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가려진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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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가려진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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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가려진 진실
2023.06.14.
쨍그랑, 하더니 기척이 사라졌다.
잠든 라실리아의 귀를 살짝 막고 있던 레스칼이 밖에서 얼쩡대던 인간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 손을 치웠다.
“으음…….”
라실리아가 깰 것처럼 작게 몸을 뒤척였다. 레스칼이 순간 숨을 참으며 동작을 멈췄다.
다행히도 라실리아는 잠시 몸을 부스럭대다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한시름 놓은 레스칼이 베개 위로 흩어진 라실리아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정돈했다. 머리칼을 건드려도 깨지 않자 손짓이 조금 과감해졌다.
뺨을 살짝 건드려도 라실리아는 깨지 않았다. 안심한 레스칼이 뺨을 만지작댔다.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오늘 라실리아와 보낸 시간이.
라실리아가 날짜를 정하자고 했고 준비라는 말을 꺼냈다. 감히 믿어도 되는지 겁이 나기도 했다.
“…….”
잠이 든 라실리아의 입술은 평소처럼 살구색이 아니라 장미색으로 보였다.
좀 전까지 그 입술이 자신에게 해 주던 일을 생각하면 머릿속이 멍해졌다. 몇 번이나 살갗에 닿았고 제 입술이 삼키도록 허락해 주었다.
눈을 가늘게 감고 순순히 제 목을 안아 주는 라실리아가 너무 예뻐서 여러 차례 심장이 멈추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행복이나 천국 같은 말의 의미를 이제껏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순간에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무엇을 천국이라 하는지.
천국은 심장이 멈추는 곳이었다. 동시에 심장이 멈추지 않기를 바라는 곳이었다.
그 무엇도 끝이 나서는 안 되니까.
그래서 레스칼은 아주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우아하고 가벼운 동작은 라실리아를 조금도 건드리지 않았다. 발소리를 죽여 침실 문을 연 레스칼이 보초를 서는 근위대를 통해 데칸을 불렀다.
데칸이 빠르게 나타났다.
마침 그는 마법사 길드에게 시체를 넘길 준비를 하고 돌아오던 참이었다.
“조용히.”
레스칼은 침실 문을 최소한으로 열어 둔 채 그를 맞이했다.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조용히 하라는 건 황후가 잠들어 있고, 레스칼은 황후를 깨우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데칸이 대답 대신 고개만 조용히 끄덕였다.
“델라르타의 왕자가 아직 근처를 얼쩡대는 이유를 알고 있나?”
“시그레스 경의 말에 따르면 피엘리온 가문에 자금 지원을 요청할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황후 폐하께서 손님이라 지칭하셨으니 아마 개인적으로 자금을 약속하셨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빚이 있다는 게 그건가?”
“황후 폐하께서는 예언을 알리지 못해 베르호예트 왕이 죽었다고 여기십니다.”
“잘됐군.”
“…….”
조금 엇나간 발언에 데칸은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렸다. 레스칼은 쓸데없이 말이 길어지는 걸 싫어했고, 그래서 딱 필요한 말만 했다.
레스칼이 이상한 화법을 쓴다고 여기는 사람은 라실리아밖에 없었다. 그리고 별로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레스칼이 억지를 쓰고 싶은 사람은 라실리아뿐이었으니까.
“지금 돈을 가져다줘라. 백만…… 아니 천만 크리온을.”
“네?”
난데없는 액수에 데칸이 깜짝 놀랐다.
“그 돈이면 내전 단위가 아니라 제국이 전쟁을 치를 수 있습니다, 폐하.”
“그러니 거절할 명분이 없겠지. 다시 올 이유도 없고. 돈을 받고 곧장 떠나라고 해.”
“명을 따릅니다. ……하지만 황후 폐하의 뜻도 함께 있어야 할 일이 아닐까요.”
자금을 지원하는 일은 굳이 새벽이 아니더라도 괜찮았다.
라실리아가 이미 지원을 약속한 일을, 레스칼이 중간에 가로채 델라르타의 왕자를 쫓아내는 모양새가 된다면 라실리아 입장이 불편해질 수도 있었다.
