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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줄다리기 (74/96)


74. 줄다리기
2023.05.17.



“폐하의 허락을 맡아 당분간 호위를 교체하기로 했습니다, 황후 폐하.”

세르벤을 대신해 리얀이 공작저에 남았다.


“이유가 있었나?”

“네, 조금.”

대답을 하며 리얀은 에셀리온을 향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세르벤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상대가 안 될 것 같다고 했다. 에셀리온 왕자를 호위하는 인물들도 아직 제 실력을 다 드러내지 않은 느낌이라고 했다.

황후 폐하는 델라르타의 왕자를 신뢰하시는 듯했지만, 그렇다고 경계의 의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세르벤이 자신으로는 역부족이라고 실토하는 바람에 리얀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리얀은 몹시 들뜬 상태였다.


‘아우, 저쪽에서 먼저 시비라도 걸어 주면 참 감사하겠는데.’

그렇게 되면 너무도 기쁘게 칼을 뽑아 들 수 있을 것이다.

영리한 황후는 리얀이 다는 말하지 않는 이유를, 분위기를 통해 짐작했다.


“시그레스 경이 걱정이라도 한 모양이군. 하지만 델라르타의 에셀리온 전하께서는 내 손님이니 예의를 갖춰 주길 바란다.”

“물론입니다, 황후 폐하. 무례하게 굴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삐이!”

라실리아의 어깨에 딱 자리를 잡은 피피가 날을 곤두세웠다.

저쪽에서 예의를 모르면 당장 가르쳐 주라고 했다. 물론 라실리아는 그 말을 전해 주지 않았다.


“그럼 저는 공작저의 경비 상태를 살필 겸 한 바퀴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근처에는 근위대가 머물 것이니 염려하지 않으셔 됩니다.”

“경을 믿겠다. 필요한 일을 하도록.”

“황공합니다, 황후 폐하.”

한 팔을 굽혀 인사를 한 리얀이 몸을 일으켜 공작가의 서재를 떠났다.

긴 밤의 시작이었다.

* * *



“방금 그자가 제국의 그림자 기사입니까?”

“맞습니다.”

라실리아는 아직도 집사가 맡긴 일을 처리하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난처하기만 했던 일이, 이 시간이 되자 얼핏 눈에 들어왔다.

공작령에서 거두는 수입이 어마어마했다. 지출도 엄청난 금액이었지만 수입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특히나 사 년 전부터 재산이 크게 늘었다. 아마도 카르타헤나 피엘리온이 황후가 된 시점부터였을 것이다.

조만간 공작가의 후계자를 정해야 했다. 테르나덴 소공작은 제국 내에서 수배령이 내려졌으니 후계자로는 부적절했다.

당분간 꼼짝없이 공작가의 일에 매달려야 할 듯싶었다.

그리고 또 하나 라실리아가 결정해야 할 일이 있었다.

공작가의 재산으로 에셀리온 왕자를 지원하는 일이었다.


“델라르타에서도 이름을 들어 본 모양이군요.”

“네.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라고 들었습니다. 제국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말은 대륙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는 말도.”

잠시 뜸을 들인 에셀리온이 이런 말을 했다.


“꼭 그런 것 같진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그건 다른 그림자 기사와 칼을 겨눠 본 입장에서 하는 말인가요?”

“그자도 그림자 기사였습니까?”

에셀리온이 전혀 몰랐다는 듯 되물었다.

하지만 그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황실 근위대의 그림자 기사가 쌍둥이라는 것은 알려질 만큼 알려진 일이었고, 세르벤과 리얀은 누가 봐도 쌍둥이라는 것을 알 만큼 똑같은 얼굴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저로서는 라실리아 님의 호위 문제를 염려해야겠군요. 두 사람 모두 라실리아 님을 호위하기에 부족해 보였습니다.”

“그리 보였다면 유감입니다. 제국 내에서 그림자 기사들의 위치를 의심하는 일은 없을 텐데.”

잘은 몰랐지만 기사들 간에는 칼 실력을 재 보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라실리아로서는 에셀리온 왕자가 리얀을 못 미더워할 만큼 뛰어난 기사였다는 점이 더 놀라웠다.


“라실리아 님은 제국이 마음에 드십니까?”

내내 망설이는 듯하던 에셀리온이 이런 질문을 했다.


“마족의 반려인 것도…… 괜찮으십니까? 몹시 갑작스러운 일이었을 테니 어쩌면……,”

그 말에 라실리아의 손 근처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피피가 눈을 번쩍 떴다.


“피! 삐이!”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냐는 말이었다.


“피피. 너무 무례하게 굴지 마.”

라실리아가 머리를 쓰다듬자 피피가 한껏 어리광을 부리며 머리를 비벼댔다. 그러나 작은 눈으로는 에셀리온을 째려보기 바빴다.


“그 새가…… 혹시 불사조입니까?”

“네. 메너스컬렌이라는 이름이 있지만 이름으로 불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전하의 질문에 답을 하자면, 괜찮습니다.”

“삐이이잉.”

라실리아의 대답에 피피가 한껏 귀여운 소리를 냈다.

에셀리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마족의 반려라니. 그런 걸 라실리아 님께서 원하시진 않았을 텐데요.”

“예언자의 삶도 스스로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예언자라 믿었기에 그 삶을 받아들인 겁니다.”

“그건……. ……그렇겠군요. 예언자의 삶은 제가 짐작했던 바와는 달리 혹독했을 테니.”

에셀리온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라실리아는 그가 왕족의 일원으로 예언자가 받았던 대우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여겼다.


