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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그것 (75/96)


75. 그것
2023.05.21.


말로만 그랬다.

리얀은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에서 벌써 칼자루에 손을 얹고 있었다.

에셀리온 왕자는 벌써 칼을 뽑은 상태였지만 리얀의 눈에는 일말의 걱정도 없었다. 단지 어서 칼을 부딪치고 싶다는 욕망이 득실댈 뿐이었다.


“무얼 위한 자들인지 모르겠군.”

리얀의 눈빛을 읽은 에셀리온이 차가운 비웃음을 던졌다.

황실 근위대라는 자가 개인의 호승심에 안달을 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근본도 모르는 인간이라는 말을 에셀리온이 비웃음에 담았다.

리얀이 그를 따라 하듯 씩 웃었다.


“걱정하시는 것과는 달리 제 본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뭐, 위험할 게 없지 않습니까?”

“피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더니.”

쌍둥이 남매인 또 다른 그림자 기사와 하는 짓이 똑같다는 뜻이었다.


“좋게 봐주시죠. 그간 제국이 너무 평화로워 기사들이 하나같이 좀이 쑤시는 모양이라고.”

리얀의 손이 금방이라도 칼을 뽑을 것처럼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쥐었고, 에셀리온은 어서 뽑으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라실리아가 시기적절하게 끼어들었다.


“두 사람 다 불필요한 싸움이라는 생각은 안 하는 겁니까?”

“삐이?”

피피가 왜 말리냐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라실리아가 피피를 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타국의 왕족이 제국의 기사와 겨루다 자칫 부상을 입었다는 불상사는 겪고 싶지 않군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리얀이 엉뚱한 소리를 했다.


“앗, 다치지 않게 하겠습니다, 황후 폐하!”

에셀리온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제국의 기사에게 다칠 일은 없습니다, 라실리아 님.”

“삐이이이.”

피피가 재미있겠다며 어서 싸우라고 부추겨댔다. 라실리아가 피피의 꽁지 깃털을 슬쩍 잡아당겨 조용히 시켰다.


“두 사람이 똑같이 구는데 어떻게 아무런 사고도 없겠습니까. 다투는 건 그만두고 각자 할 일을 해 주길 바랍니다.”

“엇, 그게 말입니다…… 제가 마침 할 일을 다 하지 않았겠습니까? 공작저의 안팎을 물샐틈없이 점검하고 돌아오는 길이라,”

그러나 리얀은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휘익, 챙그랑!

리얀의 말을 자르며 창밖에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창을 깨고 곧장 날아온 그것이 향하는 쪽은 라실리아였다.


“라실리아 님!”

“황후 폐하!”

“삐이잇!”

피피가 작은 부리로 불씨를 토했다. 그러나 불씨는 너무 작았다. 리얀이 칼을 뽑아 들며 몸을 날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거리가 있었다.

에셀리온이 칼날을 세웠다. 그 또한 라실리아와는 리얀만큼이나 거리가 있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에셀리온의 칼에서 짙은 보라색 기운이 번져 나갔다는 것이었다.

파앗!

창밖에서 날아든 무엇이 라실리아에게 닿기 전, 에셀리온의 보라색 기운이 무엇을 막아섰다. 그것은 보라색 기운에 가로막혀 그대로 흩어져 버렸다.

스스슷…….

무언가였던 것의 잔해가 잿빛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설마…… 소드 오러?”

 

 
리얀이 잔뜩 경직된 얼굴로 내뱉었다. 에셀리온은 리얀을 힐끗 돌아보기만 하고 대답 없이 라실리아 곁으로 다가섰다.


“괜찮으십니까, 라실리아 님?”

“괜찮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대답은 창밖에서 다가왔다.

슷, 탓!

깨진 창문으로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날아들었다.

리얀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칼을 뽑아 들었다.


“누구냐!”

“삐이!”

하지만 적이 아니었다. 얼굴을 확인한 뒤 한쪽 무릎을 꿇는 정중한 행동을 적이 할 리가 없었다.

에셀리온이 라실리아의 곁에서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리얀에게 눈짓만 보냈다.


“나와 함께 온 자다.”

