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예언과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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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예언과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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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예언과 종말
2023.05.28.
-빌어먹을.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 그 염병할 마족이 결국 그런 꼴을 보려 할 거라는 생각을. 폐하께서 그렇게 되시면 난…….
서른 살 생일 전에 반려가 사라지면 레스칼은 마족의 피를 다스릴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레스칼은 어떻게 될까. 마족이 되는 걸까.
마족이 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리얀의 상상대로 그는 인간 세상을 없애려고 들까. 무슨 이유로. 상실감에 대한 분풀이일까, 아니면 그것이 마족의 본성이기 때문일까.
-내가 폐하를 막게 될 거야. 나밖에 없으니까.
그게 리얀이 가진 두려움이었다.
라실리아를 잃으면, 자신이 레스칼에게 칼을 겨눠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것.
리얀이 소드 마스터가 되지 못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리얀은 강했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더 강해지고 싶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기도 했다. 더 강해지면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그땐 정말로 자신밖에 없을 테니까.
레스칼을 상대해야 하는 사람이.
“시그레스 경.”
남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감정이 옮아 온다는 것이었다.
라실리아의 마음도 리얀의 마음속처럼 혼란스럽고 두려웠다. 그리고 절망스러웠다.
-너는 결국 인간을 저어하게 될 것이다. 불신하고 회피하다 넌더리를 내겠지. 인간을 들여다본 존재들이 그랬듯이.
꿈속의 마족이 해 준 말이 떠올랐다.
라실리아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리얀이 지금 느끼는 저 불안하고 어두운 감정들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라실리아는 알았다. 리얀은 레스칼을 지키고자 했고, 제 힘이 부족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예, 황후 폐하. 말씀하십시오.”
리얀이 애써 솟구치는 불안감을 지우려 들며 답했다.
“경이 나를 지키지 못해 내가 목숨을 잃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예언자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음…… 위로는 감사합니다만 말씀드렸듯이 오늘 델라르타의 왕자 전하가 계시지 않았다면 아무도 장담을 못 할 일,”
이어지는 라실리아의 말이 리얀의 입을 다물게 했다.
“나를 죽이는 것은 페하가 될 것이다.”
“……. ……? 네, 아니, 뭐라고요?”
리얀이 펄쩍 뛸 것처럼 몸을 들썩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예언자로서 내가 마지막으로 꾼 꿈에서 본 광경이 그러했다.”
“아니, 무슨…… 말도 안 됩니다……. 폐하가요? 지금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가 모기에만 물려도 식음을 전폐하실 것 같습니다!”
실웃음이 나올 법한 발언이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예언이 전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신께서 미리 앞일을 보여 주시는 것은 인간에게 다른 길을 택하도록 선택지를 주신다는 뜻. 내게도 다른 죽음이 가능할 것이다.”
“으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아니, 대체 왜 폐하께서……,”
리얀은 적당한 말을 고르지 못해 망설였다.
라실리아가 마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꿈에서 폐하께서는 변이가 없는 모습이셨다. 경이 염려하는 일은 없어. 어쩌면 경이 나를 무사히 지켰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지. 그러니 원하는 만큼 강해져도 될 것이다.”
“어, 그렇다면 제가…… 아니, 잠깐. 잠깐!”
리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라실리아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경의 걱정은 허상이라는 뜻이야. 존재하지 않을 일을 걱정하느라 마음을 괴롭히지 말도록.”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무얼 걱정하는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보였다.”
“보였……다고요?”
“반려의 능력이자 마족의 힘이지. 마족의 피를 종속하면서 그 힘이 반려에게도 일부 전해졌다.”
“으아…… 그럼…… 아니, 그럼! 거짓말을 하면 황후 폐하께서 전부 다 아신다는……? 그런 말입니까?”
“늘 그런 것은 아니니 안심해도 좋아.”
“으아아……. 그랬군요……. 아니, 매번은 아니라 하시니까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머리를 감싸 쥐고 곤란해하던 리얀이 힐끔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게…… 저, 뭐 하나 여쭤도 될까요?”
“허락한다.”
