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다섯 번째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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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다섯 번째 힘
2023.05.24.
“하지만 한 조각은 남겨 둬야 합니다. 아니면 어떻게 정체를 파악할 겁니까?”
리얀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말이었다.
황후를 노리는 뭔지 알 수 없는 생명체라니, 앞날을 대비해서라도 반드시 정체를 밝혀야 했다.
그러나 문제는 보라색 기운의 정체였다.
리얀은 한 번에 하나씩만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힘이 대상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었다.
“……음?”
리얀은 다행히 검은 연기로 사라지기 전에 건져 낸 반토막짜리 그것을 의기양양하게 들어 올리다가 표정을 홱 바꾸었다.
보라색 연기에 닿은 제 손이, 푸르게 굳어 가고 있었다.
“엇,”
툭.
리얀이 들고 있던 그것을 떨어트렸다.
티온이 침착하게 장갑을 꺼내 손에 낀 다음 그것을 들어 올렸다. 표정이 어두웠다. 리얀의 손에 들이닥친 이상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닌 듯했다.
“시그레스 경.”
라실리아가 놀란 얼굴을 한 채 리얀의 곁으로 다가오자 에셀리온이 말렸다.
“아직 위험합니다, 라실리아 님.”
라실리아가 에셀리온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전하? 만지는 것만으로 사람을 전염시키는 힘은 대체 어디서 온 겁니까?”
리얀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한 번에 하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전염병이라니……. 칼에 그런 기운을 섞어 쓴다고요? 아니, 그런 게 소드 오러 말고 또 있다는 것도 이상한데 전염이라니……. 말이 안 돼도 너무 안 되는데요?”
에셀리온이 곤란한 듯, 시선을 돌렸다. 티온 역시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 뿐이었다.
“전하.”
“네……. 라실리아 님.”
그래도 라실리아가 부르자 외면할 수 없었던지 대답을 했다.
“전하를 추궁하거나 힐난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아주세요. 내가 바라는 건 시그레스 경의 손에 아무런 해가 없도록 하는 일입니다. 저것은 병입니까? 그렇다면 치료약은 있는 건가요?”
“…….”
에셀리온과 티온이 한차례 눈짓을 주고받았다. 에셀리온의 표정을 본 티온이 체념했다는 듯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치료약은 따로 없습니다. 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병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저주……?”
에셀리온이 무거워진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네. 제게 주어진 신성력…… 신의 뜻에 반하는 것들을 저주할 수 있는 힘입니다.”
* * *
신성력은 다섯 가지로 구분되었다.
예지, 치유, 번성, 정화. 그리고 저주.
인간들 중에서는 드물게 신성력을 지니고 태어나는 자가 있었다. 가장 많은 것은 치유와 번성의 능력이었다. 예언자는 몹시 귀해서 한 세대에 한 명도 허락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넷과 전혀 다른 성질의 힘이 저주였다.
아무리 신의 이름을 빌렸다고 해도 남을 저주하는 인간이 온전히 받아들여지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저주의 능력을 받은 이들은 힘이 발현하는 즉시 신전에 맡겨졌다. 신전은 치유와 정화의 능력으로 그들의 힘을 지웠다.
신관들 사이에서는 저주의 능력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신께서 주신 능력이라면 어째서 인간을 해치게 되는 것인지, 명확한 답을 아는 이는 없었다. 신성력으로 인정하지 말아야 된다고도 했고, 이들은 신이 지상으로 내쫓은 악을 대변한다고도 했다.
그래서 에셀리온 왕자의 신성력은 비밀에 부쳐졌다. 그 역시 길고도 고통스러운 정화의 의식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그가 부여받은 신성력을 온전히 없앨 만큼 뛰어난 정화력을 가진 신관이 없었다.
저주의 능력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진 에셀리온은 그것을 다스리는 법을 찾아야 했다.
그 방법이 칼이었다. 다행히도 에셀리온은 검에 재능이 있었고, 저주의 힘을 품은 검은 소드 오러라는 거짓말에도 어색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일부 신관과 에셀리온을 훈련시킨 왕실 수석기사, 그리고 에셀리온의 호위 기사 둘뿐이었다.
그리고 호위 기사 둘은 모두 에셀리온처럼 저주의 힘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정화시키지 못한 자들이었다.
“소드 오러일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리얀은 굳은 손을 바라보며 태평하게 중얼거렸다.
“오러라면 그런 제한이 있을 리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지금 현재 대륙 어디에서도 소드 마스터가 탄생했다는 소문은 없지 않았습니까.”
손은 저주를 받았는데, 어쩐지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그보다는 경의 손을 걱정해야 할 시간 같은데.”
라실리아가 말했다.
“아, 이거요? 뭐, 더 번지지는 않는 것 같아서요. 어차피 왼손이기도 하고.”
리얀이 어깨를 으쓱했다.
“게다가 신성력이라니 치유나 정화 능력을 가진 신관을 찾아가면 되는 일 아닙니까?”
“그런데 경은 신전에 갈 생각이 없어 보이니까.”
“아, 지금은 안 됩니다. 그것들이 또 언제 올지 모르니까요.”
그것들은 일단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들이 나타난 흔적이라고는 리얀이 저주라는 대가를 치르고 사수한 반토막짜리뿐이었다.
에셀리온과 함께 온 다른 기사 한 명이 처음으로 그것의 흔적을 발견했다. 정확히 말하면 흔적이 아니라 연관성이었다.
