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색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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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색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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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색의 의미
2023.06.21.
키우욱!
캬앗!
마물의 숫자는 처음보다 훨씬 많았다.
그리고 묘하게도 덩치가 줄었다. 마물을 상대하는 법을 모르는 근위대 기사들이 덮어 놓고 갈라댔기 때문이었다.
사실 알아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실체 없는 어두운 그림자 같은 마물은 물리적인 공격이 전혀 먹히지 않았다.
그나마 불을 갖다 대면 움직임을 멈출 수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태울 수는 없는 듯했다.
하여간 그런 이유로, 근위대는 횃불을 휘둘러 마물들이 더 이상 번지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마물을 없애는 것은 레스칼과 리얀이었다.
레스칼의 오른손에는 비늘이 돋았다. 그 손으로 휘두르는 검은 마물을 소멸시켰다.
리얀이 합류하자 속도가 빨라졌다. 리얀의 검에는 투명하고 맑은 보라색 기운이 어려 있었다.
다들 그걸 처음 보고는 눈이 빠지는 줄 알았다. 말로만 듣던 소드 오러라는 것을 알아채기까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왜 보라색인데?”
슷…… 퍽!
마물이 귀찮은 점은 날 줄 안다는 것이었다. 인간과는 다른 동선으로, 다른 공간을 움직이는 것들을 뒤쫓아야 하니 눈이 차마 다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감각을 예민하게 열어 둬야 했다.
그 와중에도 레스칼은 오러의 색깔로 뭔가를 짐작했다.
리얀이 저 반려에 대한 집착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짐작하신 대로입니다. 황후 폐하께서 주셨습니다.”
“왜?”
지금 중요한 게 이유는 아닐 테지만 레스칼은 물었다.
“제가 간절히 바랐으니까요……? 사실 아직 얼떨떨합니다.”
“황후가 널 마음에 들어 하나?”
리얀이 부지런히 칼을 움직여 오러를 쏟아 부으며 말했다.
“음……. 그건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으니 오러를 주셨겠지만, 그렇다고 저를 특별히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은 아닐 것 같고……. 꽤나 공정하시지 않습니까, 황후 폐하께선.”
“그건 그렇지.”
레스칼이 미묘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뭔가 마음에 안 차시는 모양인데.’
리얀이 등을 돌리고 자기도 입술을 비죽였다.
‘황후 폐하와 내가 가까워지는 게 싫으신 건가……. 아니, 그러실 게 뭐가 있는데? 황후 폐하의 주위에 사람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인데.’
리얀이 구시렁대는 것을 기가 막히게 짐작했던지, 레스칼이 등 뒤에서 말했다.
“일전에,”
“네, 폐하.”
스슷, 팟!
파앗!
그사이에도 마물은 차례차례 사라지고 있었다.
“황후가 차를 마셨어. 제1시녀와.”
“아……? 그야 당연한 게 아닙니까?”
“단둘이서.”
“그야 황후궁의 다른 시녀들은 전부 근신 중이니까요.”
“차를 마실 거면 나를 불러도 될 일이었다.”
“어, 그게……. 마침 폐하께서 바쁘셨거나…… 뭐 그러지 않았을까요?”
“황후는 제1시녀를 아끼지. 너희들에게 차를 마시자고 한 일은 이제껏 없었잖아. 안 그런가?”
“으음…… 네. 그런 적은 없었습니다.”
황후가 기사를 불러 차를 마시게 한다는 것도 이상했다. 기사가 하는 일은 시녀의 일과는 많이 달랐고, 자신은 딱히 차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아니, 알긴 아는데.’
스으으읏.
리얀이 칼을 휘두르면서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근데 뭔가…… 좀 아쉬운 것도 같고?’
레스칼이 말을 이었다.
“내 말은, 황후가 아끼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그런 시간이 늘어난다는 거야. 별 이유도 없이 불러다 차를 마시거나 하는 시간이.”
“그런 겁니까? 그게 왜,”
“그럼 황후가 내게 주는 시간이 줄어들 테지.”
“아……!”
비로소 리얀도 깨달았다.
왜 갑자기 쓸데도 없이 차를 마시고 싶어졌는지.
그건 황후 폐하와 가까이 앉아 뭐든 나누게 된다는 뜻이었다. 차든, 과자든, 얘기든.
‘그거 좀…… 되게 좋을 거 같고, 막?’
