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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악몽 (1) (79/96)


79. 악몽 (1)
2023.06.04.



“절대 아냐.”

길고도 긴 키스가 끝났다.

아직도 머리가 멍했다. 라실리아는 키스의 부작용인지 평소보다 두 배쯤 현란해 보이는 레스칼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려 애를 썼다.


“뭐가…… 아닌데요?”

“절대 세 번이 아니라고.”

“아……?”

라실리아는 잠시 멈춘 것 같은 머리로 숫자를 세었다.


‘세 번이 맞을 텐데.’

자신이 입술을 먼저 댄 것은 기억했다. 그 뒤로 어째서 자신이 레스칼의 허벅지에 앉아 있는지, 무슨 이유로 등 부분의 단추가 두어 개 풀려 있는지, 어떻게 머리장식이 떨어져 머리칼이 흐트러지게 됐는지는 조금 모호했지만 입술을 먼저 댄 것은 세 번이 확실했다.


‘어쩌면 세 번이 넘었을지도.’

하여간 그랬다. 자신은 약속을 지켰다.

라실리아는 기운이 빠진 이마를 레스칼에게 기대며 작게 말했다. 곤란하게도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세 번이 맞습니다. 그리고 내려 주시겠어요?”

“아니야.”

레스칼은 라실리아를 내려놓는 대신 오히려 허리를 감싸 안았다.

레스칼의 허벅지에 걸터앉은 자세에서 허리가 붙들리는 기분은 몹시 수상했다. 불편했고, 너무 가까웠으며, 자꾸만 거리감을 의식하게 되었다.


“한 번이야.”

세 번이냐 한 번이냐를 따지는 눈이 너무 진지했다.

게다가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는데 숫자를 세는 건 의미가 없었다.

라실리아가 제법 시간이 흘렀다는 의미로 벽에 걸린 시계를 힐긋 가리켰다. 벌써 새벽이라고 불러야 할 시간이었다.


“잘 시간이 지났습니다.”

“알고 있어.”

레스칼이 입술을 입가에 붙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두 번은 일어나서 해도 돼. 그것까진 욕심내지 않겠다.”

이미 내고 있는 것 같은데.


“세 번이에요.”

“아니. 기억 못 하나?”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등에 손바닥을 대더니 그대로 몸을 기울였다.

등이 손바닥을 댄 채로 소파에 닿았다. 시야에는 천장을 대신해 레스칼의 얼굴이 들어왔다.


“우리가 이 자세로 있었을 때,”

그리고 입술이 불쑥 겹쳐졌다.

레스칼은 키스를 하던 그 순간처럼 라실리아의 아랫입술을 벌렸다. 입술과 입술 사이에서 또 그렇게 젖은 소리가 피어났다.


“그대가 숨을 쉰다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려 했고, 그래서 내가,”

다시 몸이 쑥 들렸다. 이제 반대로 레스칼의 등이 소파에 닿고, 라실리아가 레스칼의 몸 위에 올라오게 되었다.


“이렇게 고개를 틀었어.”

입술이 가까이 맞붙은 상태에서 레스칼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그러자 숨쉬기가 조금 편해졌다. 사실 자세가 변한 탓이라기보다는 환기할 틈이 생겼기에 그런 듯했다.


“그러니까 키스가 끝난 게 아니야. 입술은 한 번도 안 떨어졌어.”

“뭐라는……,”

……거야.


“그 다음도 증명할 수 있다. 입술이 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어.”

“…….”

말이 없어지는 건 그냥 어이가 없어서였다.

세 번이라고 정정하려던 라실리아가 말투를 바꾸었다.


“폐하께서는, 키스하면서 그런 걸 일일이 재고 계셨습니까?”

“음?”

뜻밖의 허를 찔렸던지 레스칼이 잠깐 대꾸를 놓쳤다.


“조금 실망스럽네요.”

“아니, 그게……,”

“한 번이든 세 번이든 생각을 계속 다른 데 두고 계셨다는 점이요.”

“…….”

“저는 아니었는데.”

라실리아가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레스칼의 몸에서 내려섰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원하시는 대로 한 번이라고 치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저도 정신을 차리고 숫자를 세도록 하지요.”

