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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미궁 (72/96)


72. 미궁
2023.05.10.


에셀리온의 손이 라실리아의 눈을 가리켰다.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것은 델라르타의 예언자 라실리아 님의 얼굴입니다. 저는 엘리아든의 황후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릅니다.”

“뭐……라고요?”

“아니,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라실리아도, 세르벤도 놀랐다.

특히나 세르벤은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붕붕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흔들어댔다.


“저는 황실 근위대가 된 이후부터 내내 황후 폐하를 뵈었습니다! 제 눈에 황후 폐하의 생김새는 그대로입니다! 물론 성격은 몹시 다르시지만 말입니다.”

라실리아가 당황한 손끝으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이게…… 내 얼굴이라고?”

에셀리온과 세르벤이 동시에 대답했다.


“네. 라실리아 님의 얼굴입니다.”

“네. 황후 폐하의 얼굴 그대로십니다!”

 

 


“…….”

일단 지금 제 얼굴이 카르타헤나 황후의 모습과 똑같지 않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 얼굴이 황후의 모습이 아니었다면 라실리아는 애초에 정체를 숨길 필요도 없었다. 황궁의 모두가 황후가 다른 사람과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에셀리온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무엇보다 라실리아가 제 정체를 인정한 지금 시점에서 에셀리온에게는 새삼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나와 카르타헤나 피엘리온 황후가 똑같은 생김새를 지녔다는 말이 되겠군요.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에셀리온이 입을 열었다.


“저 역시 의문입니다. 라실리아 님께서는 제국에서 거울을 보신 적이 없습니까? 만일 두 사람의 생김새가 똑같았다면 라실리아 님께서 그 사실을 지금껏 모르고 계셨다는 게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는 아직도 제국에서 델라르타의 예언자를 거짓으로 잡아 두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에셀리온이 틀렸다.


“에셀리온 전하께서는 예언자의 방을 보신 적이 없는 모양이군요.”

“네……? 네, 없습니다. 그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니까요. 몇몇 꿈지기만이 출입을 허락받은 것으로 압니다.”

“그곳은 창문이 없습니다. 거울과 욕조가 없듯이.”

“……네?”

“아니, 뭐라고요?”

에셀리온과 세르벤이 동시에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몹시 어둡습니다. 예언자는 꿈지기와 똑같은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갈 땐 똑같은 면사를 씁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내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거울을 처음으로 본 것은 황후의 몸으로 깨어난 직후였습니다.”

세르벤이 울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아니, 예언자는 신의 대리인이라면서요! 그런데 그런…… 말도 안 되는 곳에서 지내게 했다는 겁니까?”

충격을 받은 것은 에셀리온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예언자는 눈에 보이는 것을 경계해야 하니까요. 오로지 신께서 보여 주시는 진실만을 믿도록, 스스로의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라실리아가 쓴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어린 나이로 예언자가 되었을 때 대신관에게 들었던 말이었고, 그때는 틀리지 않은 말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닌 것 같군요.”

“그렇다면 라실리아 님께서는…… 델라르타의 대신관이 의도적으로 그런 방에 머물게 했다고 여기시는 겁니까?”

“내 얼굴이 제국의 황후와 똑같은 일이 없었어도 그랬을 것 같습니까?”

“…….”

“……!”

세르벤이 눈을 휘둥그레 떴고, 에셀리온이 입술을 질근 물었다.

반면 라실리아는 이제껏 찾았던 이유에 가까이 다가선 기분이었다.

이젠 알 것 같았다. 왜 자신이 예언자가 되기 전부터 그 방에서 살았는지.

그 방은 예언자의 방이 아니었다. 자신이 예언자가 되었기에 나중에서야 예언자의 방이라 불렸을 뿐이었다.

그곳은 어떤 여자아이를 감춰 두기 위한 방이었다. 제국의 황후와 똑같이 생긴 여자아이를.

* * *



“그렇다면…… 황후 폐하께서 쌍둥이로 태어나셨다는 말일까요? 저와 리얀처럼.”

