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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저주의 반동 (2) (87/96)


87. 저주의 반동 (2)
2023.07.02.


소리가 달라졌다.

처음 공작저에 나타난 마물들은 뾰족하고 매섭게 울었다. 그 소리들이 저를 향해 뿜어내는 적개심이라는 걸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좀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습니다.”

“마물이? 어떻게?”

“길을 잃은 느낌…… 하고 비슷해요. 폐하께서는 느끼지 못하십니까?”

아예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레스칼이 억지로 몸을 틀어 공중을 떠도는 마물들을 바라보았다.


“흠……. 그 말이 맞는 것 같군. 움직임이 달라졌어.”

라실리아를 집요하게 노리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빙글빙글 허공을 맴돌며 소리를 질러대는 것은 여전했으나 공격성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오히려 피피가 내뱉는 불꽃을 피해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었다.

티온을 향해 달려들었던 것이 마지막 공격이었다. 라실리아가 아님에도 들러붙었던 것을 보면 처음의 목표를 잊은 것 같았다.


“그러니 문을 열어 주세요.”

“……썩 내키진 않는데. 그대를 두고 모험을 할 수는 없어.”

“괜찮을 겁니다.”

라실리아가 레스칼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만 안고 싶어요.”

“……음?”

“떨어져 있다 다시 보는 건데 아직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

그 말은 레스칼을 어딘가 잠깐 고장이 나게 만들었다. 그가 멍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낀 라실리아가 제 손으로 마차 문을 열었다.

달칵!

마차 문이 레스칼에 걸렸다.


“폐하?”

라실리아가 문틈으로 레스칼을 불렀다. 잠시 서 있던 레스칼이 마차 문을 확 열어젖히고는 라실리아를 그대로 훌쩍 들어 올렸다.


“폐하!”

두 발이 달랑 들리는 바람에 라실리아는 다급히 레스칼의 목을 안아야 했다.


“놀랐습니다.”

“나만큼은 아니야.”

라실리아가 레스칼의 금발을 살짝 잡아당겼다.


“자칫 떨어질 뻔했어요.”

“그럴 리가. 내가 그대를 놓칠 리가 없잖아. 그리고 내가 더 놀랐다.”

“저는 폐하를 들어 올린 적이 없습니다. 그럴 수도 없겠지만.”

“내 심장을 들어 올렸어. 저기서, 저기까지.”

레스칼이 눈짓으로 가리키는 저기서 저기가 대체 얼마만큼의 높인지는 모르겠지만 놀랐다는 뜻이라는 것은 알아들었다.


“삐이!”

라실리아를 발견한 피피가 잽싸게 날아왔다.


“피피!”

아직도 불꽃 모양을 한 피피가 라실리아에게 찰싹 들러붙었다.

처음 불꽃을 내뱉었을 때는 라실리아를 데이게 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 피피는 전혀 뜨겁지 않았다.


“시그레스 경이 저주를 풀었다고 들었어. 지금은 괜찮아? 아프진 않았어?”

“삐이이! 삐!”

어마어마하게 아팠다는 엄살이 귀가 따갑도록 터져 나왔다.


“시끄럽다. 조용히.”

레스칼이 냉정하게 피피를 라실리아에게서 떼어냈다. 피피가 악착같이 날개를 퍼덕이며 버텼다.


“피잇! 피! ……삐이?”

그러다 마물이 좀 이상하지 않느냐고 했다.

더는 라실리아를 공격하지 않는다고 했다.

라실리아가 피피를 따라 허공을 맴도는 마물들을 응시했다.


“맞아. 나도 그런 것 같아.”

“삐이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어. 멀리…… 너무 멀리 왔다고 해.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삐?”

라실리아가 고개를 돌려 레스칼에게 말했다.


“내려 주세요, 폐하.”

“뭘 하려고?”

“돌려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마물을?”

라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미간을 구겼다.


“그대를 의심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게 꼭 두 발로 서서 해야 하는 일인가?”

“삐…….”

피피가 어이가 없는지 부리를 벌렸다.


