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세 번이 네 번이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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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세 번이 네 번이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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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세 번이 네 번이 되려면
2023.05.14.
레스칼의 말은 반만 진실이었다.
레스칼이 하루 종일 라실리아를 그리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매 순간 겪는 감정을 이유로 라실리아의 지시사항을 어길 마음은 없었다.
라실리아는 혼자 공작가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라실리아의 입장에서는 굳이 동행할 필요가 없는 일에 시간을 할애하지 말라는 배려였지만, 레스칼에게는 그것도 거절이었기에 그는 약간 침울해하는 상황이었다.
침울한 마음이 어느 순간 날카로운 거슬림이 되었다.
이유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라실리아에게 뭔가 좋지 못한 일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덜 자란 새마저 날아와 같은 소리를 했다. 왠지 엄청나게 안 좋은 기분이 든다고 했다.
그래서 덮어 놓고 황궁을 뛰쳐나왔다.
리얀이 부랴부랴 근위대를 꾸려 레스칼을 뒤쫓아 왔다.
피엘리온 공작저에 도착하고 보니 침입자가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침입자가 알고 봤더니 델라르타에서 온 손님이라고 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라실리아가 델라르타에 남겨 둔 정인 따위는 없었다는 걸.
그런데 기분 나쁜 감각은 사라지질 않았다.
발이 움직이는 대로 라실리아를 향했다.
문을 열었더니 라실리아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는 인간이 보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먼저 도착한 피피가 에셀리온을 쪼아대 라실리아의 손을 놓게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삐이!”
왜 이렇게 늦었냐며 피피가 레스칼에게 짜증을 부렸다. 제대로 붙어 있질 않으니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냐고 했다.
“덜 자란 게 아무 말이나 내뱉지 마라.”
평소 같았으면 무시해 버렸을 레스칼이 의외로 피피의 말을 되받아쳤다.
그 역시 기분이 몹시 언짢다는 뜻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제가 없는 사이에.”
라실리아는 피피와 레스칼이 동시에 기분 나빠하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했지만, 레스칼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은 눈치챘다.
라실리아가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레스칼의 뺨에 올렸다.
레스칼이 한쪽 어깨를 움찔했다.
그는 아직도 라실리아가 스스럼없이 자신을 만지는 것을 태연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일단 심장이 먼저 덜컥 내려앉았다.
“그렇진 않아.”
“그럼 정말로 그냥 보고 싶어서 오셨습니까?”
“그대가 언제 돌아올지 알 수가 없다고 해서.”
“그렇다고 황제가 무턱대고 궁을 비울 수는 없을 텐데요.”
“그게 낫지 않을까. 예정에 없는 변이보다는.”
“아……. 위험했나요?”
위험하진 않았다. 블루문은 지나갔고, 라실리아의 안전에 위협을 느낀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레스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물론 라실리아는 레스칼의 무표정에 속지 않았다.
“그냥 기다리기 싫었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거짓이 들킨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손가락 마디를 만지작대며 딴청을 피웠다.
“……그거 아나? 그대는 내게 너무 엄격해.”
라실리아의 입장에서는 엄격하기는커녕 너무 물러져서 탈이었다. 지금도 뻔히 거짓말을 하려 들었지만 화 비슷한 것도 나지 않아 어이가 없는 중이었다.
반대로 조금 따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사람은 감정을 숨기는 법이 없으니까.’
그러니 못 견딜 만큼 보고 싶었단 말도 정말 그랬다는 뜻일 것이다.
“폐하께서는 엄격하다는 말뜻을 잘못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천만에. 보고 싶어 했다는 말에 나를 나무라고 있잖아.”
“이걸 나무란다고 말할 수는 없을 텐데요.”
라실리아가 레스칼의 뺨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레스칼이 눈을 반쯤 감고 만족스러운 숨소리를 흘렸다.
“더 해 줘.”
에셀리온이 일어선 것은 그때였다.
“경황이 없어 예의를 잊고 있었습니다. 엘리아든에 끝없는 번영을. 델라르타의 에셀리온 브륀 베르호예트입니다.”
“…….”
레스칼의 눈이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느릿하게 옆으로 돌아갔다.
에셀리온을 마주하고 나서는 한층 더 못마땅해졌다. 금안이 에셀리온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 내렸다.
“어째서 타국의 왕족이 아무런 기별도 없이 내 영토에 있나?”
“미리 기별을 하지 못할 사정이 있었음을 고합니다. 본국의 사정이 타국과 연락을 취할 만큼 안정적이지 못합니다.”
“흠……. 그렇다면 내 나라에 와 있을 게 아니라 귀국의 사정을 돌보는 게 나을 텐데.”
“폐하.”
굳이 무례를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노골적인 냉대의 의미를 담은 말이었다. 라실리아가 레스칼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레스칼이 거짓말처럼 다른 눈으로 라실리아를 돌아보았다. 가늘게 접히는 금안이 너무 다정해 아예 꿀물 같았다.
“왜?”
“제게는 델라르타의 베르호예트 선왕에게 빚이 있습니다.”
“……그래서?”
“에셀리온 전하는 그 빚을 대신해서 받을 분입니다.”
“…….”
그러니 쫓아낼 생각은 하지 말아 달라는 뜻이었다.
“그건 부탁인가?”
처음에는 입술을 실룩대던 레스칼이 갑자기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셔도 됩니다.”
“그럼 좋아.”
레스칼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라실리아의 손을 꼭 쥐었다.
“그대의 부탁이라면 뭐든 참을 수 있어.”
표정은 부드러운데, 말까지 그런 건 아니었다. 에셀리온은 라실리아의 부탁으로 레스칼이 참아 주는 그런 존재가 되어 버렸다.
