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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눈의 저주 (85/96)


85. 눈의 저주
2023.06.25.



 
다각다각…….

느린 진동이 몸을 흔들었다.

라실리아는 자신이 마차를 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차…… 어디로 가는 중인가.’

마차를 타고 있다면 신전을 나왔다는 뜻이었다. 라실리아는 머리가 깨질 것 같다고 느끼며 기억을 더듬었다.


‘신전을 나왔다면 그럴 만한 일이 있었다는 건데……. 예언을 확인할 일이 생겼나?’

그런데 무슨 예언이었더라…….

예언을 했다면 그 내용을 들은 꿈지기가 있을 것이다.


“플로……, …….”

꿈지기의 이름을 부르려던 라실리아가 말을 멈췄다. 갑자기 제 입이 얼어붙은 듯했다.


‘왜지. 왜 그 이름을 말하기가 싫은 걸까.’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격한 거부감이 그 이름에서 새어 나왔다.


‘플…… 꿈지기는,’

다각다각…… 탁.

그사이 마차가 멎었다.

라실리아가 머리를 짚은 채 몸을 반듯이 폈다.


“……?”

순간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당황했다.

자신은 예언자의 옷이 아닌, 제국의 황족이 입을 법한 값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게다가 머리쓰개도 하지 않았다. 치렁대며 어깨를 흘러내린 긴 머리가 느껴졌다.

라실리아가 머리를 한 줌 쥔 채 의아함을 내뱉었다.


“이게 대체……?”

“라실리아 님. 혹시 깨어나셨습니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누구지?’

자신이 모른다는 건 신관의 마부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일어났다. 누구지? 어디로 가는 중인가.”

“아, 깨어나신 게 맞군요. 문을 열겠습니다.”

덜컥.

마차 문이 열렸다.

그러고 보니 신전의 마차도 아니었다.

신전의 마차는 모두 흰색이어야 했다. 이 마차는 의자만 초록색 벨벳으로 싸여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검은 칠이 되어 있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누군지 모를 남자가 눈앞에 드러났다.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낯이 익었다.


“……머리가 좀 아프군. 내가 왜 신전을 떠났지?”

“네?”

남자는 당황한 듯, 고개를 돌렸다. 그 옆에는 역시나 모르면서도 알 것 같은 사람이 있었다. 흰 천으로 눈을 가린 자였다. 저런 자라면 몰라볼 수가 없는데 몰라본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남자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그건 차차 설명드리겠습니다. 일단 밤이 깊어 여관에서 하루 쉬어 가려고 합니다.”

“여관이라고? 대신관께서 허락하셨던가?”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남자는 모든 것을 나중으로 미루었다.

이상했다. 예언자인 자신이 신전 밖으로 나오는 건 몹시 드문 경우였다. 그것도 모자라 여관에서 묵는다니, 더더욱 낯설었다.

이제껏 라실리아는 예언자의 방이 아닌 곳에서 잠을 자 본 일이 없었다. 그것도 꿈지기조차 없는 곳이라면 안 될 말이었다.


“꿈지기는 있나?”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신전으로 돌아가야 할 터. 언제 예언을 꿀지 모르는 예언자가 꿈지기를 대동하지 않은 곳에서 잠을 청할 수는 없다.”

젊은 남자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수긍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라실리아 님. 그러시면 잠시만 내려 주십시오. 마차만 바꾸겠습니다.”

“마차는 왜?”

“말들이 너무 지쳤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말을 바꾸면 되지 않나?”

“그게…… 마차 바퀴도 낡은 터라 바꾸는 게 낫습니다.”

“…….”

미세한 의심을 접을 수는 없었지만 더 파고들 만한 게 없었다.


“그렇다면.”

라실리아가 풍성한 치맛자락을 모아 쥐며 마차에서 일어섰다.


“제 손을 잡으십시오.”

은발에 푸른 눈을 한 젊은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꿈지기가 아닌 자의 손을 잡아 본 적이 없었던 라실리아는 잠깐 망설이다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가만,”

그러다 문득 치맛자락 밑으로 보이는 흰색 구두에 눈길이 닿았다.

흰 비단에 금실로 수를 놓아 만든 구두는 당연히 본 적이 없었다. 예언자가 이런 구두를 신을 일은 없어야 했다.


“내가 왜 이런 옷을 입고 있나?”

라실리아가 남자의 손을 놓고 물었다.


“아, 그게……,”

“읏,”

갑자기 두통이 몰려와 라실리아가 마차 문에 몸을 기댔다.


“라실리아 님!”

은발의 남자가 마차 안으로 올라섰다. 그가 라실리아를 황급히 의자에 앉혔다.


“머리가 아프신 겁니까? 시간이 지나면 나아진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일단……,”

남자의 푸른 눈에 시선이 갔다.

맑고 선한 눈이었다. 이제야 저 눈이 기억이 났다.

저 눈은 델라르타 왕가의 눈이었다.


“……괜찮습니다, 에셀리온 전하.”

남자를 알아보자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저를…… 알아보시는 겁니까, 라실리아 님?”

에셀리온 왕자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눈을 알아보았습니다. 저는,”

그때 흰 천으로 눈을 가린 자가 마차에 올라섰다.


“전하, 위험합니다.”

“예니온, 아직,”

예니온이라 불린 자가 흰 천을 벗었다. 눈처럼 하얀 동공이 드러났고, 그 순간 라실리아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내게 그 눈을 뜨지 마라.”

기억이 났다.

저 눈이 제게 무슨 짓을 했는지.

저 눈은 인간을 저주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인간의 마음을.

인간이 마음에 차곡차곡 담은 기억을, 그 기억으로 인한 감정을 앗아갈 수 있었다.

