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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질투는 돈으로 (83/96)


83. 질투는 돈으로
2023.06.18.



“가려진 냄새라면…….”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러나 이상한 점이 있었던 것은 확실해. 공작저의 집사가 알지 못할 만큼 사소했다 해도.”

라실리아가 공작의 편지를 다시 살폈다.


“공작령의 일을 제게 개입하지 말라고 한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제게 숨겨야 하는 일 같은 게.”

“그렇겠지.”

라실리아가 걱정하는 점은, 혹시나 공작의 침실에서 나눈 얘기를 공작이 듣고 자신이 카르타헤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나 하는 부분이었다.


“그 점을 배제하지 말아야겠군요.”

공작은 카르타헤나의 황후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아이를 찾아 죽이기를 원했다. 그 아이가 자신이라면, 그래서 기어코 황후가 되어 있는 것을 안다면 어떤 대응을 하려고 들지 몰랐다.


“피엘리온 공의 행방을 쫓겠습니다.”

상황을 파악한 데칸이 즉시 해야 할 일을 찾았다.


“늦지 않도록 해라. ……아, 그리고.”

사실 데칸이 먼저 할 일이 있었다. 델라르타 왕자 일행을 내쫓는 것이었다.

레스칼이 제게 던지는 시선을 알아차린 데칸이 제꺽 인사를 한 뒤 서재를 떠났다.

그사이 레스칼은 라실리아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공작이 저렇게 나오니 곤란해진 일이 있지 않나?”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델라르타의 왕자에게 자금을 주기로 했다면서.”

“아……. 그 얘길 벌써 전해 들으셨나요?”

“그대의 일을 내가 몰라서는 안 되니까.”

레스칼이 금안을 느슨하게 늘렸다. 꼭 사고를 친 다음 일부러 더 얌전하게 구는 짐승 같았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 돈을 내가 줘도 될까?”

“네? 폐하께서요?”

“황실은 부유하니까.”

사실 라실리아에게도 지원금은 난감한 문제이긴 했다. 카르타헤나 피엘리온의 개인 재산을 자신이 쓰는 일이 옳은지 판단이 어려웠고, 그 돈으로 충분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차피 레스칼에게 부탁하려고 했던 일이라 오히려 잘된 셈이었다.


“외교적인 잡음이 없도록 잘 처리하겠다. 내가 돕도록 해 줘.”

“제가 감사를 드려야 할 입장입니다, 폐하.”

“천만에. 그대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감사는 내가 해야지.”

녹을 듯 다정한 말을 남긴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이마에 키스를 하며 재빠르게 덧붙였다.


“서둘러 처리하도록 하겠다. 그대가 기다릴 필요 없이.”

왠지 말하는 게 다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잠깐 들긴 했지만 라실리아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서 빨리 지원을 받는 편이 에셀리온에게도 더 나을 것이다.


“그렇다면 폐하의 뜻대로.”

레스칼이 돌연 숨을 훅 들이쉬었다.


“왜 그러시나요?”

“……너무 좋아서.”

“어떤 게 말입니까?”

“그대가.”

그대가 별말 없이 허락해 준 게, 라는 말을 생략한 레스칼이 다시 쪽 입술을 붙인 뒤 라실리아의 손을 쥔 채 돌아섰다.


“그럼 침실로 돌아갈까?”

“아, 그럼 아침을 기다렸다 환궁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곳에서 제가 더 할 일은 없어 보입니다.”

레스칼이 눈을 번뜩였다.


“진짜 좋은 생각이군.”

그래, 델라르타의 왕자 같은 주제 넘는 인간이 멋대로 찾아올 수 있는 이 망할 곳에 더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마물까지 나타났다. 아침을 기다릴 것도 없이 떠나는 게 나을 것이다.


“……잠깐,”

그러나 그쯤에서 뭔가가 떠올랐다.

마물이 나타났다고 하는 부분에서.

* * *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있다니!”

하스데야가 환호했다.

그는 방금 전 마물을 다룰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우연히 발견했다.

마계와 인간계를 잇는 통로로 사용한 인간의 몸은 생명력이 남아 있는 한 닫히지 않았다. 그 말은 황실 근위대가 이미 가망이 없다고 판단을 내린 그 시체에서 마물이 하나 더 나왔다는 뜻이었다.

