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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침입 (70/96)


70. 침입
2023.05.03.



 
하얗게 센 머리칼은 별 문제가 아니었다.

초점이 사라져 멍해 보이는 눈도, 기운 없이 벌어진 입도 그랬다.

가장 큰 문제는 냄새였다.

공작에게 머문, 오물의 냄새.

그건 피엘리온 공작이 더 이상 스스로의 오물을 처리할 수도 없는 상태라는 뜻이었다.


“아, 그새 또…….”

집사가 새파래진 얼굴로 중얼거리더니 시중 들 자를 부르겠다며 부리나케 사라졌다.


“분명히 그때는 빼앗긴 의식을 돌려받은 것 같았는데…….”

데칸이 말끝을 흐렸다.

라실리아에게 마족의 힘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한 건 데칸이었다. 라실리아 덕에 이베트와 세르벤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처럼, 피엘리온 공작도 그러리라 믿었다.


“그랬을 것이다.”

공작을 바라보던 라실리아가 말하자 데칸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 혹시 뭔가 느껴지십니까?”

“그 반대겠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족의 흔적은 없다.”

“그렇군요. 그럼 피엘리온 합하께서는 지금……,”

“병이 온 게 아닐까.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공작은 불과 며칠 전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인다.”

“제 눈에도 그렇습니다. 머리칼이 센 것도……. 어쩌면 의식을 빼앗겼던 일로 기력을 심하게 잃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공작에게서는 그때 이베트와 세르벤에게서 느껴지던 이질적인 느낌이 없었다. 그저 훨씬 더 늙어 보일 뿐이었다.


“매우 안 좋은 느낌이 드는데……. 혹시 마력이 구현될 때 인간의 생명력을 갉아먹거나 하는 걸까요? 황실 재단사의 죽음도 그렇게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슈라이든 공녀나 시그레스 경에게는 그런 일이 없었잖아.”

“두 사람은 마력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짧게 받았습니다. 다행히도 황후 폐하께서 그 자리에 계셨으니까요.”

데칸이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디알레나?”

공작의 두 눈에 반짝 초점이 돌아왔다. 그가 쳐다보는 것은 라실리아였다.


“디알레나?”

라실리아가 전혀 알 수 없는 이름을 두고 의아해하자 데칸이 재빠르게 알려 주었다.


“작고하신 공작부인의 이름입니다.”

“공작부인이라면……,”

공작이 죽은 부인과 딸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데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안타깝게도 피엘리온 합하께 치매가 온 것 같습니다.”

“디알레나!”

갑자기 공작이 놀라운 힘으로 라실리아의 팔을 붙들었다.


“읏,”

“황후 폐하!”

데칸이 공작의 팔을 떼어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공작은 라실리아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공작이 얼굴을 무섭게 일그러트린 채 라실리아를, 그러니까 죽은 공작부인을 다그쳤다.


“어디다 감췄는지 말을 해! 어서!”

“……?”

“감춰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잖아! 지금이라도 찾아야 해!”

데칸이 공작을 등 뒤에서 붙들었다.


“합하, 손을 놓으십시오. 지금 무례를 범하고 계신 분은 공작부인이 아니라 황후 폐하십니다.”

데칸이 힘으로 공작을 떼어놓았다. 공작이 발버둥을 치며 더 거세게 외쳤다.


“찾아서 없애야…… 확실하게 죽여 없애야 해!”

“……죽인다고?”

공작의 말이 데칸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공작부인이 무얼 감추었다. 공작은 그걸 찾아서 없애야 했다.

없앤다는 게 죽이는 일이라고 했으니 공작부인이 감춘 건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공작부인이 죽은 지 이십 년도 넘었으니 이제는 아는 사람도 얼마 없을 일이었다.

공작가의 낡은 비밀이 공작에게 치매가 오면서 드러나게 생겼다.


“누굴 찾아야 한다는 겁니까?”

라실리아가 데칸에게 물러나라는 시늉을 한 뒤 공작에게 물었다.

오래된 일이었지만 그래도 공작이 누군가를 죽이려 들었다는데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입니까?”

몸이 자유로워진 공작이 무서운 힘으로 라실리아를 움켜쥐었다.


“당신도 알잖아, 디알레나! 그 애가 살아 있으면 언제든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걸! 카르티의 황후 자리뿐 아니라 가문 전체가!”

“뭐라고?”

라실리아가 놀라 몸을 움칠댔고, 공작이 하도 힘껏 라실리아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소매가 부욱 찢기는 소리가 울렸다.

데칸이 재빨리 공작을 밀어내고 라실리아를 부축했다.


“황후 폐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공작의 얘기를 더 들어야겠다. 황후의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가 있었다면 내가 알아야 되는 일일지도 몰라.”

“동감입니다. 허락하시면 제가 손을 써 보겠습니다.”

“허락한다.”

고개를 끄덕인 데칸이 공작을 향해 돌아섰다.

공작은 그새 다시 초점이 사라진 멍한 눈을 하고 있었다.

데칸이 공작의 머리에 손을 대고 무언가 주문을 외웠다.

두 사람을 에워싼 공기에 이질적인 흐름이 더해진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그건 순간이었다.


“……흣!”

피엘리온 공작이 갑자기 눈을 감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데칸이 서둘러 공작을 눕히고 목덜미의 맥을 쟀다.


“몸이 너무 쇠약해진 상태입니다. 주술이 작용하기 전에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아……. 안타깝군.”

공작의 병환도 안타깝고 주술이 듣지 않은 것도 안타까웠다.

그리고 치매에 걸린 공작이 내뱉은, 뭔지 모를 수상쩍은 일을 더 확인할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짐작 가는 바가 있나? 나는 공작가의 사정을 잘 모르니. 공작이 말하는 게 정적에 관한 일인가?”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공작부인께서 살아계실 때의 일이면 제가 은의 방패를 맡기 전입니다.”