무릎을 꿇은 자세로, 에셀리온의 호위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시간이 없으니 인사는 나중에 올리겠습니다. 전하의 힘이 필요합니다.”

“뭐라고? 무슨 일인데?”

“방금 전, 이쪽으로 날아 들어온 것을 전하께서 처리하셨습니까?”

“그렇다. 그게 뭐였나?”

“저희도 똑똑히 보진 못했습니다. 그게……,”

그때였다.

퍽, 챙그랑! 퍽, 챙그랑!

창문들이 연속으로 깨지며 계속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가만히 계십시오, 라실리아 님!”

“삐잇!”

에셀리온이 한 팔로 라실리아를 감싸는 것과 동시에 보라색 기운이 칼날 위로 번져 나왔다.

리얀이 날듯이 몸을 굴려 칼을 휘둘렀고, 에셀리온의 호위 기사가 에셀리온의 등 뒤로 몸을 옮겨 진형을 짰다. 피피가 파드득 날며 작은 불꽃들을 뿜어냈다.


“피피! 위험해!”

라실리아가 피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캬우우욱.

창문을 뚫고 날아든 그것이 생전 처음 듣는 괴상한 소리를 내뱉으며 피피를 향해 입을 벌렸다.


“삐잇!”

“피피! 안 돼!”

피피가 있는 힘을 다해 부리를 벌렸다.

피이잇.

불꽃이라고 하기에는 어쩐지 투명하고 맑은 열기가 피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열기가 처음 보는 그것을 덮쳤고, 그것이 주춤하는 사이 리얀이 에셀리온의 호위를 밟고 몸을 솟구쳐 허공에 떠 있는 그것을 반 동강 냈다.

스슷!

이어서 에셀리온의 보라색 기운이 그것을 검은 연기로 만들어 버렸다.


“삐이?”

피피가 의외로 손발이 잘 맞는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더 있습니다!”

챙그랑, 퍽!

퍽, 챙그랑!

그런 것들이 몇 개나 더 날아들었다.

캬우우욱!

소리를 내는 것으로 보면 생명체였다. 그러나 맹세코 저런 생명체는 본 적이 없었다.

생명체라기보다는 깊고도 깊은 어둠을 닮아 있었다. 본체가 어두운 나머지 그림자조차 생기지 않았다. 마치 본체가 빛을 삼키는 듯했다.

어둡다 보니 실체가 눈으로 잘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무언가가 움직인다는 느낌이 더 강렬했다.

다만 그것이 코앞으로 다가 왔을 때는 붉게 번들대는 눈동자와 괴이하게 꺾인 날개, 뒤틀린 송곳니 같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캬우욱!


“저것들…… 아무래도 황후 폐하를 노리는 것 같습니다.”

리얀이 칼끝으로 그것들과의 거리를 재며 중얼거렸다.

슬슬 눈이 익숙해지니 저것들이 무얼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천장에 스며들 것처럼 허공에 높이 떠서 빙글빙글 맴도는 저것들의 동선을 잇다 보면 라실리아가 그 가운데 있었다.


“나를?”

“네.”

에셀리온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 눈에도 그렇게 보입니다.”

스스슷.

에셀리온이 라실리아를 보호하듯 칼날을 기울였다. 그러자 보라색 기운이 뭉클 번져 나왔다.


“그게 뭐든 원거리 가격은 안 되는 겁니까?”

리얀이 그것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개체수가 복수일 땐 조준이 되지 않는다.”

“아…… 한 번에 하나씩?”

“그렇다.”

별안간 리얀이 씩 웃었다.


“그 밖에도 몇 가지 제한이 있는 듯한데. 말해 주실 생각은 없습니까?”

“대놓고 약점을 알려 달라 하는 게 제국의 기사도는 아닐 테지.”

“아,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군요. 죄송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 힘을 쓰는 방법을 저도 알면 좀 더 효율적인 전술이 나오지 않을까 해서요.”

“한 번에 하나. 그리고 선제공격은 불가능하다.”

“반격으로서만 가능하다는 겁니까? ……아, 꼭 그런 건 아니겠군요. 저것들은 전하가 아닌 황후 폐하를 공격했으니.”