그 마물이 소환자의 의지를 따라 피엘리온의 피를 뒤쫓았다. 다만 생명력이 모자랐던 탓인지 그 여자가 아닌 엉뚱한 피엘리온에게 들러붙었다.

하스데야가 애초에 마물에게 지시했던 것은 라실리아의 죽음이 아니었다. 들러붙어 생명력을 갉아먹으라는 것이었다.

라실리아가 지닌 힘은 연이은 자각을 통해 점점 커 가는 중이었고, 하스데야는 생명력을 빼앗아 그걸 방해할 작정이었다.

하여간 마물이 다 죽어가는 공작에게 들러붙었다. 얼마 남지 않은 생명력을 빨아먹은 마물은 예상치 못하게도, 인간과 동화를 시작했다.

그 순간 하스데야가 얼마나 놀랐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 여자만 힘이 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인간의 생명력을 취할수록 제 힘도 계속 진화했다.

인간의 몸을 장악한 마물을 부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하스데야는 냉정히 머리를 굴려 앞에 둘 수를 계산했다.

지금 공작을 움직여 그 여자와 바하무트를 가지고 놀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하무트는 마물의 냄새를 맡을 것이고 그 여자 또한 뭔가 잘못된 점을 알아챌 것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공작을 감추는 것이었다. 공작가의 머저리들은 공작의 필체로 쓴 편지 한 장이면 무슨 짓이든 할 터였다.

막대한 재산도 그렇고, 인간 세계에서의 신분도 그렇고 피엘리온 공작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자였다.


 


“의식을 빼앗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겠는데. 그건 한 번 하려면 내 앞까지 데려다 놨어야 하니까.”

하지만 소환진과 마물을 이용하면 멀리서도 얼마든지 수족처럼 다룰 수가 있었다.


“하하…… 하하하!”

하스데야가 큰 소리로 웃어댔다. 커다란 웃음소리를 따라 벽부터 천장까지 빼곡히 그려진 결계가 들썩거렸다.

땅이 갈라지는 것 같은, 음산하고 끔찍한 웃음이 멎자 하스데야가 눈을 빛냈다.

그는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아서 주체가 안 될 정도였다.


“좋아. 하는 김에 계속 해 볼까.”

하스데야가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결계의 구석이 반짝대며 그 부분이 갈라졌다.

알고 봤더니 그곳은 문이었다.

문을 열고 평범한 신관복을 입은 말리크의 기사단이 들어섰다.


“알고 싶어 하는 자들의 아버지시여. 부르심을 받고 자식들이 당도했나이다.”

하스데야가 그들을 보며 검지를 세워 빙글빙글 허공에 무언가를 그렸다.


“해가 뜨기 전까지, 한 번 더 놀아.”

 

* * *

레스칼이 공작의 서재에서 가려진 마물의 냄새가 난다고 말을 하는 순간이었다.


“……!”

갑자기 레스칼이 창밖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무슨 일입니까, 폐하?”

세르벤이 다급히 물으며 직접 창문을 향해 달려갔다. 저 멀리 정문 쪽에 근위대가 모이고 있는 게 보였다.


“누가 찾아온 것 같은데……?”

“찾아온 게 아니야.”

레스칼의 금안이 칼처럼 예리해졌다.


“침입이겠지.”

“삐잇! 삣!”

라실리아의 어깨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피피가 돌연 고개를 치켜들더니 마구 날개를 퍼덕였다.


“으앗!”

창밖을 쳐다보던 세르벤이 소리를 질렀다. 정문 쪽에서 거뭇한 것들이 폭죽처럼 확 번져 오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마물입니다, 폐하!”

세르벤은 직접 마물을 겪어 보지 않았다. 그러나 리얀의 말에 의하면 칼로 죽일 수 없는 것들이라고 했다.

근위대 기사들은 그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을 것이다.

다급해진 세르벤은 그대로 칼을 뽑은 채 창문을 뛰어내리려고 했다.


“멈춰.”

레스칼이 그를 말렸다.


“네, 폐하?”

대답에 앞서 레스칼의 눈이 라실리아를 잠시 향했다. 그가 말로 하지 않는 길고 긴 당부가 순간의 눈빛에 모두 담겼다.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인간의 힘이 마물을 소멸시키지 못한다는 걸.

지금은 라실리아의 곁을 잠시 비워야 했다.


