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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신의 눈물 (71/96)


71. 신의 눈물
2023.05.07.


쾅!


“황후 폐하!”

세르벤이 도착했다.

슷!

지체 없이 칼이 움직였다.


“황후 폐하! 뒤로 물러나 계십시오! 금방 처리하겠습니다!”

캉!

경악으로 굳어 있던 침입자는 달려드는 세르벤을 힐긋 곁눈질하더니 어렵지 않게 그의 칼을 받아 냈다.


“……뭐?”

세르벤이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이렇게 간단히……?”

침입자는 세르벤의 칼을 막아선 상태에서 라실리아를 돌아보았다.


“제발! 답을 해 주십시오! 라실리아 님이 맞습니까? 라실리아 님이라면 어째서 여기 계신 겁니까?”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누군지 모를 침입자가 자신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세르벤 또한 그것을 깨달았다. 라실리아라는 이름을 지녔던 예언자의 시체를 찾으라는 레스칼의 명령이 있던 탓이었다.


“시그레스 경.”

라실리아가 세르벤에게 눈짓을 했다. 싸움을 그만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황후 폐하. 이자의 신원을 알기 전에 함부로 경계를 늦출 수는 없습니다.”

세르벤이 주춤거렸다. 그사이 침입자가 한차례 더 놀랐다.


“황후 폐하라니…… 그럼 라실리아 님이 아닌……,”

캉!

놀라느라 빈틈이 생겼던지 세르벤이 서로 얽혀 있던 칼날을 홱 뽑아냈다. 그새 정신을 차린 침입자가 다시 칼을 바로 세웠다.


“그만둬.”

라실리아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팽팽히 대치 중이었던 두 사람이 즉각 칼을 거둬들였다. 혹시라도 라실리아가 다칠 것을 염려해서였다.


“위험합니다, 황후 폐하.”

세르벤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침입자를 훑어보았다. 침입자인 주제에 자신처럼 라실리아가 다칠 것을 먼저 염려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식이었다.

탓!

침입자는 칼을 아예 거꾸로 내려 라실리아에게 내밀었다.


“제국의 황후라 불리는 분께서 본 왕국의 라실리아 님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내 심장이 하는 말을 부정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대가 라실리아 님이 맞다면 내 칼을 거둬 주십시오. 칼을 맡기는 것으로 내 목숨도 그 손에 쥐어 드리겠습니다.”

“…….”

침입자를 쳐다보고 있자 묘하게도 눈이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고 맑은, 푸른 눈이었다.

저것과 비슷한 눈을 지녔던 선한 이를 알고 있었다. 병으로 몸이 쇠약해지기 전까지 그는 꽤 괜찮은 왕이었다. 신께서도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셨던지 자신에게 미리 귀띔을 해 주셨다.

비록 자신은 그 죽음을 막지 못했지만.

저 푸른 눈은 델라르타 왕가의 눈이었다.


“그렇다면.”

라실리아가 손을 내밀었다.
 

 


“아……!”

그러자 침입자가 황급히 한쪽 무릎을 꿇고 라실리아에게 두 손으로 칼을 바쳤다.


“델라르타의 에셀리온 브륀 베르호예트가 신의 대리인을 뵙습니다.”

죽은 델라르타의 왕, 베르호예트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중 한 명이 반역에서 살아남았다.

라실리아가 몸을 낮춰 에셀리온 왕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안함과 위로를 담아.

* * *

 


“앗, 그……,”

에셀리온 왕자가 라실리아의 손을 붙들어 손바닥에 입을 맞추는 것을 본 세르벤이 몹시 곤란한 얼굴을 했다.

델라르타에 제국과는 다른 예법이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리고 뭐 하는 인간인진 몰라도 칼은 귀신같이 쓰는 저자에게 사연이 있다는 것도 알겠다. 이전까지 황후가 아닌 삶을 살았던 황후에게 저자의 이름이 의미가 있다는 것도 눈치챘다.

다만 황후에 관해서라면 속이 아주 좁아지는 레스칼이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뒤늦게라도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썩 기분이 좋진 않으실 텐데……. 그렇다고 내가 말릴 수도 없고.’

어쩌면 무례를 각오하고 말려야 될지도 모르겠다.


