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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악몽 (2) (80/96)


80. 악몽 (2)
2023.06.07.


어찌 된 일인지 자신은 라실리아와 한 방에 있었다.

라실리아는 자신이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제국의 그림자 기사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황제가 나를 죽일 것이다.

-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예언자로서 꿈을 꾸었다.

라실리아는 몹시 두려운 얼굴을 했다. 라실리아가 흰 손을 들어 그림자 기사를 붙들었다.


-그대에게 내 목숨을 맡기겠다. 황제에게서 나를 지켜다오.

-황후 폐하.

하지만 그림자 기사는 냉정했다.

차갑게 라실리아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선 기사는 두려워하는 라실리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국의 황후에게는 의무가 있습니다. 황실에 흐르는 마족의 피를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알려진 대로 동침이고.

라실리아의 얼굴이 희게 질려 갔다.

그 대화를 듣고 있는 제 얼굴도 그랬을 것이다.


-쓸데없는 예언에 겁을 내는 대신 황후의 의무를 다하십시오. 황후가 의무를 다하면 폐하께서 새삼 목숨을 취하실 일도 없을 겁니다.

-내 의무가 뭔지는 나도 알고 있어. 그렇기에 타국의 예언자였던 정체가 드러나도 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걸.

-안다니 다행이군요. 그런데 왜 의무를 저버리고 있는 겁니까?

-나는…… ……지 않으니까.

그림자 기사가 인상을 썼다.


-뭐라고요?

-……황제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림자 기사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게 말이 됩니까? 마족의 반려로 태어나신 분이?

라실리아의 아름다운 얼굴에 슬픔이 그림자를 만들었다.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체념과 고통이 어린 눈으로 라실리아가 자신을 바라보았다.


-내가 사랑하는 게 누군지 전하는 알고 있습니다.

순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라실리아 님. 그게 누군지 알려 주십시오.

라실리아가 사랑하는 그라면 이 미친 것 같은, 괴상하기 짝이 없는 반려의 운명에서 라실리아를 구할 수 있을까.


-제가 그를 라실리아 님의 곁으로 데려오겠습니다.

라실리아의 보라색 눈에서 눈물이 한 줄기 굴렀다.


-어째서 모릅니까.

-라실리아 님.

-거기 그렇게 서 있으면서.

  

 


-……!

괴상한 꿈이 거기서 끝났다.

아니, 꿈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은 제국의 황제가 도착했다는 말을 전해 듣기 전까지 라실리아와 함께 공작저의 서재에 머물렀을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생생하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꿈이 아니라 기억일 수는 없을까.

지금도 라실리아가 울던 얼굴이 또렷했다. 너무 선명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라실리아는 마족의 반려라는 운명을 원치 않았다. 그러니 신께서는 라실리아에게 예언자의 죽음을 보여 주셨을 것이다.

그 어떤 예언자도 자신의 운명을 예언한 적은 없었다. 신은 그렇게 편파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건 신께서 델라르타의 예언자가 마족의 반려가 되는 걸 원치 않으신다는 뜻이었다.


“티온, 제국의 기사들이 어땠나?”

여전히 창백한 에셀리온의 얼굴을 걱정스레 쳐다보며 티온이 작게 입술을 움직였다.


“예상외로 뛰어났습니다. 소문이 과장됐을 거라 생각했는데. 근위대의 움직임도 하나같이 잘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훈련량이 무시무시할 겁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면? 어떤 점을 물으시는 겁니까, 전하?”

꿈속에서 엿들은 그림자 기사의 냉혹한 말투를 떠올리며 에셀리온이 이마를 일그러트렸다.


“라실리아 님께 충성하듯 보이던가?”

“음? 그러지 않을까요? 제 눈에는 그래 보였던 것 같은데…… 장담하라 하시면 그건 좀.”

티온이 말끝을 흐렸다.

사실 그림자 기사의 칼솜씨에 정신이 팔려 라실리아를 대하는 태도 같은 건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만일 기사의 태도에 뭔가 문제가 있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건 별 특이점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에셀리온이 저렇게 땀범벅이 된 얼굴로 물으니 뭔가 억지로 쥐어짜 내야 할 것 같고 그랬다.


“음…… 말투가 좀 경박했달까요?”

경박하다기보단 묘하게 거리감이 없었다.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격식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라실리아도 문제 삼지 않는 걸 보면 원래 그런 성격이려니 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그저 그 정도였는데, 에셀리온은 뭔가 대단히 심각한 일처럼 눈을 빛냈다.


“타국의 왕족이 있는 자리였으니 황실 근위대 수석기사라면 평소 말투를 감추었을 것이다. 그래도 경박한 어조는 남아 있는 모양이지.”

“어…… 그런 걸까요?”

“라실리아 님은 내가 당신의 손님이니 무례하게 굴지 말라고 하셨다. 그건 그림자 기사들이 라실리아 님께 무례하게 구는 게 일상이라는 뜻이지 않겠나?”

“음, 그게…… 저는 거기까진 잘……,”

“생각해 봐. 델라르타 왕실의 근위대가 그런 적이 있었는지. 감히 왕족의 손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여는 일조차 없었다.”

사실 티온은 왕실 근위대였던 적이 없어서 비교를 할 수가 없었다.


“전하께서 그러시다면 그게 맞지 않을까 합니다.”

“그림자 기사라는 이름은 황제의 그림자가 되어 지어졌다고 했는데. 하지만 교대로 라실리아 님의 호위를 맡았지. ……호위를 빙자해 감시를 하고 있었나.”

“아……? 황후를 감시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제국에서는 이미 예언자님의 원래 이름도 알고 있다고 했는데.”

