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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화를 내는 이유마저 (78/96)


78. 화를 내는 이유마저
2023.05.31.


황궁에서 지원군이 도착한 시간은 자정 무렵이었다.

물론 지원군에는 감히 말도 못 붙일 만큼 분위기가 살벌한 레스칼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 희미하지만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하필이면 데칸도 그즈음에 공작저로 돌아왔다. 귀환 도중에 은의 방패로부터 간략히 사건에 대해 듣긴 했지만 공작저의 분위기는 생각 이상이었다.

살얼음 위에서 눈을 가리고 모닥불을 피워야 한다고 해도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다 무섭게 굳은 얼굴로 라실리아의 손을 꾹 잡고 있는 레스칼 탓이었다.


“이제껏 본 적은 없지만, 크흠, 일종의 마법진으로 보입니다.”

데칸은 자꾸만 목이 타는 바람에 황제 앞에서 헛기침을 하는 무례를 저질렀다. 헛기침을 해도 목이 계속 바싹 말라 간질거렸다.


“그중에서도 소환진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까 소환진으로, 이것들을 사람 몸을 통해 불러냈다는 건가?”

세르벤이 반토막 남은 마물을 괜히 칼끝으로 툭 건드려 보며 물었다.


“관둬. 그러다 내 꼴 된다.”

리얀이 태연하게 퍼렇게 굳은 왼손을 들어 보였다. 세르벤이 질색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우연히 레스칼과 눈이 마주치고는 뱀을 마주친 개구리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데칸이 세르벤에게 이해한다는 눈빛을 잠시 보내며 답을 했다.


“그러리라 짐작됩니다.”

레스칼이 마물을 향해 걸어왔다. 한 손으로는 여전히 라실리아의 손을 꽉 쥔 채, 그가 망토에 감싸인 채 있는 마물을 다른 쪽 손으로 건드렸다.


“으앗, 폐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아직 저주가 묻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리얀이 재빨리 레스칼의 손을 붙들었다. 하지만 레스칼과 눈이 마주친 뒤, 자신도 모르는 이유로 주춤 손을 놓았다.


“하급 마족…… 아니, 말을 할 줄 모른다고 했으니 마물이라 해야겠군. 그런 종류일 것이다.”

레스칼의 말이었다.

공작저에 도착한 뒤로 처음 한 말이었기 때문에 다들 약간 생소한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가 꽉 누른 것 같은 목소리였다.


“으아…… 그럼 뭐라고 해야지……. 마계에서 소환된 겁니까?”

데칸이 물었고, 레스칼은 쓸데없는 말은 보태지 않았다.


“마법사를 불러. 몸에 남아 있는 진의 흔적을 최대한 복원하라고 해.”

“명은 따릅니다만 마계의 존재를 소환하는 진이라면 길드의 마법사들은 아무것도 모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겠지.”

“그럼……,”

“모르니까 알도록. 이제부터. 계속 같은 일을 겪을 게 아니라면.”

“아,”

뒤늦게 알아들은 데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같으면 이렇게까지 둔하게 굴 일이 아니었을 테지만 지금은 긴장을 너무 한 모양이었다.


“명을 전하겠습니다.”

리얀이 주저하다 끼어들었다.


“외람되오나 폐하, 그건 그만 내려놓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저주가,”

“신성력이 통했다고?”

레스칼이 리얀의 말을 잘랐다.


“……네. 저주의 힘이라고 했습니다.”

“의외로군.”

팟!

의외인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레스칼의 손에서 갑자기 붉은 손톱이 자라났다. 단단한 핏빛 보석 같은 손톱이 마물의 몸통을 뚫었다.


“폐……하?”

스르르륵.

토막 난 마물이 저주에 닿았을 때처럼 검은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소멸되는군. 죽는 게 아니라.”

“……아?”

“소환된 것이라 그렇겠지. 소멸시키지 않으면 계속 존재할 것이다.”

“아…… 아, 그래서 칼로 죽일 수는 없고 저주는 통했나 봅니다. 저주는 단순히 목숨을 빼앗는 게 아니라 존재에 흠을 내는 것이니까요.”

“아마도.”