“묻고 싶은 게 많습니다, 라실리아 님.”

세르벤은 저자의 목소리에 쓸데없이 물기가 어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저렇게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남들은 끼어들 수 없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묻어나오는 것 같을까.


“대체 어떻게 제국으로 오시게 된 겁니까? 델라르타에는 라실리아 님께서 신전을 떠나셨다는 소문과 반역자에게 이미 죽임을 당하셨다는 소문이 함께 무성했습니다. 저는 그 어느 것도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대한 답은 몹시 길어질 것이다. 시간이 나면 차차 하기로……. ……아, 참. 타국의 왕족이니 하대를 하면 예의에 어긋나겠군. 일어서세요, 전하. 내게 무릎을 꿇으실 필요 없습니다.”

전하라는 말로 세르벤이 침입자의 신분을 짐작했다.


‘으, 왕족이라니. 그럼 진짜 못 말리겠는데.’

라실리아가 말투를 고치자 에셀리온 왕자가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타국의 왕족이라니?”

이어서 이글대는 눈이 세르벤을 향했다.


“제국에 몸을 의탁하시게 된 겁니까? 그게 아니라 저자의 귀가 문제라면……,”

에셀리온 왕자는 뭔지 몰라도 끔찍한 가정을 하고 있는 듯했다. 예언자의 능력은 희귀한 것이었다. 제국이 거기에 욕심을 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살의가 담긴 눈빛을 받게 된 세르벤이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지금 뭐라는 겁니까! 저는 황후 폐하를 감시하는 게 아니라 호위하는 겁니다. 본 제국의 황제 폐하를 모시듯 충심으로 자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세르벤이 일부러 황제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부디 저 쓸데없이 곱상하게 생긴 칼잡이 왕자가 황후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멍청이가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우리 황후 폐하라고. 혼인하신 몸이란 말이다. ……아, 그런데 두 분이 정식으로 혼인을 하셨다고 해도 되나……? 아, 몰라. 그래도 황후 폐하란 말이다.’

에셀리온은 그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


“한마디면 됩니다, 라실리아 님. 원치 않은 상황이라 하시면 제가 제국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세르벤이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그게 가능하겠느냐는 뜻으로 눈을 부릅떴다.

에셀리온은 매우 가능하다는 뜻으로 세르벤의 시선을 마주했다.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긴장을 라실리아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시그레스 경, 얘기가 길어질 듯하니 그대가 자리를 비워 주는 게 좋겠어.”

세르벤이 펄쩍 뛰고 싶다는 얼굴로 라실리아를 바라보았다.


“황후 폐하. 외람되오나 저는 아직 이자의…… 이분의 신분을 정확히 모르고 있습니다. 제가 감히 황후 폐하의 안전을 확신할 수 있는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검을 맡기는 걸 보면 알겠지만 델라르타의 에셀리온 전하께는 나를 해칠 이유가 없다. 그대의 우려는 불필요하다.”

“하지만 황후 폐하. 제게는 황제 폐하께 받은 명이 있음을 부디 배려해 주십시오. 저는 도무지 낯선 자와 황후 폐하를 한곳에 두고 자리를 비울 수 없습니다.”

에셀리온이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켜 세르벤의 앞에 섰다.


“입을 적게 움직여라.”

“……네? 뭐라고 했습니까, 지금?”

“라실리아 님은 신의 입. 그분 앞에서 멋대로 입을 놀려 말을 더하시게 만들지 마라.”

“하……. 그럼 저는 황제의 명을 받은 몸입니다. 제가 하는 행동은 폐하의 뜻이니 폐하의 명이 아니고서는 말릴 수 없습니다.”

“신 앞에 누가 인간의 신분을 따지는가.”

“아, 외람되지만 그 나라 신은 제국의 신과는 달라서 말입니다.”

“불경하군. 제국은 기사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시켜야겠는데.”

“기사로서 받는 교육은 칼에 물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입으로 물어도 소용없을 줄 압니다.”

“그렇다면 더 묻지 않아도 되겠군. 제국의 기사 교육은 수준 이하였다.”

“얼마나 물었다고 그런 속단을 하십니까.”

세르벤이 무의식중에 손을 움직여 칼자루를 쥐었다.