은의 방패는커녕 기사가 되기도 전 일이었다.


“원하시면 알아보겠습니다. 약간의 시간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다.”

황후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사람을 공작은 그 애라고 칭했다. 나이가 어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어린애가 대체 무슨 이유로 장차 황후 자리와 공작 가문 전체를 위협할 수 있었을까.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니 어린애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아이의 출신이 문제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저 공작가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왠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마음이 걷는 길에 돌부리가 생겨난 듯, 자꾸만 발이 채였다.


‘트리니다드의 주술사가 그랬지. 귀보다는 마음을 의지하라고. 해답은 어떤 형태로도 올 수 있다고.’

그러니 자꾸 발이 걸리는 이유를 살펴야 했다.

* * *

공작이 다시 의식을 잃는 바람에 라실리아는 공작가에 발이 묶였다.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로서 카르타헤나 피엘리온은 공작의 유언을 들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더 지체될지 모르는 일이라 일단 세르벤이 황궁에 부랴부랴 전령을 보냈다. 그사이 데칸은 공작가의 비밀을 알아보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해가 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라실리아는 집사의 부탁으로 당장 공작의 인가가 필요한 공작령의 일들을 살펴야 했다.

델라르타의 예언자가 갑자기 떠맡기에는 제법 생소한 일이었지만 집사가 눈물로 하는 호소를 끝내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 몸을 빌려 쓰는 대가라고 생각해야지.’

라실리아는 책상 위에 한 가득 놓인 장부와 편지, 여타 문서들을 보며 쓰게 웃었다.


‘황후로 살아야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조용한 저녁이었다.

공작은 아직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근위대는 황궁에서와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제자리를 지켰다.

공작의 서재에는 라실리아가 사각사각 펜을 움직이는 소리만이 간간이 이어질 뿐이었다.


“……?”

그 조용하고 지루한 시간을 끝낸 것은 희미한 소음이었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라실리아가 몸을 일으켜 서재의 창을 열었다.


“침입자다! 잡아!”

“저쪽이다!”

창을 열자 근위대의 고함 소리가 와락 덤벼들었다. 삼 층 서재의 창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문과 앞뜰이 어수선했다. 근위대가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침입자라고……?”

라실리아가 눈매를 일그러트리는 사이 세르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잊지 마! 이곳에는 황후 폐하가 계신다! 황후 폐하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세르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세르벤은 곧장 이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그러다 창가에 서 있는 라실리아를 발견했던지 손을 마구 흔들었다.


“들어가 문을 잠그십시오, 황후 폐하! 창문까지 전부!”

“아……,”

그 말을 들은 라실리아가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공작가의 침입자가 무얼 노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게 자신이 아니라는 법은 없었다. 침입자는 자취를 감추었다는 말리크의 기사일 수도 있었다.

철컥!

라실리아가 일단 열려 있는 창문의 빗장을 내렸다. 그리고 서재의 문을 향해 달려가 손잡이에 꽂혀 있는 열쇠를 돌렸다.

철컥!

굵직한 열쇠가 돌아가며 묵직하고 단단한 소리를 흘렸다.


“아, 저 방에도 창문이 있을 텐데.”

피엘리온 공작의 서재에는 문이 연결되어 있는 작은 방이 하나 더 있었다. 공작의 앞으로 온 일 년 치 편지들을 분류해 보관해 두는 곳으로, 시종들 사이에서는 편지방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라실리아가 편지방을 향해 가던 중이었다.


“…….”

문득 라실리아가 걸음을 멈췄다.

분명히 들렸다. 방금 자신이 걸어 잠근 창문의 빗장이 올라가는 자그마한 금속음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십시오. 소리도 지르지 마시고.”

어느샌가 들어온 침입자가 등 뒤에서 말을 건넸다.

소리는 없었지만 그가 칼을 쥔 손을 들어 올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등 뒤에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내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나는 그저 피엘리온 공작과 얘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일 뿐입니다. 볼일을 마치면 조용히 사라질 겁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내가 일을 번잡하게 만들 목격자를 눈앞에 두고도 칼은 그저 쥐고만 있으니 일단 그것으로 믿어 주었으면 합니다. 피엘리온 공작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공작을 만나야 하는 일인가?”

“보다시피. 그리고 시간을 끌 요량이라면 안됐다는 말을 해야겠군요. 내 말을 따라 줄 용의가 없는 것 같으니 미안하지만 잠시 기절해 줘야겠습니다.”

슷!

등 뒤에서 손이 들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라실리아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공작은 의식을 잃었다.”

“……?”

침입자의 손이 칼의 손잡이로 라실리아의 뒷목을 치기 직전 멈춰 섰다.


“그러니 안된 건 그쪽이겠지. 침입한 보람도 없이 공작과 얘기를 나누는 일은 불가능할 테니.”

“하필……. ……아니, 그 말이 거짓일 가능성도 있겠지. 내 눈으로 확인하겠습니다.”

“내 말을 믿지 않는군. 어쩔 수 없지. 그것이 그쪽의 오늘 운명일 테니. 다만 불신의 책임도 온전히 그쪽의 몫이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잠……깐, 그 말……,”

라실리아는 시간을 끌고 있는 게 맞았다. 세르벤이 곧 도착할 것이고, 침입자는 당장은 칼을 쓸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침입자의 반응이었다.


“그 말! 그 말을 대체 어디서 들었습니까?”

“……? 무슨 말을?”

“불신 또한 인간의 운명이라는 그 말!”

침입자가 홱 발을 움직여 라실리아의 앞으로 돌아왔다.

라실리아는 그의 눈이 경악으로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설마…… 라실리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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