“그리고 집중할 시간이 필요해.”

“어느 정도로 필요합니까?”

“설명하기 곤란하다. 감각에 의존하는 거라.”

“음…… 그렇다면 하나라고 생각하는 게 편하겠군요.”

리얀이 검 끝으로 천장을 향해 원을 그리며 말했다.


“거기 그쪽, 델라르타에서 오신 분. 저를 던져 주실 수 있습니까? 이쪽에서, 저쪽 방향으로요. 그럼 제가 한꺼번에 넷 정도는 자를 수 있을 겁니다. 나머지 둘…… 아니, 셋인가. 아무튼 저것들이 그 틈에 황후 폐하를 노릴 게 문제인데 그건 두 분께 맡겨도 되겠습니까?”

에셀리온이 입술을 비틀었다.


“혼자서 넷을 가를 동안 둘이서 셋을 상대하라고?”

“그 정도는 맡겨도 될 것 같아서 드린 말인데.”

“둘만이라도 처리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한 번에 하나라면서요. 무리하지 마십시오.”

가만히 있던 에셀리온의 호위 기사가 조용히 한마디 더했다.


“제가 전하를 거들겠습니다. 그럼 시차를 줄일 수 있습니다.”

에셀리온이 정색을 했다.


“입 다물어, 티온. 허락 못 한다. 너는 칼만 쓰도록.”

리얀이 어깨를 으쓱했다.


“말하는 걸 보니 그쪽 분들은 전부 전하 같은 그 힘을 쓰실 수 있나 봅니다? 하지만 전하처럼 능숙하진 않은 것 같고.”

티온이라 불린 호위 기사가 작게 혀를 찼다.


“제국의 기사한테 이렇게 밑천 다 털려서는 안 될 텐데…….”

“뭐, 상황이 그러니까요. 일단 해봅시다.”

말을 마친 리얀이 훌쩍 티온의 무릎을 밟고 올라섰다. 티온이 고개를 한 번 젓더니 리얀의 허리를 잡고 그대로 굴리듯 위로 휙 집어던졌다.

허공에서 몸을 반 바퀴 뒤집은 리얀이 칼을 움직였다.

사아악!

캬우우욱!

리얀은 큰소리친 대로 네 개를 갈랐다.

캬우욱!

위기를 직감했던지 허공을 뱅글뱅글 맴돌던 그것들이 라실리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옵니다, 전하!”

“보고 있다.”

“삐이잇!”

피피까지 가세해 눈을 부릅뜨고 전방을 응시했다.

그러나 문제는, 갈라진 네 개도 합세했다는 것이었다.


“가, 갈라졌는데 움직입니다?”

티온이 기가 막히다는 듯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제기랄!”

리얀이 칼을 들고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캬우우욱!


“삐이잇!”

피피가 안간힘을 다해 불꽃을 뿜었다.

처음에는 시작처럼 자그마한 성냥불만 하던 그것이, 피피가 기를 쓰고 날개를 퍼덕이자 점점 더 커졌다. 투명하고 맑은, 불이지만 물을 닮고 바람과 비슷한 그 불꽃이 점차 커다래져 피피의 몸마저 삼켰다.

라실리아가 소리를 질렀다.


“피피!”

“삐잇!”

피피는 새가 아니라 그대로 불꽃이 된 것 같았다. 리얀이 칼을 휘두르며 탄성을 질렀다.


“불사조님! 끝내주십니다!”

휘익, 스슷!

리얀의 칼이 불꽃에 가로막혀 더는 움직이지 못하는 그것들을 거침없이 잘라 갔다. 티온이 옆에서 공간을 확보한 뒤 리얀을 거들었다.


“닿지 않게 조심해!”

이제 힘을 쓸 수 있게 되었는지 에셀리온의 보라색 기운이 토막 난 그것들을 휘어감았다.

스스스스슷…….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앗, 잠시만! 잠시만요!”

리얀이 무슨 생각에선지 보라색 기운을 향해 손을 쓱 뻗었다. 안색이 변한 에셀리온이 홱 소리를 질렀다.


“당장 손을 거둬! 닿으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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