에셀리온이 일말의 동요도 없는 눈으로 세르벤의 움직임을 좇았다.


“뽑아라. 제대로 된 교육을 시켜 줄 테니.”

“칼도 없으신 분이 그래도 되겠습니까?”

“둘 다 그만하도록.”

결국 라실리아가 끼어들어야 했다.


“시그레스 경, 그대가 곁에 있도록 허락하겠다. 대신 다른 근위대는 모두 물리도록. 듣는 귀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에셀리온 전하, 일단 앉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서로 주고받을 얘기가 많으니 하나씩 하지요.”

라실리아가 서재를 가로질러 소파와 티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로를 어정쩡하게 노려보던 두 사람은 결국 어쩌지 못하고 라실리아를 따라 움직였다.

* * *

일단은 근위대를 복귀시키는 게 먼저였다.

에셀리온 왕자 일행은 모두 셋이었다. 둘 다 모두 범상치 않은 자들이었던지 공작저가 한동안 계속 시끄러웠다.

근위대가 왕자의 일행을 응접실로 데려와 감시 아닌 감시를 하는 동안, 서재에서는 라실리아와 에셀리온 왕자가 길게 엉킨 이야기를 시작했다.

 


“……도무지 믿지 못하겠습니다.”

에셀리온은 두 눈에 가득 혼란을 드러냈다. 그가 고개를 내저을 때마다 부드러운 은발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라실리아 님이 엘리아든 황제의 반려라니……. 저는 도무지……,”

무릎 위에 얹어 주먹을 꾹 움켜쥔 손이 가늘게 떨려 왔다.


“나도 아직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했습니다. 조금씩 적응해 가는 중입니다.”

라실리아가 위로를 섞은 안쓰러운 눈으로 에셀리온을 바라보았다.


“그게…… 확실한 겁니까? 왜 라실리아 님이 마족의 반려가 되어야 하는 겁니까? 애초에 그럴 이유가 조금도 없지 않습니까!”

“하…….”

그 말에 세르벤이 헛숨을 내뱉었다.

그럴 이유가 없다니. 이유가 너무 넘쳐서 탈이었다. 저 불신에 절은 왕자에게 레스칼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럼 왜 라실리아가 운명의 반려일 수밖에 없는지 단숨에 깨닫고도 남을 것이다.


“그 이유를 나도 계속 찾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 찾고 계시다는 말은 찾을 수 없다는 말과 같을 수 있습니다. 애초에 그럴 이유가 없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어쩌면 누군가가 라실리아 님을 기만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기만이라니. 대체 제국을 어디까지 모욕하실 참입니까.”

세르벤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지금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황후 폐하를 기만하고 계시다는 말입니까? 아무 상관도 없는 이를 운명이라 속이고 있다고요? 그런 의미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라실리아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세르벤이 곁에 있으면 대화가 매끄럽게 흐르지 않을 것이라 짐작을 하긴 했다.


“시그레스 경. 에셀리온 전하께 시간을 드리도록. 내가 그랬듯이 전하께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시간이야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발언은 근위대 기사로서 도무지 그냥 넘기지 못하겠습니다.”

“에셀리온 전하를 납득시키는 것은 내 몫이다. 경이 나설 것은 없어.”

“그래도 황후 폐하,”

라실리아가 손을 들어 세르벤의 말을 막았다.


“에셀리온 전하. 믿지 못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유를 찾고 있을 뿐, 황제의 반려라는 사실을 의심하고 있진 않습니다. 내가 황후의 몸을 빌려 되살아난 것이 첫 번째 이유일 겁니다.”

“……네?”

에셀리온이 어딘가 한 대 맞은 듯한 얼굴을 했다.


“황후의 몸을 빌려 되살아났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오히려 라실리아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을 묻는지 모르겠군요. 전하께서 지금 보고 있는 내 얼굴이 제국의 황후라는 것을 모르나요?”

에셀리온은 뼈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말을 이었다.


“비록 단 한 번뿐이었지만…… 저는 라실리아 님의 얼굴을 본 적이 있습니다.”

“……?”

“평생 잊을 수 없는 얼굴이라 생각했습니다. ……특히나 대관식 왕관의 가운데 보석, 신의 눈물이라고 부르는 그 보석과 똑같은 보랏빛 눈동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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