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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소드 마스터의 탄생 (81/96)


81. 소드 마스터의 탄생
2023.06.11.



 


“역시……. 사실이었군.”

슷!

에셀리온은 그 순간 눈이 멀었다. 표정에서 온기가 사라지며 손도 대지 않은 칼이 스르륵 칼집에서 뽑혔다. 보라색 기운이 뭉클하게 일어 칼을 감쌌다.

리얀이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아니, 그래서 지금 제 목을 치기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제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라실리아 님은 신의 대리인. 그분의 안위는 신의 안위만큼 중요하다. 그분을 향한 위협을, 신의 힘으로 제거하겠다.”

스륵…… 탓!

허공에 떠오른 칼을 에셀리온이 잡았다. 리얀의 왼손은 아직도 굳어 있는 상태였고, 자연히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했다.


“아, 진짜 큰일이네. 그래도 아직은 황후 폐하의 손님인데……,”

쨍그랑!

리얀은 칼을 잡는 대신 건물 밖을 향해 난 창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라실리아와 레스칼이 이 시간까지 한 방에 있었다. 그건 라실리아의 목숨을 노리는 마족이 나타난 이 시점에서, 몹시 중요하고도 절대 방해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괜한 칼싸움으로 소음을 만드느니 장소를 옮기는 게 나았다.

휙, 탁!

리얀이 3층 벽 모서리의 불사조 장식품의 머리를 밟고 2층 베란다 난간으로 내려섰다.

고개를 힐긋 돌려보니 에셀리온 왕자가 어렵지 않게 제 뒤를 따라오는 중이었다. 손에 쥔 칼을 두른 보라색 기운이 더 짙어졌다.


“……다시 봐도 오러 같다니까. 몰랐으면 깜박 속았겠어.”

입술을 비죽인 리얀이 다시 훌쩍 몸을 날려 1층 정원으로 내려섰다. 충격을 줄이기 위해 허공에서 몸을 두 번이나 뒤집어야 했다.


“폐하는 벌써 알고 계시겠지만 황후 폐하께도 들리지 않아야 하니…… 좀 더 이동하는 게 좋겠네.”

발이 땅에 닿자 리얀이 죽을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아마 달리기로만 따지면 리얀이 더 빨랐을 것이다.


“그만.”

팟!


“……읏!”

보라색 기운이 발목에 닿는 것을 본 리얀이 소스라치게 놀라 다급히 발을 차내며 옆으로 굴렀다.


“도망치는 꼴을 봐줄 거라 생각했나.”

에셀리온이 급격히 거리를 좁혀 왔다. 리얀이 구르던 몸을 퉁겨 홱 일으킨 뒤 검을 꺼내 들었다.


“아니, 그래도 다짜고짜 저주라니. 너무하잖습니까. 저는 아직 왼손도 치료 못 했는데.”

“그 경박한 말투는 죽을 자리에 와서도 버릴 수가 없는 모양이군.”

“아, 제 말투가 경박합니까? 딱히 그런 줄은 모르고 살았습니다.”

“제국의 황족들은 전부 제정신이 아닌가.”

탓!

카칵!

검이 부딪쳤다.

빠르게 치고 들어오는 에셀리온의 검을 막아 낸 리얀이 황급히 손목을 꺾어 칼끝의 사정권을 벗어났다.

보라색 기운이 감도는 칼날은 닿는 것만으로도 손해일 것이다.


“아, 이걸 어떻게 상대하지.”

리얀이 혀를 찼다. 기분 탓인지 벌써 칼날에 이가 나간 것 같고 그랬다.


“잘 아는군. 인간이 신의 저주를 상대할 방법은 없다.”

“으음……. 그렇다고 얌전히 죽어 줄 수는 없잖습니까. 아, 물론 지은 죄가 있긴 하지만.”

캉!

칼날이 섬뜩하게 목 아래를 치고 들어왔고, 리얀은 손해를 감수하고 다시 에셀리온의 칼을 걷어 내는 수밖에 없었다.

툭, 하고 제 칼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리얀이 이를 물었다.


‘진짠데, 이거. 받아칠 때마다 칼날이 나가는 거야.’

보라색 기운이 닿을 때마다 칼날이 삭고 있었다. 아무리 빠르게 걷어낸다 하더라도 닿는 이상 소용이 없었다.

왼손은 불편하고, 상대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데도 가슴은 주책맞게 두근거렸다.


