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저주의 반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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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저주의 반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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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저주의 반동 (1)
2023.06.28.
“황후 폐하!”
뒤이어 통로에서 나오는 것은 리얀이었다.
리얀이 마물들을 베면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전하!”
티온이 에셀리온을 불렀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이대로는 도저히…….”
차마 뒷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마물이 그들을 에워쌌다. 대체 왜 마물이 주술을 통해 이동한 것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검부터 휘둘러야 했다.
라실리아를 마차에 태운 채 그대로 도망칠까도 생각했지만, 여관이 근처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도시도 가까웠다.
결국 마물을 상대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것도 모자라 제국의 소드 마스터가 튀어나왔다.
같은 통로를 이용했다는 것은, 제국에서 주술로 이동할 때 마물까지 함께 데려왔다는 뜻이었다. 마물을 상대하면 결국은 제국의 기사들도 상대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방법이 없습니다.”
티온이 이를 물며 중얼거렸다.
에셀리온이 검을 휘두르며 대꾸했다.
“제국의 기사는 내가 상대한다. 그사이 너희들은 라실리아 님을 지켜. 절대 마차에서 내리시지 못하게 해.”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쿵쿵! 쿵!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마차 안에서는 라실리아가 문을 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물어야 했다.
“라실리아 님께서 이 도주를 원하고 계신 게 맞습니까?”
“……하앗!”
대답을 피한 에셀리온이 리얀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통로는 아직 닫히지 않았다.
키우우욱!
마물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피엘리온 공작저에 나타났던 마물의 숫자를 다 더해도 이렇게 많진 않았다. 이 정도면 아예 제국에서 마물을 키우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 이유는 에셀리온이 리얀과 칼을 마주 댔을 때 드러났다.
“도망치는 게 좋을 텐데.”
리얀이 씩 웃으며 에셀리온의 칼을 받아쳤다.
“이제 그쪽은 제국의 수배자가 됐거든.”
“그쪽?”
“그럼 수배자놈한테 뭐라고 해.”
캉!
에셀리온이 저주의 기운을 일으켰다.
“너 하나로는 나를 막지 못한다.”
“아, 그래서 데려왔지. 네놈들 발을 묶으려고.”
“뭘…… 설마 마물을?”
“엘리아든의 폐하께서는 남 사정을 봐주시는 분이 아니라.”
에셀리온이 표정으로 경멸을 드러냈다.
“그런 게 황제인가? 저 마물들이 라실리아 님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뭐, 그거야 네놈이 알 바가 아니고.”
리얀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삐잇!”
아직도 마물이 쏟아져 나오는 통로에서 새빨간 불꽃이 날아왔다.
에셀리온의 안색이 변했다.
“불사조……,”
저 불꽃이라면 본 적이 있었다. 에셀리온을 놀라게 한 것은 불꽃의 크기였다.
그때는 실소가 나올 정도로 자그마하던 불꽃이 지금은 사람 머리통만큼 커다래져 있었다.
“삐이이!”
불꽃으로 변한 불사조가 제 곁을 스쳐 가며 뭐라고 거친 소리를 내뱉었다. 그게 제 욕이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화아악!
왜냐면 불사조가 저를 향해 불꽃을 토했으니까.
“읏!”
에셀리온이 불꽃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삐!”
그를 보며 코웃음을 친 불사조가 라실리아가 탄 마차를 향해 날아갔다.
“삐이이!”
캬우우욱!
캬우!
불꽃이 거세졌다. 불꽃에 스친 마물들이 괴이한 비명을 질러댔다.
그리고 이어서 불꽃보다 더 현란한 금안을 번들대며 제국의 황제가 통로에서 걸어 나왔다.
슷, 슷!
그가 검을 쥔 왼팔을 휘둘러 마물들을 베어 냈다. 마물들은 검은 연기가 되어 소멸되는 게 아니라 반으로 갈라져 더 난폭하게 파닥였다.
“일부러……!”
에셀리온이 울컥 소리쳤다.
제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제국의 황제는 일부러 마물의 숫자를 늘리고 있었다.