마음을 숨길 수 없는 황후는 놀랍게도 가장 마음이 편한 대화 상대였다.
자신도 모르는 혼란을 차분한 눈빛으로 바라봐 주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솔직하게 말을 하다 보면 혼란은 말끔히 정리가 되었다. 지금 제 손에 감겨드는 보라색 오러가 그 증거였다.
스윽…… 팟!
마물을 하나 더 소멸시킨 레스칼이 리얀을 힐긋 돌아보며 말했다.
“네가 황후에게 품는 마음은 인정하겠다. 그게 충성심이든 뭐든. 그러나 황후가 너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래서 리얀은 처음으로 레스칼에게 약간의 반발심을 느꼈다.
‘와, 그건 너무 과욕이신 거 아닙니까. 황후 폐하가 폐하 혼자만의 사람도 아니고. ……아, 반려니까 그렇긴 하지만. 아니, 그래도 너무하시잖아.’
새삼 레스칼이 황후에 대해서는 얼마나 마음이 좁은지 자각하게 되었다.
이제껏 그가 제 편에게는 관대한 황제라고 여겼는데, 그건 사실 무심함이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으음…… 제가 폐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은 당연하나, 이미 제 오러는 황후 폐하께서 주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요.”
리얀이 입술이 비죽이는 것을 감추며 말해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요.”
레스칼이 모를 리 없었다.
오러가 라실리아를 연상하게 하는 것부터 리얀과 라실리아의 사이에는 그와는 상관없이 또 다른 견고한 유대관계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그러니 지금 던지는 말은 자신의 영역표시를 재확인하겠다는 의도였다.
“선은 넘지 마. 황후는 내 반려다.”
“제가 설마 모르겠습니까, 그걸.”
아무리 그래도 자신한테까지 저렇게 날을 세울 줄은 몰랐다.
‘아니, 내가 황후 폐하에게 연심을 품을 것도 아니고……. 그저 오러의 주인으로 대하겠다는 건데……. 잠깐.’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랐다.
“오러처럼 신성력도 각자 재질에 따라 색이 다를까요?”
리얀이 무심결인 듯 흘려 본 말을 레스칼은 놓치지 않았다.
“차이가 있었다. 아예 색이 구분될 정도로 눈에 띄게 다른 경우는 얼마 없는 것 같고. ……너는 무얼 봤나?”
리얀의 표정이 다른 의미로 못마땅해졌다.
“델라르타의 왕자 말입니다, 보라색이었습니다.”
“…….”
레스칼의 표정이 리얀과 비슷해졌다.
“왠지 여길 빨리 정리하고 황후 폐하에게 가고 싶어지는데요. 델라르타의 왕자 전하가 이제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수상쩍고.”
* * *
캬우욱!
“황후 폐하! 피하십시오!”
“삐이이잇!”
틀렸다. 더는 방법이 없었다.
마물은 끝내 사라지지 않았고, 불사조가 일으키는 불꽃은 한계가 있었다. 레스칼이 괜히 덜 자랐다고 타박하는 게 아니었다.
세르벤이 마물을 조각내면 피피가 그 작은 조각을 하나씩 태워 없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시간이 너무 걸렸다.
조각난 마물이 다시 원래의 크기로 자라는 게 더 빨랐다.
어찌어찌 근위대의 눈을 피해 본관으로 날아온 마물 하나가 제 한계를 절감하게 했다.
“삐잇! 삣!”
피피가 울상을 지었다.
더는 안 될 것 같으니 라실리아에게 옆방으로 피하라고 했다.
“저와 불사조님이 뒤를 지키겠습니다. 신호를 하면 저쪽으로 달려가서 문을 잠그십시오.”
“그럼 경과 피피는 어떻게 되는데?”
“글쎄요…… 죽진 않을 겁니다.”
“삐!”
“나만 혼자 피할 수는 없어.”
고개를 젓는 라실리아에게 세르벤이 비장하게 말했다.
“아니요. 그러셔야 합니다. 황후 폐하께서 잘못되신다면 폐하께서 잘못되신다는 말입니다. 그건 제국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이고요.”
“다 같이 피하는 건?”
“틈이 안 납니다. 저놈들이 지금 네 개가 된 터라……. 흣!”
“삐이!”
빙빙 주위를 돌며 기회를 엿보던 마물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황후 폐하!”