기사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상대할 방법을 찾는 게 급선무겠습니다. ……아니, 왜 그 마족놈은 자꾸 새로운 걸 불러들이는 거야? 인간의 의식을 빼앗는다는 것도 엊그제 알았는데 이제는 뭐, 마물 소환? 심지어 죽이는 방법도 없는 것들을.”

리얀이 미간을 찌푸린 채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다 레스칼의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레스칼의 표정은 어둡다는 말로 얼버무릴 수준이 아니었다. 레스칼이 금안을 꿈틀대자 공기가 팽팽히 당겨지는 기분이었다.


“그, 그럼 저희는 나가서 환궁 경로를 다시 점검하겠습니다.”

리얀이 이런 말로 세르벤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데칸이 눈치 빠르게 인사를 마무리 지었다.


“모쪼록 잠시라도 휴식을 취하고 계십시오.”

그림자 기사들이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빠져나간 공작의 서재에는 라실리아와 레스칼이 남았다.

* * *



“앉으세요. 일단.”

라실리아가 자리를 권했다.

레스칼은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상했지만 이상하지 않았다. 공작저에 다시 오는 순간부터 저랬으니까.


“아플 거잖아요.”

“……뭐가?”

“손이.”

라실리아가 먼저 소파에 앉으며 눈짓으로 변이된 채 남아 있는 손을 가리켰다.


“…….”

레스칼은 느릿하게 제 손을 바라보았다.


“이 손부터 놓아주세요. 그래야 만져 줄 수 있으니까.”

“…….”

“어서요.”

“……하,”

레스칼이 숨을 내쉬었다.

그는 오래도록 숨을 참고 있던 사람 같았다.

결국 레스칼이 손을 놓고 라실리아가 앉으라는 대로 소파 옆자리에 앉았다.

그가 목덜미에 이마를 기대는 동안, 라실리아가 변이한 손을 양손으로 감쌌다.

평소와는 다르게 변이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라실리아는 비늘 끝이 손바닥 살을 따끔따끔 찔러 오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돌아오지 않으시면 저도 같이 아픕니다, 폐하.”

 

 


“……하아,”

한숨이 한 번 더 이어졌고, 그제야 서서히 변이가 풀리기 시작했다.

스스로 변이를 불러온 레스칼이 변이한 채로 남아 있길 원했고, 라실리아도 그걸 눈치챘다는 뜻이었다.


“이 모습으로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대가 위험했다.”

레스칼은 잡히지 않은 손으로 라실리아의 뺨을 쓸었다.

라실리아가 보일 듯 말 듯 웃으며 레스칼의 손바닥에 뺨을 붙였다. 레스칼이 어깨를 움찔 흔들었다.


“음……. 하지만 그러면 제가 폐하를 마음껏 만질 수가 없으니까요.”

세상의 끝에 선 것처럼 차갑게 굳어 있던 금안이 갑자기 요동을 쳤다.


“갑자기 그런 말을……. 너무 좋지만 이상하기도 하다. 그대가 그런 말을 할 리 없는데.”

부정하자니 조금 양심이 찔리긴 했다.


“지금부터 자주 하려고요. ……싫으십니까?”

“그럴 리가. ……아니, 하지만,”

금안이 가늘어졌다.


“……이유가 있겠군.”

라실리아가 오늘 유독, 말이 안 될 만큼 다정하게 군다고 느꼈을 것이다.


“폐하가 화가 나셨으니까요. 안 그런가요?”

“……맞아.”

레스칼이 이제껏 말을 하지 않고 있던 것은 그런 이유였다.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떠나자마자 라실리아에게 위험이 닥쳤다. 그걸 알려 줬어야 하는 덜 자란 새는 불꽃 좀 내뱉다 지금은 뻗어서 자는 중이었다.

어쩌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라실리아와 떨어져 있을 때의 위험성을. 그때마다 심장이 요동칠 만큼 불안해지는 이유를.

그러나 라실리아는 자신을 궁으로 돌려보냈고, 저는 세 번의 키스에 홀려 불안감을 인내하겠다는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화가 나는데 누구를 향한 화인지 잘 구분할 수가 없었다.