이제야 삽시간에 불어난 마물의 숫자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일부러 늘린 것이다.
라실리아 님을 뒤쫓기 위해. 라실리아 님을 데려가려는 자신의 도주로를 끊기 위해.
“미쳤어! 그런 이유로 마물을 늘린다고? 그 눈에는 저기 켈리온 시가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왼손을 무심히 휘두르며 레스칼이 통로를 끝까지 걸어 나왔다.
오른손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검은 비늘로 뒤덮여 붉은 손톱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
금안을 마주 대하는 순간 피부 위의 솜털이 쭈뼛 일어섰다.
제국의 황제는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을 저렇게 쳐다보는 눈을 가진 존재가 인간일 리가 없었다.
저 금안은 자신을 일말의 동질감도 없는, 한없이 무의미한 것으로 바라보았다. 하찮아서 화를 낼 필요도 없는 무엇쯤으로.
저런 존재가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제 반려라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라실리아 님은 사람이었다. 저처럼 감정이 있고 상처를 입고 외로움과 고통을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라실리아 님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
너 같은 건 인간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해. 그분의 애정이 너를 향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에셀리온이 그런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레스칼이 빨랐다.
“리얀.”
“예, 폐하.”
그게 신호였다.
리얀이 에셀리온의 우측을 막아서는 것과 동시에 레스칼이 그를 지나쳐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슷, 캉!
리얀이 일부러 바싹 고개를 붙이며 에셀리온에게 말했다.
“수하들을 다 죽도록 내버려둘 건가?”
“그게,”
“지금이라도 빌어. 잘못했다고. 그럼 또 모르지.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의 눈 밖에 나는 짓은 죽어도 하기 싫어하시는 분이니 네놈 목 하나는 봐주실지도.”
“그 입 다물,”
퍼억!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는 등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홱 돌리자 저 멀리 땅에 처박힌 티온이 눈에 들어왔다.
황제의 앞을 예니온이 막아섰다.
우드득!
눈을 가린 천을 풀려는 예니온의 손을 황제의 오른손이 틀어쥐었다. 손목이 꺾인 예니온이 입을 벌리고 소리 없는 신음을 토했다.
키이이욱!
불사조의 불꽃에서 살아남은 마물들이 티온에게 달려들었다.
“티온……!”
에셀리온이 저주의 기운을 일으켰다.
사악!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리얀의 오러가 그것을 베어 버렸다.
“한 번에 하나. 그리고 집중할 시간이 필요하고.”
리얀이 씩 웃었다.
“벌써 내가 이긴 것 같은데. 그만 항복해. 그럼 저 인간의 목숨은 내가 구해 줄 테니.”
“……큿,”
에셀리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 * *
덜컥!
문이 열렸다.
“폐하!”
저 얼굴이 세상 무엇보다 반가웠다.
라실리아가 저도 모르게 두 팔을 벌리며 레스칼을 향해 일어서려고 했다.
“아니, 안 돼.”
“……네?”
쿵.
다시 마차 문이 닫혔다.
레스칼의 얼굴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폐하. 문을 열어 주세요.”
닫힌 문 뒤에서 레스칼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은. 조금 기다려.”
“왜 그래야 합니까?”
“밖이 시끄러워서. 정리가 필요해.”
정리라는 말에는 많은 뜻이 담겨 있었다.
일단 에셀리온 일행을 처리해야 했고, 마물을 전부 소멸시켜야 했다. 마물들이 노리는 것은 라실리아였다. 함부로 모습을 노출시킬 수는 없었다.
“마물의 숫자가 많아. 그대가 위험할지도 몰라.”
“……그렇다면요.”
마차 안쪽에서 라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가 반갑다는 이유로 위험을 자초할 수는 없었다.
라실리아는 마차 밖으로 나가겠다는 말 대신 문 쪽에 바싹 붙어 앉았다.
창문을 통해 레스칼의 등이 보였다.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창문을 여는 것도 안 되나요?”
그 말에 레스칼이 어깨를 움찔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창문을…… 왜?”
“잠시 만져 보고 싶어서요.”
“그러니까…… 왜?”