‘진짜 오러를 상대해도 이런 기분일까.’

방법은 없고, 상대는 칼날이 안 박히는 두꺼운 벽 같았는데 저는 신나서 벽을 두들기고 있었다.

죽도록 두들기면 그래도 흠집이 나지 않을까 해서.

캉, 퍽!

순식간에 공격이 오고 갔다.

치사하게도 에셀리온은 단 한 차례도 집중력을 흩트리지 않았다. 칼 실력은 비등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조금 더 빠를 것이다.

그러나 에셀리온은 이대로 공격을 잇다 보면 리얀의 칼이 먼저 망가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떡한다. 그럼 이쪽으로서도 먼저 공격에 성공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저주의 힘이 원거리에서도 가격이 된다는 게 문제였다. 빈틈을 유도해 사각지대를 만들고, 상대를 치고 빠진다 해도 한 번에 목숨을 끊지 않는 이상 언제라도 저주에 당할 수 있었다.


‘죽이는 건 좀 그렇지. 망국의 왕자라도 왕족은 왕족이고 일단 황후 폐하의 손님이니까. ……기절시키는 건? 아냐,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할 인물은 아니지. 그럼……,’

리얀의 눈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제국 내 제일가는 기사가 찾은 방법은 손이었다.


‘저주도 신성력의 일종이니 신체를 사용해 힘을 외부로 방출하겠지.’

신관들이 치유력을 쓸 때를 생각해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대부분 상처를 손으로 매만지며 낫게 했다.


‘일단 해보자고.’

……탓!

리얀이 몸을 낮췄다. 그저 낮추는 게 아니라 굳은 왼손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낮췄다. 예상했던 대로 에셀리온이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얍!”

왼손에 무게 중심을 실은 리얀이 다리를 뻗어 에셀리온의 발목을 걷어찼다. 리얀이 왼손을 그렇게 쓸 줄 몰랐던 에셀리온이 잠시 놀랐으나, 어렵지 않게 보폭을 조절해 리얀의 발을 피했다.


‘쳇. 훈련을 아주 성실히 하셨군.’

리얀은 왼손 대신 어깨를 움직여 몸을 비틀었다. 순간적으로 상반신이 들리며 가슴이 노출되었다. 에셀리온이 망설임 없이 허리를 틀어 리얀의 가슴을 노렸다.


“아주 빠르시네요, 전하?”

리얀은 바닥으로 드러누우며 왼손을 들어 올렸다.

퍽!

제 손에서 엉뚱하게도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파랗게 굳은 손목에 에셀리온의 칼이 틀어박혔다.


“하지만 그래서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리얀이 씩 웃으며 발꿈치로 지면을 걷어차 몸을 일으켰다.

사악!

리얀이 노린 것은 검을 쥐고 있는 에셀리온의 오른손이었다.

몸을 일으키는 것과, 목표를 향해 지체 없이 칼을 휘두르는 것. 모두 순간의 일이었다.

칼날이 에셀리온의 손목을 베었다. 그러나 동시에 쩌적, 하며 리얀의 칼날에 금이 갔다.


“젠장.”

그래서 힘을 잃은 칼은 살갗을 베는 데 그쳤다.

……툭!

부러진 칼날 반쪽이 떨어졌다.


“……젠장!”

리얀의 입에서 다급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피 흐르는 에셀리온의 오른손에서 보라색 기운이 미친 것처럼 뭉클뭉클 솟구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스스슷!

그 기운이 리얀을 덮쳤다.


“……컥!”

신의 저주란 이런 것이었다.

단숨에 손이 굳었던 것처럼, 온몸이 굳어 갔다. 살갗만 굳는 게 아니라 그 속의 뼈와 장기들도 함께 굳어 갔다.

숨이 막혔다. 폐가 굳고 있을 것이다.

자신은 죽어가는 중이었다.


‘제기랄……. 딱 이만큼만 덜 부러지지.’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그 순간, 리얀은 단 한 가지를 생각했다.

칼이 손가락 두 마디만큼만 더 남아 있었다면.

그랬다면 저주를 뿌려대는 저 오른손을 자를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조금만 더……!’

리얀은 오른손으로 쥔 칼끝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자신이 곧 죽으리라는 사실은 단 한 순간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오로지 저 손을 어떻게 잘라 낼 수 있는지, 저 손을 잘라 낼 수 있을 만큼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조금 더……, ……!”

그때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다.