“……그렇게 말하면, 좀 억울한데.”

레스칼이 내려서는 라실리아를 도로 홱 끌어왔다.

좀 전보다 몸이 더 납작하게 레스칼에게 닿았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장난이라고 여기기에는 레스칼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내가 키스를 하다 넋을 놓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

라실리아는 답을 몰랐다.

그런 일은 겪어 본 적도, 어디선가 들어본 적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아주 깜깜하게 모를 것 같지도 않았다.

레스칼의 손가락이 두 개 풀려 있는 단추를 더듬고 있었기에.


“손이 나도 모르게 이랬다. 두 개 열고 나서 그대가 어깨를 비트는 바람에 정신이 들었어.”

 

  
촉, 말도 안 되게 부드러운 입술 소리가 목과 어깨가 만나는 부분에서 번졌다.


“그러니까 나는, 최선을 다한 거야.”

그 최선이 무엇을 위한 최선인지는 묻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라실리아가 한 손을 귓가에 대자 레스칼이 목덜미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사르륵, 눈부신 금발이 손가락 사이를 미끄러졌다.

키스 다음에는 그 이상이 있을 것이다.

온전히 종속되기 위해서도 그 이상이 반드시 필요했다. 서른 살 생일이 되기 전에 그들은 진짜 의미의 동침을 하게 될 것이다.

여전히 생소했지만, 그래서 걱정이 되는 건 아니었다.

레스칼의 눈가가 붉었다. 키스를 하고 난 다음이면 그는 저런 눈을 했다. 흔들림 없이 자신에게 꽂힌 시선은 한 번 깜빡대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를 보면 상대를 향한 욕구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날짜를…… 정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레스칼이 느리게 물었다.


“무슨 날짜를?”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아도 되는 날짜.”

“……. ……?”

레스칼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지 눈동자를 흔들었다.

라실리아가 장난스럽게 눈가를 매만졌다.


“그 전까지 저도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내가…… 제대로 알아들은 건지 잘 모르겠는데……. 그게 그러니까……?”

레스칼이 답을 원하는 건 이해했다. 확신을 얻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말로 하는 건 어려웠다.

잠깐 고민하던 라실리아는 손을 내려 레스칼이 목에 두른 타이를 풀었다.

곧은 턱선이 드러나고, 목젖의 윤곽이 보였다. 제 몸에는 없고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신체 부위였다.


“이런 것.”

“…….”

레스칼이 숨을 꽉 누르는 동안 라실리아는 그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하나, 툭.

둘, 툭.

그리고 셋.


“오늘은 세 개만요.”

“…….”

황제의 의상은 늘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 모습을 위해 시종장 페르손이 어떤 노력을 하는지 라실리아가 모른다는 게 유감이었다.

하여간 라실리아는 셔츠 단추 세 개가 풀어져 평소보다 헝클어져 보이는 레스칼의 모습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 나쁜 게 아니라…….’

그보다는 좀 더 야릇한 느낌이 들어간 단어를 써야 할 것 같았다.


‘더 풀어 보고 싶어.’

직각으로 뻗은 단단한 쇄골의 모양새가 괜히 눈길을 잡아끌었다.


“더 해도 되는데, 내게는.”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손을 홱 끌어와 쥐었다.

눈가가 막 키스를 마쳤을 때보다 더 붉었다. 몽롱한 느낌의 금안은 현란하다 못해 보는 사람의 머릿속도 어지럽게 만들었다.

더 해도 된다지만 그건 진심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랬으면 제 손을 이렇게 꼭 움켜쥐고 턱을 당겨 물지는 않았을 테니까.


“아니요. 저도 더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지금은…… 너무 준비가 안 됐으니까.”

키스 이상이 단순히 옷을 벗겨 본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지금 욕심껏 셔츠 단추를 다 풀어 본다고 해도 그 다음에 무얼 해야 좋을지 제 머릿속은 깜깜하기만 했다.


“그러니까 날짜를 정해요. 그때까지 하나씩 준비를 해 나가도록.”

“내가 지금 머리가 굳은 것 같아서 묻는 건데…… 그 준비가 어떤 준비를 말하는 거지?”