“안겨서 하는 것보다는 말을 잘 들을 것 같은데요.”

“……뭐, 그럼. 잠시라면.”

레스칼이 마지못한 듯 라실리아를 내려 주었다.

마물을 향해 돌아선 라실리아가 눈을 감고 생각에 집중했다.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건 마족의 힘이지. 의식의 일부를 빼앗는 것도 그렇고. 마물을 부리는 것도 마족의 힘이야. 그렇다면 나도 할 수 있을지 몰라. 아니, 할 수 있어.’

라실리아는 이 힘에 대해 조금씩 알아 가는 중이었다.

이 힘은 아무래도 다른 존재의 정신에 감응하고, 제 의지에 반응하게 만드는 종류의 힘 같았다.

이베트와 세르벤이 의식을 빼앗겼을 때, 그것을 되돌린 게 자신의 힘이라면 마물들에게도 같은 일을 하는 게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라실리아가 눈을 떠서 마물들을 바라보았다.


“목적을 잃었으니 더는 낯선 땅에 머물지 않아도 돼. 그만 돌아가도록.”

캬아아우…….

대답처럼 마물들이 라실리아를 향해 일제히 울어댔다.


“돌아가는 길은 너희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처음 온 길을 되짚으면 될 거야.”

캬아아아아…….


“돌아가.”

캬우…….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허공을 빙글빙글 돌던 마물 중 하나가 휙 몸을 틀었다.

그걸 시작으로 마물들이 하나둘씩 꼬리를 물고 날아갔다.


 


“우와! 굉장합니다!”

마차와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에셀리온과 대치 중인 리얀이 이쪽을 향해 소리쳤다.

삼 대 일의 상황에서 리얀은 딱히 힘에 부치는 모습이 아니었다. 리얀에게 뭔가 변화가 있다는 것은 라실리아도 한눈에 알아보았다.

검에 감긴 저 넘치는 힘이 소드 오러일 것이다. 이제 리얀에게서는 혼란이나 갈등은 보이지 않았다. 솟구치는 강함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 탓인지 오히려 에셀리온 일행이 버거워 보였다. 오른팔이 부러진 예니온이 티온을 부축하고 있었고, 제대로 칼을 들고 있는 것은 에셀리온 하나였다.

그마저도 전의가 사라진 표정이었다.

에셀리온 역시 보고 있었다.

라실리아가 마물을 돌려보내는 모습을.

그 전에 제국의 황제를 두 팔을 벌려 반가워하는 모습을.

라실리아는 황제를 꺼려하지 않았다.

원치 않는 황후의 의무에 짓눌려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없었다. 불사조는 불꽃의 형태를 한 채 라실리아에게 찰싹 들러붙어 아양을 떨어댔고, 라실리아는 불사조가 조금도 뜨겁지 않은 듯 보였다.

마물이 사라지고 나자 황제는 라실리아의 손을 잡았다. 손을 잡은 모습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전에도 수십 번씩 손을 잡아 본 사이 같았다.

황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며 울던 라실리아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다른 사람이 마음속에 있다던 그 말은 그저 꿈이었던 걸까.


“에셀리온 전하를 잊고 있었군요.”

“그래. 저것들이 아직 남아 있었어. 어떻게 하고 싶나?”

그건 라실리아에게도 퍽 어려운 문제였다.

자신을 위해서라던 에셀리온의 진심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와는 별개로 에셀리온은 제 진심이 무엇인지는 듣지 않았다.

그 맹목성은 언젠가의 이베트나 세르벤을 닮아 있었다.

라실리아가 제 손을 잡은 레스칼의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 전에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에셀리온 전하에 대해서요.”

레스칼이 라실리아를 향해 고개를 내렸다.

라실리아는 그가 불쾌한 표시 정도는 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담담한 무표정을 했다.


“말하도록. 들을 테니.”

“오늘 벌어진 일은 에셀리온 전하의 의지가 아니었을 겁니다. 마족이 관여한 것 같습니다.”

레스칼의 눈에 긴장이 스쳐 갔다.