다급해진 세르벤이 라실리아만은 살리겠다는 의도로 라실리아를 제 몸으로 덮었다.
“삐이!”
피피가 좀 전에 비해 한없이 미약해진 불꽃을 내뱉었다.
그 순간이었다.
“움직이지 마라.”
파스스스스!
어디선가 날아온 서늘한 기운이 동작을 멈추게 만들었다.
* * *
“아…… 감사합니다.”
세르벤이 지친 손으로 땀에 흠뻑 젖은 이마를 닦았다.
마물을 상대하는 일보다 라실리아가 다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었다.
델라르타의 왕자는 마물들을 모두 처리하고 난 뒤에도 짙은 보라색 기운을 칼에 감고 있었다.
그의 수하 둘도 마찬가지였다. 에셀리온 왕자처럼 선명하고 짙은 기운은 아니었지만, 눈에 보이기는 했다.
재미있게도 색이 제각각이었다. 그중 하나는 거의 보이지 않는 투명한 색이었고, 다른 하나는 옅은 초록색이었다.
더 재미있는 건 투명한 색의 기운을 가진 자가 흰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세르벤은 이제껏 앞을 보지 못하는 자가 기사를 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본관에 들어온 놈들이 더 있습니까?”
하여간 셋 다 저 기운을 끄집어내고 있었다면 이곳까지 오는 데 마물이 더 있었다는 말이었다.
“아니.”
그러나 들려오는 대답은 이러했다.
“아…… 없었습니까? 그런데 왜,”
“라실리아 님.”
세르벤의 말을 자른 에셀리온이 라실리아를 불렀다.
“네, 에셀리온 전하. 먼저 나와 시그레스 경의 목숨을 구해 준 것에 감사해야겠군요. 빚을 졌습니다.”
“삐이, 삐!”
피피는 지쳐서 숨을 할딱대면서도 에셀리온을 경계했다. 그가 하는 말을 듣지 말라고 했다.
“지금 본관에는 마물이 없지만 잠시 후면 뒤덮일 것입니다. 제국의 무력으로는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이런. 마물이 더 오고 있습니까? 눈으로 보일 정도로 가깝나요?”
“아니요.”
너무 단호한 대답이었다. 뭔가 석연찮은 느낌이 드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 전에 피하셔야 합니다.”
“피하면 되는 일입니까? 제국이 막아내지 못한다면 그 마물들을,”
“그건 제국이 알아서 할 일입니다. 마족이 황제이니 벌어지는 일일 겁니다.”
“에셀리온 전하.”
에셀리온은 자신을 아직도 델라르타의 예언자로 대하고 있었다. 라실리아가 그 점을 짚었다.
“나는 제국의 황후입니다. 제국과 황실의 일은 나와 별개일 수 없습니다.”
“이제 더는 그리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에셀리온이 손을 내밀었다.
“제 손을 잡으십시오, 라실리아 님. 더는 제국의 몰염치한 강요를 견디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 손 치우십시오.”
라실리아가 대답하기 전, 세르벤이 칼로 에셀리온을 막아섰다.
“전하의 발언은 제국을 적으로 삼겠다는 말로 들립니다. 여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황후 폐하께 다가오면 적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세르벤을 힐긋 쳐다본 에셀리온이 입술을 열었다.
“……원한다면.”
그와 동시에 보라색 기운이 거세게 일어나 세르벤을 덮쳤다.
“시그레스 경!”
“삐이!”
라실리아와 피피가 비명을 질렀다. 다급하게 그를 향해 뻗는 손을 에셀리온이 다가와 움켜쥐었다.
“닿으면 안 됩니다, 라실리아 님.”
“삐잇!”
피피가 에셀리온을 향해 불을 뿜었다. 에셀리온의 보라색 기운이 피피의 불꽃을 막는가 싶더니, 이어서 피피까지 집어삼켰다.
“피피! 안 돼! ……에셀리온 전하! 저 힘을 거두세요! 어서!”
“라실리아 님을 위한 일입니다. 무례를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에셀리온이 라실리아를 안아 들었다.
“놔!”
발버둥대는 라실리아를 힘으로 누른 채, 그가 수하를 불렀다.
“예니온.”
“네, 전하.”
예니온이 라실리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눈을 가린 천을 풀었다.
동공이 눈처럼 희었다.
“…….”
그 눈을 마주하는 순간 의식이 봄에 흩날리는 눈처럼 스르륵 녹아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