늘 듣기 좋았던 레스칼의 목소리가 지금은 약간 느낌이 달랐다. 깊고 나직한 건 비슷했는데 뭔지 모를 야릇한 감각이 더해져서 귓속을 파르르 울리는 것 같았다.


“예언자라고 해도 단추 푸는 법을 모르지는 않았을 테고.”

초옥, 레스칼이 손톱 끝에 입을 맞췄다.

입술에서 울리는 소리가 귓속을 떨리게 만드는 소리와 비슷해 라실리아는 그의 목소리가 왜 다르게 들리는지 깨달았다.


‘자꾸…… 떨리게 해.’

손끝을, 귓속을.

그에게 붙잡힌 허리를, 그와 닿아 있는 허벅지 안쪽을.


“처음에는 어색하던 것들이 익숙해졌잖아요.”

제 목소리도 그를 닮아 계속 나직해졌다.


“키스도 그렇고, 만지는 것도 그렇고.”

“아아…… 그런 준비.”

“네.”

레스칼의 손가락이 라실리아의 손가락 새를 천천히 문질렀다.


“그런 거라면 혼자 할 수가 없을 텐데. 키스를 혼자 할 수는 없으니까.”

“네.”

“그럼 나와 함께 준비하겠다는 말인가?”

“……네.”

“그럼 좋아.”

그렇게 말했을 때 레스칼의 목소리는 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탁하게 잠겨 있었다.


“날짜를 정해 줘.”

“음…… 한 달 뒤.”

레스칼이 탁한 신음소리를 흘렸다.


“너무 길 것 같은데.”

“그건 폐하께 달렸습니다.”

어디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을까.

말을 해놓고 라실리아도 깜짝 놀랐다.


“어떻게? 날 이해시켜 줘.”

“그게…… 폐하와 함께 준비를 하게 될 테니까…….”

갑자기 레스칼이 불쑥 입술을 겹치는 바람에 뒷말이 그대로 입 안으로 넘어갔다.

입속은 이제 한결 익숙해진 달콤한 감각으로 젖어들었다.


“최선을 다하지.”

“…….”

잠깐 입술을 멈추고 한마디 남긴 레스칼이 키스를 이었다.

잘 시간을 훌쩍 넘긴 밤은 아직도 한참 이어질 기세였다.

그리고 그 시각, 두 사람보다 먼저 잠을 청한 누군가에게 꿈이 찾아들었다.

* * *



“……말도 안 돼!”

에셀리온이 이불을 젖히며 상체를 일으켰다.

얼굴이 온통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달빛에 비치는 얼굴이 너무 창백하게 보여 불침번을 서던 티온도 깜짝 놀랐다.


“전하! 무슨 일입니까?”

“후, 꿈을…… 꿨,”

“아, 악몽이라도 꾸셨습니까?”

“악몽……,”

멍하게 티온의 말을 따라 하던 에셀리온이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물이라도 올릴까요?”

“그게 좋겠다.”

티온이 침대 옆에 놓아둔 물병에서 물을 따라 에셀리온에게 건넸다.

공작저의 별채에는 침실이 여섯 개나 됐지만 에셀리온은 수하들과 한 방에 머물렀다.

아무리 라실리아 님이 신원을 보증했다고 해도 제국에서 공식적인 지원을 약속한 게 아닌 이상 관계가 틀어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언제라도 셋이서 몸을 피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된다는 뜻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전하.”

티온이 넘겨주는 잔을 들어 벌컥벌컥 비우고 나도 여전히 머릿속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잠을 더 주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마물이라는 것들이 다시 나타나진 않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제국의 지원군도 넉넉히 왔으니……,”

“꿈을 꿨다. 그런데 그게 과연 꿈인지 아닌지 모르겠어.”

물잔 덕에 조금은 온도가 내려간 손바닥으로, 에셀리온이 눈가를 쓸었다.

꿈이 너무 생생했다. 그래서 꿈이 아닌 것 같았다.


“어떤 꿈인데 그러십니까? 혹시 반역자라도 나왔습니까?”

“아니.”

손바닥을 치우자 일그러진 눈매가 드러났다.


“라실리아 님이 나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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