한차례 경악이 지나간 뒤, 세르벤이 헛숨을 섞어 가며 말을 꺼냈다.


“생김새가 완전히 똑같다면 그것밖에는 답이 없으니. ……아니, 그렇다면 왜 황후 폐하께서 델라르타에 계셨던 걸까요? 왜 표식을 가진 사람은 카르타헤나 피엘리온이었던 것이고요?”

그것까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공작가에서 자신의 출생과 관련해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공작의 딸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공작은 나의 존재를 알고 있었어. 의식을 잃기 전 피엘리온 공이 과거를 언급했다. 카르타헤나 피엘리온의 황후 자리를 위협할 아이가 있으니 찾아서 없애야 한다고.”

그게 생김새가 똑같은 라실리아를 두고 한 말이 아닐 수도 없을 것이다.


“무슨 그런 미친……,”

까딱하면 라실리아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치를 떨던 세르벤이 이어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러자니 뭔가가 이상합니다. 피엘리온 공작가에 쌍둥이가 태어났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카르타헤나 피엘리온은 공작의 외동딸이었다. 반려의 표식을 지니고 태어난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라는 사실은 카르타헤나 피엘리온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장식품이었다.


“피엘리온 공께서는 딸이 쌍둥이였다는 사실을 몰랐던 걸까요? 태어나자마자 누군가가 황후 폐하를 숨겼거나……. 아니, 그랬다면 위협이 되는 존재라는 인식도 없었겠군요.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걸까요?”

확실히 말이 되지 않는 얘기였다.


“생각이 거기서 멈추는군.”

라실리아가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지금으로서는 피엘리온 공이 깨어나 무언가 말을 해 주길 바랄 수밖에.”

그때 에셀리온이 입을 열었다.


“그것 참 이상한 일입니다. 엘리아든의 피엘리온 공작이 라실리아 님의 행방을 몰랐다는 게. 제가 아는 한 피엘리온 가는 델라르타의 대신관과 긴밀한 관계였습니다.”

“……? 그건 또 무슨,”

에셀리온이 상의 안으로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피엘리온 가문의 인장이 찍힌 편지봉투였다.


“이것은 지난 세월 동안 피엘리온 가문에서 대신관 앞으로 보내온 어음입니다. 일 년에 한 번씩 적지 않은 후원금이 피엘리온 가문의 이름으로 전해졌습니다.”

귀족 가문이 신전에 후원금을 보내는 일은 흔했다.

문제는 엘리아든 내의 신전이 아닌, 가는 데만 두 달이 걸리는 멀고도 먼 델라르타에 후원금을 보낸 사실이었다.

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제가 오늘 피엘리온 가를 찾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델라르타의 대신관은 베르호예트 선왕의 적통인 제 왕권을 지지한다는 말을 남긴 사실을 전하고자. 그런 뒤 피엘리온 가문의 지원을 요청할 생각이었습니다.”

반역으로 왕권을 빼앗은 리카르도 왕제에게 반발해 에셀리온 왕자의 복위를 바라는 세력이 생겨났다. 델라르타에서는 이미 산발적인 내전이 진행 중이었다.

전쟁을 치르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었다. 에셀리온은 절박했고, 그렇기에 직접 엘리아든까지 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게 넉넉한 후원금을 보내는 가문에, 그 가문에서 찾는 아이를 숨겨 두고 말을 하지 않을 이유가 있었겠습니까?”

그럴 리 없었다.

세르벤이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반대였겠군요. 아이를 숨겨 놓고 입막음을 위해 돈을 보낸 겁니다.”

“그랬겠지. 하지만 피엘리온 공작이 그걸 모르고 있었다면 다른 자의 소행이라는 말이 된다. 공작가를 사칭할 수 있는 자의.”

라실리아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치매에 걸린 공작이 두서없이 내뱉던 말 조각들이 이제야 모서리가 맞아 들어갔다.


“공작부인이겠군.”