부러진 칼날이 늘어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주 많이는 아니었지만, 정말로 딱 손가락 두 마디만큼.


“할 수 있어!”

사악!

리얀이 칼을 휘둘렀다.

……탓!

설마 리얀이 아직 살아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에셀리온이 한 박자 늦게 몸을 피했다.


“아, 젠장. 놓쳤네.”

리얀이 보라색 기운에 꽁꽁 둘러싸인 오른손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에셀리온의 발밑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으로 봐서, 못해도 반은 갈라 놓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아까워라. 이대로 죽으면 아쉽……. ……음? 근데 나 왜 안 죽었지?”

더 이상한 점은 미쳤다 싶을 정도로 온몸에 기운이 넘쳐난다는 것이었다.


“어라?”

리얀이 얼떨떨한 얼굴로 부러진 검을 쥔 오른손을 슥 저었다.

그러자 칼날이 쑥 늘어났다. 부러지기 전처럼.


“우와.”

리얀이 칼끝을 세웠다. 재미있게도 리얀의 오른팔에 투명한 보라색 기운이 감겨들었다.
 

 


“비슷해 보이는데요. 안 그렇습니까, 전하?”

“그건…… 오러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아, 대체 어떻게 소드 마스터가 되나 했더니 이렇게 엉겁결에도 되나 봅니다. ……이야, 기사단 은퇴하고 자서전 쓰면 돈 좀 벌겠네.”

“……. ……아냐, 그래도 아직 내가 불리한 건 아니야.”

에셀리온이 입술을 꾹 물었다.

갑작스러운 오러의 등장은 충분히 당혹스러웠다. 그의 오른손은 칼을 쥐고 있는 게 고작일 정도로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한 손을 못 쓰는 것은 제국의 그림자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이 손 때문에요?”

리얀이 왼손을 들어 올렸다. 저주로 인해 파랗게 죽어 가는 손을 바라보던 리얀이 오러를 더 짙게 키웠다.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은데.”

그 상태에서 왼손 위로 무언가를 잘라내듯 칼을 슥슥 긋자 무언가 베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에셀리온의 안색이 변했다.

리얀의 왼손이 원래대로 돌아와 가볍게 손가락을 움직여 보고 있었다.


“더 하실 겁니까?”

“…….”

“어지간하면 여기서 그만두시죠. 그러시면 제국의 기사를 상대로 칼을 꺼내신 일은 없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황후 폐하를 위해서라도 손님으로 남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에셀리온의 표정이 비틀렸다.


“황후 폐하를 위해서……라고?”

“네. 황후 폐하를 위해서 저도 제발 그러고 싶습니다. 뭐, 그리고 사실 제가 벌을 받아야 하는 건 맞으니까요. 너무 쉽게 용서를 받긴 했어.”

“네가 저지른 짓을…… 라실리아 님께서 용서하셨다는 말인가?”

“네에. 말도 안 되게 너그럽고 상냥하고 공정하신 분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아, 그러고 보니 제 오러가 꼭 황후 폐하의 눈동자 색 같지 않습니까? 모르고 있었는데 오러는 주인을 닮는 모양입니다. 제가 오러를 쓸 때마다 황후 폐하께서 주신 오러라는 것을 모두가 알겠군요. 괜히 막 뿌듯하고 그러네.”

“거짓말! 그런 짓을 어느 누가 용서할 수 있나!”

에셀리온이 소리를 지르자 저주의 기운이 뭉클 피어올랐다.

리얀은 당황하지 않고 검을 들어 눈앞에 세웠다.


-그러니 원하는 대로 강해지도록.

라실리아의 그 말이 제게는 주술이 된 것 같았다. 아니, 같은 게 아니라 정말이었다. 그 말이 제게 주문을 걸어 오러를 피워 올리게 했을 것이다.

마족의 반려는 가장 위대했던 주술사였으므로.

라실리아에게 주술사의 힘이 있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기서 그만두시길 권합니다. 저는 절대 전하의 손에 죽지 않을 거라.”

“그 가증한 입을 먼저 베겠다.”

에셀리온의 저주가 검을 허공에 띄워 올렸다.

어쩌면 이제껏 대륙의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던 싸움이 벌어졌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을 말리는 자가 있었다.


“전하!”

티온이 부리나케 달려오고 있었다. 빠르기로만 따지자면 대륙 어디에서도 따라올 자가 없었다.


“뭘 하고 계셨든 간에 잠시만 참아 주십시오! 지금은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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