏 쑥스럽게 들리는 말은 사실 은근한 자랑이 섞여 있었다.

벽을 베어 내긴 했지만 내가 제일 먼저 도착했다. 내가 이렇게 든든하다. 그러니 걱정 마시라. 이런 의미였다.


“별 위협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어.”

그리고 레스칼의 대답에는 라실리아의 앞에서 너무 잘난 척 말라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자신이 리얀보다 늦은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호들갑을 떨지 않은 것뿐이었다.

레스칼이 라실리아가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와 정수리에 입술을 댔다. 황궁으로 돌아온 뒤 레스칼이 얼마나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알고 있는 라실리아가 쓰게 웃었다.

마족이 그 어떤 인간이라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레스칼은 주변국과의 우호 관계를 재점검해야 했다.

일단 마족이 숨어 있을 장소가 제국령이 아니라 대륙 전체로 확대되었다. 열심히 마족의 흔적을 뒤쫓는 은의 방패들이 국경을 넘나들어야 할지도 몰랐다.

은의 방패 같은 조직이 자기 영토 안에서 움직이는 걸 달가워할 왕족은 없었다.

레스칼은 이런 외교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혹시라도 마족이 타국의 군대를 이용하게 될지도 모를 상황까지 대비해야 했다.


“시그레스 경의 말대로 폐하가 오실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간이 괜찮다면 잠시 앉았다 가세요.”

“시간은 괜찮아.”

레스칼이 아주 자연스럽게 라실리아가 앉은 1인용 소파의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자연스러워 보여도 사실 앉아 있다 보면 불편해지기 마련이라 라실리아가 그의 팔을 붙잡고 그 옆 카우치로 옮겨 갔다.

레스칼이 녹을 것 같은 눈으로 라실리아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겪어도 이런 일에는 무뎌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제 비둘기가 또다시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습니다.”

데칸은 벽에 구멍을 낸 리얀보다 더 민망해하며 오들오들 떨고 있던 비둘기를 챙겼다.

비둘기는 내내 자신을 매섭게 흘겨보는 피피 탓에 완전히 겁을 먹은 상태였다.

라실리아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베트가 놀라고, 벽이 망가지긴 했지만 이 정도는 괜찮은 축에 속했다.

황궁으로 돌아온 내내 이런 식이었다.

어젯밤에는 지하실의 박쥐를 마물로 오인하는 일이 벌어져 때 아닌 박쥐 사냥이 벌어졌다.

황궁의 지하실이 묵은 때를 말끔히 벗은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그 덕에 몸살을 앓게 된 궁인들이 더러 있었다.

마물이 아닌 박쥐라는 것이 밝혀졌어도 레스칼과 리얀이 긴장을 늦추지 않는 바람에 다들 아침까지 뜬눈으로 지하실을 헤집고 다녀야 했다.


“경을 탓할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 너무 마음 쓰지 말도록.”

“그럼…… 허락하시면 비둘기를 회수해 가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데칸이 바들바들 떠는 비둘기를 안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리얀의 닦달에 근위대가 마법사를 호출하러 떠났고, 이베트가 주전자에서 흘러넘친 찻물을 다시 가져오겠다며 나섰다.

구멍이 뻥 뚫린 사실에 남은 사람은 라실리아와 레스칼, 그리고 리얀 셋이었다.


“너는 왜 계속 거기 있나?”

레스칼이 리얀을 향해 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레스칼은 라실리아의 손을 꼬물꼬물 만지작대는 중이었다.

리얀은 최선을 다해 정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황후 폐하의 호위가 제 일입니다, 폐하.”

“꼭 한 방에 있을 필요는 없잖아.”

“아, 하지만 안 그러면 또 벽을 부수게 될지도 모르잖습니까.”

“그래서 계속 남아 있겠다는 건가?”

“그게 낫지 않겠습니까?”

리얀이 갑자기 슥, 오러를 일으켰다. 검을 휘감은 보라색 오러가 눈을 감아도 보일 만큼 선명했다.

레스칼이 왠지 가늘어진 눈초리로 물었다.


“그건 왜.”

“아, 그러고 보니 황후 폐하께 아직 오러를 보여 드린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리얀이 괜히 뿌듯한 얼굴로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어떻습니까, 황후 폐하. 마음에 드십니까?”

“내 마음에 드는지 여부는 상관없을 것 같은데……. 하지만 경과 닮은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아. 아름다운 빛이다.”

그 말에 레스칼의 표정이 묘하게 언짢아졌다. 반대로 리얀은 답지 않게 수줍은 얼굴을 했다.


“아니, 저와 닮았다니요! 그런 황송한 말씀을……. 제가 아니라 황후 폐하를 닮았습니다.”

“나를? 그대의 힘이 나를 닮을 이유가 있나?”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 오러의 주인은 황후 폐하시라고요. 알아서 주인을 닮은 것이겠지요. 보십시오. 황후 폐하의 눈 색과 똑같습니다.”

“아……?”

“삐이?”

라실리아와 피피가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는 작은 감탄을 내뱉는 동안 레스칼이 손을 뻗어 라실리아의 몸을 돌렸다.


“뭐, 그렇다고 하니 마음껏 부려 먹도록. 그런데,”

“네, 폐하.”

졸지에 봐주는 사람이 없어진 리얀이 보이지 않게 입술을 비죽댔다.


“그대가 뭔가를 잊은 것 같아.”

“그런 게 있나요?”

“있어.”

레스칼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내가 그대의 곁에 있지 못했다. 마물을 경계하느라.”

마물이 아니라 박쥐였지만 레스칼은 꿋꿋이 마물이라고 했다.

사실 레스칼이 직접 나설 필요가 없는 일이었지만, 라실리아는 그가 박쥐를 말끔히 내쫓은 이유를 알 것 같아 마음이 몽글해졌다.


“네.”

“그래서 연습을 못 했잖아.”

“그렇……,”

그 연습이란 그 연습을 말할 것이다.

레스칼이 적당히 알아서 사라지라는 눈으로 리얀을 힐긋 쳐다본 뒤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이 연습을 해야 될 시간 같다. 오러 같은 건 나중에 봐도 돼.”

라실리아는 다른 의미로 리얀을 곁눈질했다.

리얀이 연습이라는 말을 모르기를 바라면서.


“음……. 지금은 시간이 애매한데요. 아직 일과가 끝난 것도 아니고.”

“지금 하지 않으면 하루를 거르게 된다.”

레스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일처럼 말을 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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