에셀리온의 기사는 공작저 근처를 오가는 낯선 자를 발견했고, 그를 처리하고 나자 갑자기 그것들이 나타났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 에셀리온의 기사들을 앞세워 다시 공작저를 수색하는 중이었다.
그것을 불러온 낯선 자가 한 명뿐이라는 증거가 없었다. 이 넓은 곳을 이 잡듯 털어 아무런 위험이 없다는 게 확실해져야 다른 일도 할 수 있었다.
라실리아를 황궁으로 대피시키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황궁까지 가는 길에 어떤 공격이 이어질지 모르니 지원군이 도착하는 게 우선이었다.
지금 근위대가 황궁을 향해 부리나케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경은 자발적으로 수색에서 빠졌지. 그만하면 충분히 걱정을 해야 할 일 같은데.”
“아, 그건……. 뭐, 걱정해야 되는 게 맞지만 말입니다. 아직은 다른 생각이 더 많아서요.”
거기서 입을 다물 줄 알았던 리얀이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망토로 감아 놓은 그것의 잔해를 툭 쳤다.
“일단 이것 말입니다.”
귀가 설핏 움직였다.
라실리아의 눈에는 그게 주변을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다.
틀리지 않은 생각이었다.
리얀이 일부러 수색에서 빠져 라실리아의 곁에 남은 이유가 있었다. 에셀리온이 듣지 않는 곳에서 단둘이 얘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제 눈에는 좀…… 폐하의 변이와 닮은 것 같아 보이는데…… 황후 폐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족의 일종이라는 뜻인가?”
“물론 이것이 폐하와는 많이 다르다는 걸 압니다. 무엇보다 마족은 마력을 쓰지 않습니까? 인간보다 훨씬…… 어, 뭐라고 해야 하지…… 아무튼 인간보다 뛰어난 존재 아닙니까? 신체적인 이점을 제외해도요. 이 세계와 이차원에 대해 더 폭넓은 지식을 가진 건 틀림없잖습니까.”
하지만 오늘 나타난 그것들은 대륙에 없는 생김새를 지녔을 뿐, 지적인 능력을 지닌 생명체로는 보이지 않았다.
“같은 곳에서 왔으되 다른 종류이거나 혹은 마족으로서 성장이 더 필요한 존재일지도 모르겠군.”
“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일전에 수도에 마족이 등장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리고 나를 노리고 있고. 하리오스 신전 안에 숨어 있었을 때도 그랬듯이.”
“예.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리얀이 눈매를 찌푸리며 덧붙였다.
“그래서 아직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얌전히 지원군을 기다리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그것도 황후 폐하를 노리는 마족의 계획 안에 있는 건지.”
“삐이이……?”
라실리아의 무릎 위에 누워 죽은 듯이 잠을 자던 피피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불을 내뿜다 불꽃이 된 피피는 그 이후로도 불꽃이 된 모습을 유지했다. 그러다 오 분쯤 뒤에 너무너무 졸리다면서 눈을 감고 잠이 들어 버렸다.
잠이 든 피피의 몸이 라실리아의 무릎 위로 툭 떨어져 다들 놀랐는데, 희한하게도 피피의 불꽃은 라실리아에게 옮겨 붙지 않았다.
피피가 잠이 들자 서서히 원래의 작은 몸으로 돌아왔다.
“삐이. 삐.”
피피가 졸린 눈에 힘을 주었다.
자기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그 이상한 것들은 이미 죽었다고 했다.
“그래, 알았어. 수고 많았어.”
“피이…….”
고개를 꾸벅 떨어트린 피피가 다시 잠이 들었다.
피피를 지켜보던 리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사조님은 황후 폐하에게 위기가 닥쳐 오면 미리 느끼실 수 있으니 지금은 안전하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그러면 경은 신전으로 가도 되겠군.”
리얀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고개를 휙휙 흔들었다.
“폐하께서 직접 지원군을 이끌고 오셔도 저는 황후 폐하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어째서? 내게 더 이상 위험이 없다는 걸 알 텐데.”
“도망치는 기분이 싫어서요.”
리얀이 조금 생뚱맞은 답을 했다.
“누구도 경이 도망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
“……델라르타 왕자 전하의 그 힘이 아니었다면, 여기가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리얀이 왼손을 들어 올렸다. 주먹을 쥐고 싶었지만 쥘 수가 없었다. 굳어 버린 왼손에는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게 두려웠습니다.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게.”
“경은 충분히 제 역할을 해 주었다.”
“아니요, 황후 폐하. 외람되지만 저는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리얀이 어금니를 질근 물었다.
“충분하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진작 충분해졌어야 했는데…… 그런데 자꾸만……,”
리얀이 찡그리듯 눈을 감았다. 미간에 생기는 주름이 고통스러워 보였다.
단순히 실력이 부족한 것을 탓하는 게 아니었다. 그것뿐이라면 저렇게 괴로운 표정을 지을 리 없었다.
라실리아가 리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시그레스 경.”
“……괜찮습니다, 황후 폐하. 곧 괜찮아질 겁니다.”
그때 보였다.
리얀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입으로 하는 것과 다른 생각이.
-괜찮지 않아, 빌어먹을.
“…….”
살짝 놀라던 라실리아는 그대로 리얀을 바라보았다.
리얀은 괴로워하고 있었다. 혼자서 괴로움을 감추고 있는 것을 모르는 척 할 수도 있었지만 어쩌면 도울 수도 있을 것이다.
-황후 폐하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럼 폐하도 잘못되는 거야.
이어서 리얀은 변이한 레스칼을 떠올렸다.
반려를 잃고 완전히 마족으로 변한 레스칼이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는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