“다시 보게 됐으니까?”
“…….”
레스칼이 대꾸 없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여느 때처럼 라실리아는 그의 반응을 곧장 이해하지 못했다.
“안 된다면 그대로 있겠습니다.”
“그게,”
덜컥!
레스칼이 돌아서며 창문을 열었다. 그가 창문틀을 붙잡고 고개를 숙이자 코가 닿을 듯 가까워졌다.
“그대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어째서요?”
라실리아가 손을 뻗어 레스칼이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레스칼이 그 손을 붙들어 손바닥에 입술을 댔다.
“그럼 이렇게 될 테니까.”
“이렇게라는 게 무슨 말입니까.”
“끌어안고, 만지고. 숨소리를 들으면서 그대가 내 곁을 떠나지 않았음을 확인할 것이다. ……다른 건 뭐가 어떻게 되든.”
“아……. 그렇군요.”
많이 놀랐을 것이다. 자신이 놀란 것 이상으로.
라실리아는 자신이 사라지고 난 다음 벌어졌을 일들을 짐작했다.
“제가 사라진 지 얼마나 됐나요? 여기까지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 그리고 피피! 시그레스 경도요. 둘 다 저주에 걸렸는데……,”
“둘 다 멀쩡해.”
레스칼이 입술을 비죽였다.
“리얀이 저주를 잘라냈다. ……괜찮지 않은 건 나였어.”
“페하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그대가 사라졌다.”
그 순간이 떠올랐는지 레스칼이 훅, 뜨거워진 숨을 흩뿌렸다.
그건 레스칼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 중 가장 최악의 일이었다. 추적 마법이 계속 작동하는 게 아니었다면 지금 인간의 모습으로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끔찍했어.”
“……그랬군요.”
라실리아는 비로소 레스칼의 상황을 이해했다. 저주받은 이들도 있는데 혼자서만 괜찮지 않았다고 하는 말에는 조금 엄살이 섞인 것도 같았지만, 그가 겪었을 충격은 무게가 달랐을 것이다.
레스칼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라실리아의 손길이 계속 다정해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한 순간 아주 끔찍한 곳에 있었을 그를 오래도록 안아 주고 싶었다.
“저는 아직도 나가면 안 되나요?”
레스칼이 일단 먼저 이유 모를 신음을 낮게 흘렸다.
“……안 돼.”
“폐하께서 계속 제 곁에 있는 걸 보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에셀리온 전하 일행은 지금 어떻게 되었나요?”
레스칼은 자신이 티온을 땅에 처박은 것과, 예니온의 손목을 부러트린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리얀이 알아서 잘 상대하고 있다.”
“그럼 위험할 건 없을 텐데요.”
“마물이 있어. 제법.”
마물과 함께 온 이유는 간단했다.
마물을 처리할 시간조차 아까웠으니까. 데칸이 주술로 통로를 열고, 근위대가 마물을 그 안으로 몰아넣었다.
이동하는 동안 마물을 없앨 계획이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마물을 이용해서 발을 묶는 게 나을 것이다. 제국에서 도망칠 때처럼 마법 스크롤을 써서 다시 모습을 감추면 라실리아를 눈앞에서 놓칠 수도 있었다.
생각이 정리되자 손이 알아서 움직였다. 기왕 써먹을 거면 제대로 써먹는 게 나았다. 레스칼과 리얀이 함께 칼을 휘두르자 마물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물론 마물이 노리는 건 라실리아라는 점을 잊은 게 아니었다. 단지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다.
자신이 고작 저런 하급 존재로부터 라실리아를 지키지 못할 일은 없을 테니까.
사실 지금은 마물을 없애는 일을 거들어야 할 때였다.
덜 자란 새와 리얀 둘이서도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저것들을 빨리 없앨수록 빨리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라실리아의 곁에서 한 걸음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비합리적인 일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마물이 문제라면 나가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라실리아가 이런 말을 했다.
“어째서?”
몸을 조금 일으킨 라실리아가 레스칼의 귀에 손을 대었다.
“들리세요?”
“……뭐가.”
“마물의 소리가 달라진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