“라실리아 님께서 마족의 반려가 되길 원치 않으시니까.”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짐작하는 에셀리온에게 라실리아는 자신이 예언자라 믿었기에 예언자의 삶을 받아들인 것처럼, 마족의 반려라는 운명을 믿고 있기에 황후라는 새로운 삶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하지만 선명한 악몽이, 스스로 꿈이 아니기를 바라게 된 그 기억이 에셀리온의 이지를 헝클였다.

지금 그에게 가장 뚜렷한 것은 라실리아가 흘리던 눈물이었다.

신의 눈물을 닮은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어쩌면 신이 흘리시는 눈물인 게 아닐까.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신께서 바라신 게 아닐까.

델라르타의 예언자를 되찾아 오라는.


“……확인해야겠다.”

에셀리온이 휙 몸을 일으켰다.


“전하? 시간이 늦었습니다. 무얼 확인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예니온은 자고 있나? 깨워. 어쩌면 이곳을 떠나야 할 수도 있으니까.”

“공작가의 지원이 결정된 겁니까?”

“지원은 잊어라. 돈이 없어도 우리는 이길 수 있어.”

에셀리온이 벗어 놓은 겉옷에 팔을 꿰었다.


“예언자님이 곁에 계신다면.”

“아…….”

티온의 얼굴이 소리 없이 경직되었다.

이제야 에셀리온이 무얼 하려는지 깨달았다.


“예언자님을 데리고…… 도망치실 겁니까?”

철컥.

에셀리온이 검을 허리에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티온의 안색이 에셀리온처럼 창백해졌다.


“전하. 지극한 충심으로 묻겠습니다. 예언자님께서 지금은 제국의 황후라는 걸 알고 계시는 거지요?”

에셀리온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그렇기에 모셔가야 하는 것이다.”

 

* * *

새벽의 달빛은 차고, 고고했다.

하지만 그 아래 공작저는 어딘가 어수선하고 들뜬 분위기였다.

잠든 자보다는 잠이 들지 않은 자가 더 많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에셀리온은 그 어수선함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확인을 한다고는 했지만 지금 당장 잠든 라실리아를 깨울 생각은 없었다. 대신 지켜보고 싶었다.

무례한 그림자 기사나 마족의 피가 섞인 황제가 라실리아에게 황후의 의무를 멋대로 강요하지는 않는지 뱃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경계를 서는 황실 근위대가 계속 장소를 바꾸며 걸음을 옮겼지만 기척을 숨기고 걷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에셀리온은 라실리아의 침실 문이 보이는 복도 한쪽에 자리를 잡고 몸을 숨겼다.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신경을 집중했다.

라실리아는 어쩌면 아직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간간이 이불을 뒤척이는 소리와 함께 사르륵 옷자락이 비벼지는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

그러다 막힌 숨이 툭, 터지는 소리도 들려왔다.

라실리아는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설마,”

에셀리온이 저도 모르게 발을 움찔했다. 몸이 당장 튀어나갈 것처럼 제어가 어려웠다.

그때 제 걸음을 말리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런. 변태십니까?”

“……!”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저 무례한 말투가 누구의 것인지는 알았다.

들리지 않게 숨을 고른 에셀리온이 리얀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남의 침실을 엿듣다니요. 그것도 제국의 황후 폐하가 쓰시는 침실을. 아, 실수. 말을 잘못했습니다. 제국의 황제 부부가 함께 쓰고 계신 침실을요.”

관자놀이에 힘줄이 치솟았다.

라실리아는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황제가 함께 있었다. 함께, 밤에, 침실에.

속삭이듯이 작은 목소리를 내던 그림자 기사가 저를 향해 손짓을 했다.


“아, 그런데 죄송하지만 이쪽으로 좀 더 와 주시겠습니까? 폐하께서 침실 주변을 비우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수줍음이 많으십니다. 혹시라도 밖에서 기척이 느껴진다면 두 분의 밤이…… 음, 덜 즐거워질지도 모르니까요. 무슨 말인지 아실 거라 믿습니다.”

리얀이 찡긋, 한쪽 눈을 감았다 떴다.

저 경박하고 노골적인 언사보다 저 눈짓이 더 무례하게 다가왔다.


“폐하께서는 이미 전하의 기척을 눈치채셨을 겁니다. 그래도 별 말씀 없으신 것을 보면 황후 폐하의 손님 대접은 해 주겠다는 뜻이고요. 전하를 발견한 사람이 저 하나일 때 다시 얌전히 손님으로 돌아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지금 그렇게 하신다면 황후 폐하께는 달리 고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네. 변명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살펴 가십시오, 전하.”

하지만 에셀리온은 변명을 하려던 게 아니었다.


“네 무례함이 거슬렸다. 처음부터.”

“음……? 아니, 이런. 아직 상황파악을 다 못 하셨나. 설마 무력으로 해결을 보시겠다는 겁니까? 생각대로 안 될 텐데요.”

“내게 무례하다는 것은 라실리아 님께도 마찬가지라는 뜻.”

에셀리온의 말에 리얀이 콧등을 찡그렸다.


“얘기가 왜 그렇게 됩니까? 델라르타의 왕자 전하께서 왜 제국의 황후 폐하와 한 몸인 것처럼 말씀하시는 걸까. 이젠 아무런 상관도 없으신 분을 두고.”

“예언자는 지상에서 신을 대리하는 분이다. 그런 분께 황후라는 허울 좋은 굴레를 씌워 반려의 의무를 강요하는 너 같은 인간을, 나는 용납할 수가 없다.”

리얀이 눈을 끔벅거렸다.

애석하게도 에셀리온이 뭔가를 아는 것처럼 말을 하는 바람에 말실수가 생겼다.


“음? 아니 그걸 어떻게……. 설마 황후 폐하께서 전하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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