코앞에서 그런 말을 들은 에셀리온의 표정이 굳었다.
아니, 어쩌면 레스칼 로바니알렌 파르켄의 노골적인 푸대접 때문이 아니라 이어지는 대화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신 세 번으로 해도 될까?”
그 말에 델라르타의 예언자가 쓰게 웃었다.
쓰지만 아름다웠다. 에셀리온은 이제껏 예언자보다 더 아름다운 존재를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신이 자신의 대리인으로 정하셨겠구나 했다.
감히 인간이 탐낼 수 없는 존재여야 하니까.
에셀리온이 리카르도 숙부의 통치에 반발하고 나선 것은 제 왕권이 미치도록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왕관을 가져간 리카르도가 가장 먼저 한 짓은 대신전을 쓸어버리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 델라르타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였던 예언자가 사라졌다. 신께서 그 어떤 인간에게도 함부로 하지 말 것을 정하셨던 신의 대리인이란 반석이 없어졌다.
에셀리온은 그 무엇보다, 부친의 죽음보다 그것을 더 용납할 수 없었다.
“세 번은 너무 많은 것 같은데요.”
“천만에.”
그런데 신의 대리인은 마족의 반려가 되었다. 마족의 피가 흐른다는 제국의 황제가 신의 대리인을 제 품에 안고 여인을 보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뜨겁게 손을 만지작대고 두 눈에는 욕망을 담아 입술을 응시했다.
에셀리온은 제게서 아주 소중한 무언가를 빼앗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반대야. 너무 적어.”
“많아요. 벌써 늦은 오후인데요. 세 번을 다 하려면 시간이……,”
레스칼이 상체를 뻣뻣하게 세우며 눈을 빛냈다.
“오늘 하루 안에 다 하겠다고?”
에셀리온은 세 번이 무얼 말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절대로 알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알고 나며 어쩐지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라실리아가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런…… 게 아니었습니까?”
“좋아. 너무 좋아.”
“…….”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럼 그대의 말대로 세 번 모두 하려면 시간이 없으니까 지금 당장 궁으로 돌아가야 해.”
엘리아든의 황제가 늑대과의 짐승이었다면 지금쯤 보이지 않을 정도로 꼬리를 흔들어 대고 있었을 것이다.
에셀리온은 분명 사람 몸에는 없는 꼬리가 어지럽게 제 시야를 흔들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저는 아직 이곳에 좀 더 머물러야 합니다.”
다행히, 정말로 너무도 다행스럽게도 델라르타의 예언자가 황제를 말렸다.
“왜……? ……설마 세 번 해 주기 싫어서?”
이번에는 멀쩡한 귀가 아래로 축 처지는 착각이 일었다.
“아니요. 피엘리온 공작의 상태가 위중해서요. 임종을 지켜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군. 그럼 기다리겠다.”
“그러지 마셨으면 합니다. 폐하께서 그렇게 오래 궁을 비우실 수는 없을 텐데요.”
“그래도 돼. 세 번이니까.”
그래선 안 될 것이다. 공작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몰랐으니까. 황제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며칠씩 황궁을 비울 수는 없었다.
“그럼 이렇게 해요. 폐하께서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지 않으시면 세 번 하는 걸로.”
레스칼이 눈썹을 굳히다가 고개를 저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네 번이지.”
“아니요. 세 번이요.”
“어째서?”
“원래는 두 번이었으니까요.”
레스칼이 은근슬쩍 횟수를 세 번으로 늘리려 했다는 것을 라실리아가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라실리아는 이렇게 끌려가다 보면 세 번이 끝도 없이 늘어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대는 너무 엄격해.”
“천만에요. 그랬다면 세 번까지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게 엄격하다는 말인데.”
라실리아는 세상 진지한 레스칼의 얼굴을 놓고 작게 웃었다.
레스칼이 꺼질 듯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웃으면 아무 말도 못 하겠잖아.”
레스칼은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그게 라실리아가 그에게만 물러지는 이유였다.
“대신 세 번이 됐는데, 싫으십니까?”
“그럴 리가.”
레스칼은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명목상 부친의 임종을 지켜야겠다는 황후를 방해할 수는 없었다. 몹시 서운한 일이었지만 라실리아는 자신이 여기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기다리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쓸데없이 곱상하게 생긴 빚쟁이 왕자였는데, 그건 덜 자란 새를 두고 가면 해결될 일이었다. 덜 자란 새가 알아서 제 역할을 해 낼 것이다.
대신 그는 세 번의 키스를 받을 수 있었다.
‘세 번.’
무려 세 번이었다. 그것도 하룻밤 동안.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무섭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기다리겠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라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레스칼의 뺨을 토닥였다.
“황궁에서 뵙겠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음……. 그건 부적절한 말이지 않을까요.”
피엘리온 공작에게 어서 죽으라는 말이었으니 몹시 부적절한 언사긴 했다.
“너무 길어질 것 같으면 나를 불러. 내가 다시 오겠다. 그때는 그대가 황궁을 비워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두지.”
순간 공작저를 꽉 채울 황제궁의 시종들과 궁인들이 연상되어 라실리아가 고개를 잘게 흔들었다.
“그럴 일은 없기를 바라겠습니다.”
그 말 또한 레스칼에게는 몹시 서운했는데, 라실리아가 정문까지 배웅을 해 주는 바람에 서운함이 사그라들었다.
레스칼은 용의주도하게 공작이 죽었을 경우 즉시 그 소식을 알려 줄 근위대 기사를 하나 남겨 놓기까지 했다.
하지만 공작에게 남은 시간은 모두의 예상보다 조금 더 길었다.
그것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이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