“제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 예언자로서 제가 받았던 대우는 델라르타 왕가의 탓이 아닙니다. 그건 제 출생과 연관이 있을 겁니다.”

“제가 왕이 된다면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에셀리온이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신의 대리인께서는 델라르타의 신을 대신해 그에 걸맞는 지위를 보장받으실 겁니다. 그러니……,”

뒷말이 삼켜졌다. 그러나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전하.”

에셀리온의 표정에 금이 갔다.


“제가 왕권을 되찾지 못하리라 여기십니까?”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제가 이미 예언자로서의 힘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신께서는 제게 더 이상 예지를 주지 않으십니다.”

“그, 런…….”

“삐이. 삐.”

피피가 잘된 일이라며 날개를 파닥였다. 라실리아가 손가락으로 피피의 날개를 슬며시 눌렀다.
  

 


“제가 예언자로서 마지막으로 꾼 꿈은 선왕의 죽음이었습니다. 저는 마땅히 그것을 막아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아마 제가 예언자로서 능력을 잃었다는 증거였을 겁니다.”

“아닙니다, 라실리아 님! 라실리아 님은 그 예언 때문에 목숨을 잃으신 겁니다! 제발 자책하지 마십시오!”

에셀리온이 절박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라실리아가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선왕보다 제 죽음이 먼저였으니 제가 선왕을 지키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 마지막 예언을 외면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라실리아가 이제껏 정리 중이었던 공작가의 장부 일부를 에셀리온을 향해 돌려놓았다.


“지금 내 이름이 카르타헤나 피엘리온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피엘리온 가문의 재산을 함부로 다루는 것은 도의에 어긋날 것 같습니다. 다만 카르타헤나 피엘리온 앞으로 미리 상속된 재산이 약간 있는 듯하니 이것을 전하께 드리겠습니다. 액수가 미미하다면 시간을 조금 주시길 바랍니다. 폐하께 에셀리온 전하의 왕권을 지지할 수 있는 방법을 상의해 보겠습니다.”

라실리아가 제국의 황후인 이상 함부로 타국의 왕권에 간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리카르도 왕제가 반란을 일으키긴 했지만 그건 엄연히 델라르타의 일이었다. 제국이 나서서 옳다 그르다 정해 버리면 그건 전쟁의 빌미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따라서 황후로서 지원이 가능하다는 약속은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제 앞의 재산을 내어주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지원을 바라 이러는 게 아닙니다! 저는……!”

에셀리온이 목덜미를 붉게 달구며 외쳤다.


“저는……,”

“말씀하세요, 전하.”

라실리아는 차분한 얼굴로 에셀리온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저는 라실리아 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반려 노릇 같은 건 하실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비록 제가 왕권을 잃은 몸이지만 라실리아 님을 위해서라면,”

그러나 에셀리온의 안타까운 외침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삐이잇! 삐잇!”

일단 피피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때를 맞춘 듯 리얀이 들어섰다.


“황후 폐하! 경비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리얀이 일부러 요란한 발자국 소리를 내며 들어섰다는 것을 에셀리온 같은 기사가 모를 리 없었다.


“……무례하군. 라실리아 님을 독대하는 자리였다.”

리얀이 태연하게 에셀리온의 지적을 받았다.


“아, 그랬습니까? 죄송합니다. 대화 중이시라는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개소리였다. 그렇게 청각이 무딘 기사는 없을 것이다.


“제국의 기사들은 어떤 훈련을 받는 것인가. 독대를 방해하는 것은 제국의 황실에도 무례라는 것을 생각도 못 하는 건가?”

“아아, 예예. 제 잘못입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길.”

누가 봐도 자기 잘못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태도였다.

에셀리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무지…… 용납하지 못하겠습니다, 라실리아 님. 이자들은 라실리아 님을 황후로 대하고 있긴 한 겁니까? 어떻게 이렇게 무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절그럭.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에셀리온의 칼자루가 저 혼자 울렸다.

리얀의 눈이 번쩍였고, 라실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에셀리온 전하. 나를 위한다면 화를 내실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시그레스 경, 잘못을 인정한다면 정중함을 보이도록. 에셀리온 전하는 나의 손님이다.”

“그게……. 예, 황후 폐하.”

리얀이 순순히 고개를 숙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변명을 하자면 라실리아에게 무례하게 굴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델라르타의 젊은 왕자가 하는 말이 기가 찼을 뿐이었다.

원치 않는다니.

그야 갑작스럽게 나타나신 건 사실이지만 그걸 그렇게 파고들면 안 되지.

그리고 감히 그딴 말을 폐하께서 없는 틈을 골라 주절댔겠다. 야비한 인간 같으니라고.

하여간 라실리아에게 죄송한 것은 사실이었다.


“무례함을 사과드립니다, 황후 폐하. 그리고 타국의 왕자 전하께도. 태도를 바르게 하지 못한 죄를 물어 주십시오.”

다시 한마디 덧붙이자면 리얀은 제국 내 제일가는 병기였고, 그 어떤 귀족도 리얀에게 함부로 하지 못했다. 리얀 또한 그 어떤 귀족에게도 지금처럼 고분고분히 군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 정도 했으면 적당한 체면치레식 벌이 주어지고 끝나야 했다.

챙!

하지만 에셀리온은 아니었다.


“내게 저지른 무례는 용서하겠다. 하지만 라실리아 님을 대하는 태도는 이대로 넘어갈 수 없다.”

에셀리온이 어느샌가 칼을 뽑아 들고 있었다.


“칼을 뽑아라. 앞으로 절대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줄 테니.”

라실리아가 말리기도 전에 리얀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황후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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