저 눈은 자신이 레스칼의 반려로 눈을 뜬 그 순간부터의 기억을 가져갔다.

* * *



“……읏,”

예니온이 눈을 질끈 감으며 머리를 감쌌다.

그가 마주 보던 라실리아는 담담해 보였지만 두 눈은 피가 몰려 붉어져 있었고 숨이 거칠었다.


“예니온?”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던 에셀리온이 당황을 드러냈다.


“송구합니다, 전하. 제 힘이…… 통하지 않습니다.”

“뭐라고?”

에셀리온이 라실리아를 홱 돌아보았다.

그사이 라실리아는 숨을 골랐다.

이번에는 알 수 있었다. 저주의 힘이 자신에게 파고드는 순간을. 정신을 차리고 낯선 힘에 저항했다.

자신에게는 그럴 힘이 있다고 믿었다. 세르벤과 이베트 두 사람에게 빼앗긴 의식을 되돌렸듯이, 자신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아무것도 모른 채 다시금 이용당할 테니까.

제 얼굴도 모른 채 살았던 예언자처럼.


“대체 어떻게……?”

에셀리온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건 자신에게 마족의 능력이 일부 전이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답해 줄 의무는 없었다.


“이곳은 제국령입니까? 아니면 벌써 국경을 넘었습니까?”

라실리아의 물음에 에셀리온의 눈매가 굳었다.


“라실리아 님, 저는……,”

“전하께서 무슨 의도로 이런 짓을 했는지, 그건 별로 궁금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를 어디로 데려가 무얼 시키려 했든, 그 뜻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장담은 할 수 있습니다. 내게는 추적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보호와 추적의 주술도 물론입니다. 제국군이 전하의 일행을 뒤쫓는 건 시간 문제입니다.”

사실 지금도 추적 마법이 작용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데칸의 주술도 마찬가지였다. 라실리아는 지금 도박을 하고 있었다.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다면 여기서 나를 놓아두고 전하의 길을 떠나세요. 더 이상의 책임을 묻지 않는 것으로 베르호예트 선왕께 진 빚을 갚겠습니다.”

“라실리아 님을 위해서 한 일입니다!”

에셀리온이 울컥 분노를, 아니 분노를 닮은 원망을 터트렸다.


“마족의 반려라는 게 무엇인지 압니다. 피를 종속시키기 위해 강제로 부부의 연을 맺어야 하는 일이 아닙니까? 저는 도저히 그런…… 라실리아 님께서 왜……,”

차마 말을 마치지 못하겠던지 에셀리온이 입술을 물어뜯었다.
 

 


“강제라는 말이 어디서 연유했는지 모르겠군요. 마족의 반려로 태어난 게 내 의지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게 내 몫임을 압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제가 라실리아 님을 원치 않는 운명에서 지켜 드리겠습니다!”

에셀리온은 아마도 진심일 것이다. 거짓은 조금도 읽히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화가 났다.

왜 자신이 레스칼의 반려가 되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걸까. 이제껏 얼굴조차 모르고 있던 델라르타의 왕자가. 대체 무얼 안다고.


“그걸 왜 전하께서 하려 합니까?”

“……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던지 에셀리온이 어깨를 주춤 흔들었다. 눈동자가 함께 흔들렸다.


“설령 내가 원치 않는다 하더라도, 왜 전하께서 나를 지켜야 합니까?”

“제가……,”

에셀리온은 답을 하지 못했다. 말이 되지 못한 소리만 더듬더듬 내뱉을 뿐이었다.


“나는 그게 심히 불쾌하군요. 차라리 전하께서 왕권 수복을 위해 껍데기라도 예언자가 필요했다 하면 이해가 갔을 겁니다. 하지만 나를 위한 일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바라지 않으니까요.”

“저는……,”

에셀리온의 표정은 가여울 정도였다.


“라실리아 님께서…… 황제를 마음에 두고 계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자를…… 원하신다고…….”

“그런 말을 어디서 들었습니까?”

“라실리아 님이 서재에서…… 제국의 그림자 기사에게……,”

어이가 없었지만 그것도 진실이었다. 에셀리온의 머릿속에는 지금 입으로 하는 말과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라실리아 님.”

에셀리온이 고개를 크게 내젓더니 라실리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곳은 제국의 땅이 아닙니다. 그 마음속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솔직히 털어놓으셔도 됩니다.”

“나는 거짓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아닙니다. 지금 거짓말을 하고 계십니다. 분명히 라실리아 님께서 황제가 아닌 다른 자를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제 눈을 보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기가 막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에셀리온이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라면 누군가 그에게 거짓을 보여 주었다는 뜻이었다.


‘그 마족……,’

인간의 의식을 일부 빼앗아 제 꼭두각시로 삼을 수 있었다.

마물을 부려 사람을 움직이기도 했다.

그리고 에셀리온처럼, 의식을 빼앗는 게 아니라 거짓 경험을 주입시킬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전하께서 보신 것은,”

가짜입니다.

라실리아가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전하, 전……!”

티온이 마차 밖에서 외쳤고, 에셀리온과 예니온이 동시에 고개를 홱 돌렸다.

우우우우웅…….

아무것도 없는 길 위에 짙은 그림자가 번지기 시작했다. 둥글게 시작한 그림자는 커지고 또 커져서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만한 크기가 되었다.


“아……!”

창밖으로 그림자를 발견한 라실리아의 눈이 커졌다.

저걸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신전 재판실의 작은 방에 갇혀 있던 날, 피엘리온 소공작이 자신을 데리러 왔다며 만들어 낸 주술과 똑같았다.

마침내 그림자는 통로가 되었다.

키우우욱!

캬악!

그리고 그 안에서 마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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