“피엘리온 공작부인 말씀이십니까? 공작부인이 돌아가신 지 이십 년은 된 것으로 아는데요.”

“대리인이 있었다면?”

“아, 물론 가능한 일입니다. 후원금이 매년 전해졌다고 하니 죽어서도 일을 맡길 만큼 신뢰했던 자가 있었겠습니다.”

라실리아가 덧붙였다.


“아이의 유모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유모라……. 혹시 짐작 가시는 바가 있는 겁니까?”

“유모가 함께 있었던 것 같아. 그 방에서. 아이일 때 잠시 같이 있었고, 이후에 더는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잠시 표정이 안 좋아졌던 모양이었다.


“라실리아 님.”

무릎 위에 얹고 있던 손 위에 에셀리온의 손이 내려앉았다.

어느샌가 자리에서 일어나 라실리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에셀리온이 겹쳐진 손에 제 이마를 댔다.


“아니, 꼭 그래야 합니까…….”

세르벤이 에셀리온의 뒤에서 난처한 몸짓으로 말리려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손을 뻗지는 못했다. 황후가 말리지 않는데 근위대 기사가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르벤의 작은 혼잣말은 에셀리온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가 몹시 괴로운 얼굴로 이런 말을 내뱉었다.


“부디 제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십시오. 대신관을 처벌하기를 원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신관은 이미 죽었지만 제가 왕이 되면 그자의 이름을 신전에서 영원히 지워 없애겠습니다.”

“이미 오래된 일입니다. 게다가 책임을 묻는다면 대신관보다는 피엘리온 공작에게 묻는 게 맞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라실리아 님께서 부당하고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신 것을 알게 되니 해소할 수 없는 분노가 차오릅니다.”

세르벤이 눈을 부릅뜨고 대체 네가 왜 그러냐는 말을 억지로 참던 순간이었다.


“삐이잇!”

화르륵!

서재의 창문 너머로 주홍색 불꽃이 일었다.


“……피피?”

언뜻 피피의 목소리를 들은 라실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주홍색 불꽃은 놀랍게도 창문 하나를 통째로 녹여 없앴다. 뻥 뚫린 창문으로 피피가 파드득 날아왔다.


“삐잇!”

눈을 매섭게 치켜뜬 피피가 곧장 에셀리온의 손등을 쪼았다.


“피피! 무슨 짓이야. 그래선 안 돼.”

라실리아가 서둘러 피피를 붙잡았다.


“삐이! 삐!”

피피가 라실리아의 손 안에서 날개를 퍼득이며 큰 소리를 냈다.

자신은 지금 몹시 화가 났으니 말리지 말라는 말이었다.

나머지 반은 누군지도 모르는 에셀리온을 향한 욕이었다. 어디 감히 무겁기 짝이 없는 머리통을 올려놓느냐며 험한 말을 해댔다.


“그 새는…… 무엇입니까?”

놀랐다기보다는 당황한 에셀리온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세르벤이 왠지 모르게 안도감을 느끼며 답을 해 주었다.


“불사조님이십니다. 타국의 왕자 전하께서 제국의 시작에 대해 알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불사조는 반려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불사조가 정말로 있다니…….”

에셀리온이 몹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세르벤의 말대로 불사조는 라실리아가 황제의 반려라는 증거였다. 에셀리온은 델라르타의 예언자가 제국의 황후가 되었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게 된 셈이었다.

그걸 증명하듯이, 이어서 레스칼이 들이닥쳤다.

쾅!

서재 문이 요란하게 열리고 어쩐지 창백하게 질린 공작가의 집사가 레스칼의 등장을 알렸다.


“화, 황제 폐하께서 오, 오셨습, 니다.”

집사가 덜덜 떨면서 내뱉은 말은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레스칼은 이미 서재 안으로 들어와 라실리아와 에셀리온의 사이를 파고드는 중이었다.

라실리아가 약간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레스칼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에셀리온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무시하며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대가 보고 싶어서.”

레스칼이 평소보다 몇 배는 끈적한 동작으로 손등에 입술을 붙였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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