“지금 리얀이 델라르타의 왕자와 칼을 겨누고 있을 것이다.”
“네? ……어째서,”
“델라르타의 왕자가 방금 전 여기를 얼쩡거렸으니까. 쥐새끼처럼.”
레스칼의 무표정에 선연한 경계가 떠올랐다. 데칸이 어깨를 움찔댔다.
“대체 왜 그런 짓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이미 그들을 손님으로 맞아들이셨습니다. 손님이 된 자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악감정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 반대겠지.”
레스칼이 말을 마치며 잇몸을 드러냈다.
그가 이렇게까지 불쾌해하는 얼굴을, 데칸은 이제껏 보지 못했다.
“그 반대라는 건 설마 황후 폐하에게……,”
“다시는 발을 못 붙이게 해라. 국경을 벗어나는 것을 확인해. 필요하다면 마법사 길드를 부려도 좋다.”
말을 타고 꺼지는 시간도 짜증나니 주술이든 마법진이든 써서 빨리 보내 버리라는 뜻이었다.
“알겠습니다, 폐하.”
세르벤과 리얀에게서 각각 전해 들은 말에 따르면 델라르타의 왕자가 과거의 예언자를 대하는 태도가 과도하다고 했다. 둘 다 한결같이 감시를 늦추지 말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한밤중에 황후의 침실 근처를 얼쩡댔다는 것은 더 이상 그를 용납할 수 없는 이유였다.
“지금 처리하겠습니다. ……아, 그런데 황실 근위대 수석기사와 충돌이 있다면 그것은 제국법으로 해결을 해야 할 일 아닙니까?”
“놔둬. 리얀이 알아서 할 것이다. 만일 델라르타인이 부상을 입었다고 해도 제국 내에 머물 시간을 허용하지 마라. 주술로 이동하는 게 더 편하다고 해 버려.”
“명을 따릅니다, 폐하.”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는 시점이었다.
마치 그 틈을 노린 듯 새로운 일이 터졌다.
“폐하.”
보초를 서던 근위대가 공작저의 집사와 함께 다가왔다.
“이자가 황후 폐하께 알현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뭐?”
레스칼의 금안이 불쾌감을 숨기지 않은 채 집사를 향했다.
안 그래도 얼굴이 온통 창백해져 있던 집사는 쓰러질 것처럼 무릎을 휘청이며 황실 근위대에 매달렸다.
“하, 합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 죽어가던 피엘리온 공작이 깨어났다.
집사는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공작을 살피다 그가 깨어난 것을 알았다.
하지만 도무지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고 했다.
* * *
레스칼은 내내 말리고 싶은 눈치였지만 라실리아는 침대에서 내려섰다.
잠옷 위에 두툼한 가운을 걸치고 슬리퍼를 신은 차림새로 침실을 나섰다.
라실리아가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공작의 침실을 향하는 동안 레스칼은 그 옆을 지키며 세르벤에게 가운을 하나 더 챙겨 오라는 명을 남겼다.
“이게……?”
하여간 차림새를 신경 쓸 여유도 없이 향한 공작의 침실은 텅 비어 있었다. 세르벤이 침착하게 문이 열린 방향을 쫓아 공작이 서재로 향한 것 같다는 추측을 했다.
그렇게 다시 서재로 향했다.
서재 역시 아무도 없었다.
대신 남은 것은 공작이 빠르게 휘갈겨 쓴 느낌의 편지였다.
“합하의 필체가 맞습니다.”
집사가 확인했다.
편지의 내용은 놀라울 정도로 간단했다.
자신은 당분간 공작저를 떠나 있겠다는 것.
지시 사항이 있을 때는 편지를 보내겠다는 것.
자신이 아닌 누구도 공작령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
특히나 황후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황후는 피엘리온 가의 상속자가 아니라 황실의 일원이라고 못을 박았다.
“엄청나게 이상한 내용인데요.”
세르벤이 눈을 끔벅대며 말했다. 저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이 잡힌 상태였다.