“그, 제가 좀 약간…… 그러니까 아주 조금, 야비하게 거짓말을 하고 그럴 때가 있었는데…… 그런 것도 혹시 다 아셨습니까? 아, 변명을 하자면 제가 아주 그렇게 글러 먹은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그게…… 음, 그러니까 황후 폐하께서 카르타헤나 피엘리온과 같은 인물이라 여겨서……. 아니, 그래도 물론 예법에는 한참 어긋난 일이지만 말입니다…….”
꽤 긴 말을 마칠 무렵에는 목소리가 반도 넘게 기어들어 가는 중이었다.
“매우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심입니다, 황후 폐하.”
리얀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렸다.
진심이 아닐 리가 없었다. 그랬다면 곧장 표시가 났을 테니까.
“나는 경이 솔직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 내게 지녔던 반감은 폐하를 위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았겠지. 내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그게…… 너무 너그럽게 봐주시는 거 아닙니까……. 제가 음, 불사조님의 알도 훔치고 그랬는데요. 알이라는 걸 모르고 한 짓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나?”
“앗, 모르고 계셨구나. 그랬는데 까마귀한테 곧장 빼앗겼습니다. ……진심으로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리얀은 계속 눈을 들지 못했다.
좀 전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인간의 마음을 본다는 게 꼭 인간의 바닥을 알게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바닥이 드러나도 그게 반드시 인간에게 넌더리가 나게 된다는 말도 아니었다.
“나 역시 경에게 빚이 있으니 사죄를 받는 것으로 값을 치르겠다.”
리얀이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음? 황후 폐하께서 제게 빚이 있으시다고요? 그럴 일이 있습니까?”
“경이 아니었다면 나는 계속 내 힘을 받아들이길 주저했을 것이다.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아.”
“제 덕분이라고요? 저는 아무것도 한 기억이 없는데.”
“방금 해 주었다.”
리얀은 여전히 의아한 얼굴이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그런 엄청난 역할을 했다니 통 믿기 어렵지만…… 하여간 영광입니다, 황후 폐하.”
약간 쑥스러워하는 듯하던 리얀이 갑자기 정색을 하고 이런 말을 했다.
“강해지겠습니다, 황후 폐하. 그래서 제가 황후 폐하의 죽음을 막겠습니다.”
“그건…… 폐하로부터 나를 지키겠다는 말이라면 황실 근위대의 본분에 어긋날 텐데.”
“그게 결국 폐하를 위하는 길이 되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제부터 제가 얻을 힘은 황후 폐하의 몫이 되는 게 맞습니다. 제가 칼을 걸고 맹세한 기사도가 그리 말하고 있습니다.”
리얀이 라실리아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가 오러를 얻게 되면, 그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폐하께서는 제 칼을 가지셨으니 그 반려께서 오러의 주인이 되심이 마땅합니다.”
“…….”
저런 눈으로 하는 맹세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에게는 리얀이 필요할지 몰랐다. 예언된 죽음을 피해 가기 위해서라도.
“그렇다면.”
라실리아가 리얀이 무릎 위에 올린 손에 제 손을 겹쳤다.
“그대의 손에 내 목숨을 맡기겠다.”
“영광입니다, 황후 폐하.”
“그러니 그대가 알아야 할 게 있어.”
평소보다 작게 내려앉는 목소리가 다르다고 느껴졌을까. 리얀의 표정이 변했다.
“어떤…… 겁니까?”
“또 다른 마족이 내게 접근한 적이 있다.”
“네? 또 다른 마족이라면…… 아니, 그런 일을 비밀로 하셨습니까?”
“실체가 나타난 것은 아니었어. 수면에 떠오른 잔상이었고, 곧 사라졌다. 내게 말을 전하려고 한 것 같아.”
리얀이 긴장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말씀하십시오, 황후 폐하.”
“내게 그랬어. 폐하께서 나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고.”
“그, 그게……? ……그럼 황후 폐하의 꿈이……?”
리얀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어쩌면.”