라실리아는 왜 자신을 곁에 두고 싶어 하지 않는 걸까. 자신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반의 반, 아니 일 할이라도 그런 마음이 있다면 오늘 같은 위험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라실리아는 그를 자극했다.

마물에게 둘러싸였다는 사람이 제 손을 걱정하며 웃어 주었다.

단 일 할이라도, 라실리아가 마족과 마물이 나타나는 이 상황을 걱정하길 원했다. 그랬다면 자신에게 먼저 돌아가라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을 테니까.


“그대가 나를 원하지 않는 건 괜찮아.”

제 입에서 튀어나가는 목소리가 남의 것처럼 들려왔다. 결코 라실리아에게는 들려주고 싶지 않은 가시가 돋친 목소리였다.


“그건 기다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는 일은 용납이 안 돼.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마음도 없다.”

레스칼이 말을 끊고 이를 질근 물었다.


“……하지만 그대는 또 같은 말을 하겠지. 나는 그대의 뜻을 거스르지 못할 테고. 그걸…… 참기가 어려워.”

“아닙니다, 폐하.”

라실리아가 재빨리 레스칼의 얼굴을 붙들었다.


“폐하를 원하지 않아서 곁에 있지 마시라고 한 게 아닙니다.”

레스칼이 눈가를 한껏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그럼? 그게 아니라면 무슨 이유가 더 있는데?”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폐하께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내내 이곳에 머무르실 수 없으니까요.”

“왜 머무를 수 없는데. 그대가 있는 곳이 내가 있을 곳이다.”

“저희 둘만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라실리아가 찌푸려진 눈가를 엄지로 매만졌다.

이제 라실리아도 다정한 손짓이 조금씩 익숙해졌다.

언제까지고 예언자 시절을 핑계 삼을 수는 없었다. 익숙하지 않지만 익숙해질 수 있었다. 상대가 레스칼이라면. 화를 내는 이유까지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상대라면.


“그리고 저는 겉으로는 부친의 임종을 기다리는 입장입니다. 그런 곳에 폐하와 함께 있으면 너무 즐거워하는 자신을 감추기 어렵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레스칼이 눈썹을 훅 치켜들었다.


“즐겁다고?”

“네. 폐하와는 이렇게 있을 텐데 즐거워 보이지 않을 리가요.”

레스칼이 어딘가 다쳐서 아픈 것 같은 신음소리를 냈다.


“그런……. 대체 누가 보든 무슨 상관인데.”

“저는 좋은 황후가 되고 싶으니까요. 어쩌면 저는 썩 좋은 예언자가 아니었을 겁니다. 결국 베르호예트 왕을 구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좋은 황후는 욕심이 납니다.”

“그게 아랫것들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말은 아닐 텐데. 그리고 그대는 충분히 좋은 황후다. 내 기사라는 것들이 그대를 따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어.”

“귀가 퍽 즐거운 얘기지만 그림자 기사 셋은 너무 적은 숫자입니다, 폐하.”

라실리아가 생긋 웃으며 이번에는 레스칼의 목에 손을 올렸다. 느리게 변이가 풀리던 손은 어느샌가 평소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폐하의 염려도 충분히 알겠습니다. 폐하를 기다리는 급한 정무가 없다면 당분간 제 곁에 계시기를 청하겠습니다.”

레스칼이 비로소 나직하게 만족스러운 숨소리를 흘렸다.


“기꺼이. 그대가 바라는 일이라면, 뭐든지.”

라실리아가 살짝 몸을 들어 레스칼의 귀에 대고 작게 물었다.


“폐하의 청력이라면 근처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나요?”

“그렇다.”

“지금은 얼마나 있습니까? 그러니까, 얼마나 가까이?”

“문밖에 둘. 그 너머에 넷. 건물을 나서면 더 많고.”

“문밖이라면 소리가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무슨 소리가? ……뭐든 들리는 게 염려된다면 멀어지라고 하면 돼.”

“아니요. 그건 더 부끄러울 테니 폐하께서 소리를 참으시면 됩니다.”

“무슨 소리를……. 아,”

레스칼은 그 말의 뜻을, 라실리아의 입술이 제 입술에 닿고 나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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