“임종을 기다릴 정도로 병약해진 상태에 있는 사람이 갑자기 깨어나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사용인들조차 모르게 사라졌다고요?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너무도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네 주술로 확인할 수 있지 않아? 이걸 진짜 피엘리온 공께서 쓰셨는지.”
세르벤의 제안에 데칸이 라실리아를 바라보았다.
“허락하시면 손을 쓰겠습니다.”
“허락한다.”
라실리아의 손에서 편지를 건네받은 데칸이 짧게 주문을 외웠다.
“……피엘리온 공이 쓰신 게 맞습니다. 다른 인간의 흔적은 없습니다.”
주술이 끝나고 데칸이 이렇게 말하자 공작가의 집사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합하의 필체는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합하께서 남기신 게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더 말이 되지 않았다.
데칸과 라실리아는 공작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했다. 공작은 편지를 쓰기는커녕, 펜이 뭔지도 기억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피엘리온 공이 깨어났을 때 뭔가가 이상하다고 했지. 정확히 어땠나?”
라실리아가 집사에게 물었다.
집사가 훨씬 안정이 된 안색으로 다시금 자세를 반듯하게 갖추었다.
“그게…… 갑자기 너무 강녕해지셔서 말이 되지 않는다 여겼습니다.”
“그게 다였나? 그렇다면 나를 급히 찾은 이유는?”
“합하께오서 침대에서 일어나셔서…… 그대로 서 계셨습니다. 제가 여쭈어도 답이 없어서 순간 놀란 마음에 뭔가 잘못되었다 생각해 당장 황후 폐하께 알려야겠다고 여겼습니다. 경솔한 판단이었음을 지금 깨달았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황후 폐하.”
그때는 그랬다.
공작이 갑자기 벌떡 침대에서 튀어 오르는 바람에 집사는 기절할 듯 놀랐다. 두 발로 바닥을 딛고 선 공작의 두 눈이 몹시 컴컴해 보였다. 몇 번을 불렀으나 대답 없이 자신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 공작이 얇게 입술을 벌렸을 때, 집사는 자신이 물어뜯길 것 같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미친 듯이 달려 나왔다. 그때는 무서워 죽을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평소와 다름없는 공작의 필체를 확인하고 나니 그저 자신이 놀라서 엉뚱한 생각을 했구나 싶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명쾌한 글을 쓰셨으니 공작은 너무도 멀쩡한 상태일 것이다.
집사는 뼛속까지 공작가의 사람이었다. 행여나 공작의 명예에 누가 될 법한 발언은 실수로라도 입에 올릴 일이 없도록 단련이 되어 있었다.
“다시 생각해 보고 답하도록.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게 확실한가?”
“물론이옵니다, 황후 폐하.”
집사는 스스로도 공작에게 아무런 일이 없다고 믿어 버렸다. 그러면 공작가에도 아무 일이 없는 셈이니까. 이전과 똑같을 테니까.
“편지를 보셔서도 아실 테지만 합하께서는 평소처럼 아주 명민한 상태이십니다.”
그것이 그저 바람인지 아니면 진짜인지, 집사는 더 이상 구분을 짓지 않았다.
그렇게 믿어 버릴 뿐이었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공작저를 떠난 것이지?”
“외람되오나 제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이옵니다, 황후 폐하. 합하의 뜻이었을 테니 저는 그저 따를 뿐이옵니다.”
집사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이만 물러가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합하께서 공식적으로 저택을 비우셨으니 이 미욱한 몸에 많은 일이 남겨졌사옵니다.”
“……그렇다면. 허락하겠다.”
집사에게서는 거짓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라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집사가 서재를 떠났다.
“무언가 감추고 있는 게 아닐까요?”
데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글쎄……. 믿을 수 없는 정황이긴 하지만 그에게서 거짓은 읽히지 않는군.”
“흠. 그렇다면 피엘리온 공께서 갑자기 회복되신 걸까요?”
“아니.”
이 말은 레스칼이 했다.
데칸과 라실리아가 동시에 레스칼을 바라보았다.
“폐하? 뭔가 보이는 게 있으십니까?”
“아직. 그러나 뭔가 이상해.”
레스칼이 공작이 편지를 썼다는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슥 훑었다.
“가려진 냄새가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