또 다른 마족이 나타난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그가 인간들의 세상에서 무얼 하려는지, 저를 집요하게 노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하지만 꿈을 비춰 보면 그가 의도하는 한 가지를 알 것도 같았다.
“어쩌면 나의 꿈은 그 마족이 하려는 일을 예지한 것인지도 몰라.”
“폐하께서 스스로 황후 폐하를 죽이도록…… 그렇게 만들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 그렇다면 간단하군요.”
처음에는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벌리고 있던 리얀이 눈빛을 바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짓을 하기 전에 잡아 죽이면 되겠습니다. 그 미친 마족을.”
더 이상 침입은 없는지 공작저는 평소처럼 고요해졌다.
대신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기사들이 날카로운 눈으로 어둠 속을 내내 감시했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다.
라실리아가 있는 공작저에 괴생명체가 나타난 진짜 이유를.
그리고 그들은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소환된 존재라는 것을. 그래서 죽음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소환된 육신이 소멸하지 않는 한 그들은 내내 존재했다.
리얀이 정체를 밝히기 위해 남겨 둔, 타다 만 반토막짜리 육신이라도.
* * *
“아, 뭐야. 그런 일이 있었어?”
하스데야가 허공에 대고 두 눈을 끔벅거렸다.
그는 지금 몹시 기분이 좋았다. 말리크 기사단의 육신을 통해 하급 마물을 소환하는 데 성공한 탓이었다.
말리크 기사단의 몸 어딘가에 소환진을 그려 놓고 원하는 곳으로 보내면, 그 몸이 문이 되어 마물들을 불러올 수 있었다.
오늘은 시험 삼아 그 여자가 있는 곳으로 보내 봤는데 충분히 겁을 준 듯했다.
물론 마계의 입구로 쓰인 인간의 육신이 멀쩡히 남아 있을 리는 없었지만 그건 제 알 바가 아니었다.
어차피 인간이란 발에 챌 정도로 많았고, 그것도 모자라 끝도 없이 번식하는 존재였으니까.
그가 수백 명쯤을 문으로 사용해 죽인다 하더라도, 다음 날이면 죽은 놈들을 웃도는 숫자가 몰려들 것이다. 인간들은 어찌나 어리석은지 당장 눈앞에서 보여지는 힘에 부나방처럼 뛰어들었다.
그 힘은 모두 인간의 생명력을 땔감 삼아 구현되는 것임에도.
뭐, 어쨌거나 그래서 인간계가 몹시 마음에 든다는 말이었다. 굳이 바하무트를 마계로 데려가지 않아도, 이대로 인간계의 신이 되어 인간들을 지배하는 것도 괜찮은 일 같았다.
하지만 이러든 저러든 그에게는 바하무트의 마력이 필요했다.
바하무트의 마력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종속된 마력을 원래 몸으로 불러와야 했고, 그러자니 종속의 주술을 없애야 했다.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지, 쯧. 차라리 죽여서 끝날 일이면 편했을 텐데.”
그래도 오늘은 진전이 있었다.
하급 마물이 우연찮게도 그 여자의 비밀을 엿들었다. 그 머저리들은 마물을 두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그게 뭔지 통 감을 못 잡는 모양이었다.
“바하무트가 저를 죽이는 꿈을 꿨다고……. 흠, 내가 그 짓을 하려고 드는 건 맞는데, 대체 어떻게 안 거지?”
짜증은 나지만 그 여자의 힘이 꽤 대단한 모양이었다. 아직 절반도 자각을 못 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니, 안 건 그렇다 치고. 그런 꿈을 꿨는데도 좋다고 들러붙어 있어?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어리석어도 그렇게 어리석을 수가 없었다.
표정을 비틀던 하스데야가 무언가를 떠올리고 반색을 했다.
“아, 꿈은 나도 꾸게 할 수 있잖아. 그만한 힘은 돌아왔으니까.”
그 여자에게 꿈을 꾸게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분통이 터질 일이었지만 그 여자는 이미 제 힘을 받아 칠 능력이 있었다.
“어디, 그럼 두고 보자고.”
성자 말리크의 얼굴을 한 하스데야가 그린 듯 말끔한 미소를 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