“……어떻게?”

마족이 관여하려면 직접 접촉을 해야 했다. 레스칼은 라실리아에게 자신과 떨어져 있는 동안 마족을 마주했는지 묻는 것이었다.


“의식의 일부를 빼앗을 때와는 다른 방식 같았습니다. 빼앗는 게 아니라…… 침투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에셀리온은 일어나지 않는 일을 보고 들었다고 말했다.


“짐작이지만 꿈을 이용한 것 같습니다. 마족에게 그런 능력도 있는 건가요?”

“그건 몰라. 내게 있는 힘이 아니라.”

레스칼은 꿈속의 마족과는 달랐다. 완전한 마족도 아니고 이미 피의 종속이 이루어져 반은 인간이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그대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게 맞을 것이다. 반려는 마력을 다스릴 수 있는 존재니까. 다스린다는 건 그 힘을 이해한다는 뜻.”

잠시 생각하던 라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말이 맞습니다.”

마족의 꿈이 반복되는 이유가 있었다. 제 존재를 자각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 꿈은 피의 종속을 이해시키기 위한 기재였을 것이다.

그것 또한 자신에게 전이된 힘 중의 하나였다.

꿈을 통해 무언가를 보여 주는 것. 자신에게 가능한 힘이 마족에게 불가능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에셀리온 전하를 처벌하는 일은…… 가혹하지 않을까요.”

레스칼이 대답에 앞서 눈매를 잠시 찌푸렸다.


“그대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라실리아가 미안함 반, 고마움 반을 섞어 작게 웃었다.


“그럼 용서하실 겁니까?”

“델라르타의 왕자가 하는 걸 봐서. 마족의 관여로 이런 짓을 했다면 일단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게 우선이야. 처벌은 그 뒤에 생각하겠다.”

“그건 맞습니다.”

둘이 여기까지 얘기를 나눴을 때 리얀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자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저는 이제 좀…… 음, 재미가 없어지는데요.”

전의를 잃은 사람을 상대하는 것만큼 지루한 일도 없을 것이다.

리얀은 고작해야 제 칼을 받아치는 게 고작인 에셀리온을 향해 혀를 끌끌 찼다.


“그냥 목을 딸까요?”

그 말에 에셀리온이 라실리아를 돌아보았다.

아직 미련이라 불러도 좋을 불신이 두 눈을 태울 것처럼 간절하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 라실리아의 대답에 모든 것이 달려 있었다.

라실리아가 지금이라도 황제의 손을 뿌리친다면, 그는 얼마든지 더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마음에 품고 있는 다른 자가 자신이라는 말을 한 번만 더 해 준다면 여기서 황제의 목도 벨 수 있었다. 제국이 델라르타에 피의 복수를 선언한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니, 그러지 말도록.”

라실리아가 제국의 기사를 말렸다. 에셀리온은 저도 모르게 숨을 훅 들이쉬었다.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 기대감이 심장을 부풀렸다.


“에셀리온 전하.”

“라실리아 님.”

에셀리온이 검을 쥔 채 라실리아를 돌아보았다. 제국의 황제가 라실리아를 감추려는 듯, 가까이 끌어당겨 제 팔을 둘렀지만 에셀리온은 애써 그 광경을 무시했다.


“말씀하십시오. 그 어떤 말이라도, 어떤 명령이나 부탁이라도 듣겠습니다.”

“그렇다니 감사한 일이군요. 전하께서는 지금 마족의 뜻을 따르는 중입니다. 부디 정신을 차리고 마족이 심은 거짓의 잔상에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에셀리온의 안색이 희게 바랬다.


“뭐……라고요?”

“마족은 사람의 의식을 빼앗을 수도, 그 반대로 의식에 침투할 수도 있는 모양입니다. 전하께서 보고 들었다고 한 그것은 제가 아닙니다. 마족이 만들어 낸 허상이라 여겨집니다.”

그때였다.

예니온이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전하!”

티온과 예니온의 발목을 검은 소용돌이 같은 것이 감아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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