“여기 남아. 황후를 지켜라. 덜 자란 새와 함께.”

“삐!”

피피가 자기도 마물을 상대할 수 있다며 소리를 질렀다.


“멍청한 게 아니라면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 너나 나 둘 중의 하나는 함께 있어야 한다는 걸 잊지 마라.”

“삣!”

“억울하면 빨리 자라든가.”

그대로 창문을 향해 다가간 레스칼이 창틀을 밟더니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앗!”

라실리아가 레스칼을 뒤쫓았다. 그러나 세르벤이 말리는 게 우선이었다.


“창가는 위험합니다, 황후 폐하!”

탁!

세르벤이 단호하게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렸다.


“폐하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정도 높이에서 뛰어내렸다고 다치거나 하시는 분이 아니라서요.”

“……말을 해 주면 되잖아.”

뒤늦게 놀란 마음을 다독인 라실리아가 작게 내뱉었다.


“왜 내게는 말도 없이…… 멋대로 가 버리는 건데.”

몰랐다. 그가 아무 말 없이 사라지는 게 이런 기분을 들게 할 줄은.

갑자기 창문 밖으로 훌쩍 뛰어내린 것도, 그걸 지켜보는 것도 이렇게나 가슴이 뚝 떨어져 나간 기분이 들 줄 몰랐다.

걱정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순간이 오리라는 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말씀을 못 하셨던 게 아닐까요. 시간이 급한 일이라……. 아니, 마음이 놓이지 않는 일이라.”

“그건 무슨 뜻이지?”

라실리아가 숨을 들이쉬며 세르벤을 돌아보았다. 세르벤이 여느 때보다 긴장한 얼굴로, 오른손을 칼에 얹은 채 경계를 돋우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든 마음이 놓이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그래서 몸이 먼저 움직였을 겁니다. 폐하께서는 원래 말이 많으신 분이 아니고……. 제 말재주로 다 설명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기사에게는 몸이 먼저 아는 순간이 있습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해도 뭔가 달라지는 게 아니니까 차라리 빨리 해결을 보려고 했다는…… 그런 뜻인가.”

“그렇게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라실리아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래도 마음이 상하는 건 마찬가지야.”

“그, 그러십니까…….”

세르벤은 주변을 경계하는 가운데서도 라실리아를 어떻게 더 위로할지 몰라 난처해했다.

하지만 라실리아는 위로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게 걱정할 시간도 주지 않는 건 서운한 일이다.”

“아……. ……아?”

“삐이?”

라실리아가 고개를 한껏 치켜드는 피피를 쓰다듬으며 작게 속삭였다.


“나도 내가 이렇게나 걱정이 많은 사람인 줄 몰랐어.”

“삐이이…….”

그 순간 세르벤과 피피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걱정이 이렇게나 다정한 말이었을까, 라는.

* * *



“……미친!”

레스칼이 마물의 존재를 감지했던 것처럼, 리얀도 그랬다.

티온이 자초지종을 설명하기도 전에 리얀이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아, 그쪽 전하께 한 말이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먼저 가 보겠습니다!”

휙!

오러를 끌어올린 리얀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달려가 버렸다.


“히익! 저게…… 아니, 분명 아니었는데. 그럼 설마…… 제국에 소드 마스터가 탄생한 겁니까?”

티온이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에셀리온이 굳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유감이지만, 그렇다.”

“정말이지 유감이로군요. 소드 마스터에 가장 근접한 인물은 전하신 줄 알았는데요……. 아, 이럴 때가 아닙니다, 전하! 정문에 낯선 자가 셋이나 나타났습니다! 자기 몸을 소환진으로 쓰던 인간이 아닐지 우려됩니다!”

키이이욱!

캬욱!

티온의 말을 거드는 것처럼 희미하게 마물이 내지르는 울음소리가 바람에 섞여 들었다. 티온의 안색이 변했다.


“전하, 어서……!”

“아니.”

그러나 에셀리온은, 라실리아 님을 노리는 마물들의 재등장에 아주 낯선 반응을 보였다.

이상할 정도로 침착한 얼굴로 그가 말을 이었다.


“예니온을 합류시켜.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라실리아 님을 구할 것이다.”

“다른 방식이라면……,”

티온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왠지 그게 마물들을 없애겠다는, 지극히 당연한 방식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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