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상식의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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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상식의 범위
2023.04.30.
그런 말을 몹시 진지하게 하고 있다는 점이 레스칼다웠다.
“보통은 그러지 않을까요?”
“전혀. 내가 알기론 아니야.”
저렇게 확신을 가지고 진지한 얼굴로 말을 하면 듣는 사람은 한 번쯤 헷갈릴 만도 했다.
“……세수도 안 한 얼굴이잖습니까.”
“세수하기 전에 키스하면 안 되나? 내가 알기로 그런 황법은 없는데.”
황법은 없지만 상식이란 게 있었다.
라실리아가 코끝을 살짝 흔들었다.
“제가 싫어서요.”
“아……. ……그렇다면.”
레스칼이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렸다. 전혀 닮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피피가 날개로 얼굴을 팩 가리는 모습이 연상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면서도 내내 그것만 기다렸는데.”
고개를 돌린 채 레스칼이 작게 덧붙였다.
큰일이었다. 이제 저 모습이 이해 못 할 게 아니라 애틋하기도 했다.
“그럼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그대가 원한다면.”
라실리아가 피식 웃고 침대에서 내려서려고 하자 레스칼이 재빠르게 소매를 붙잡았다.
“하지만 알아 둬. 내가 물러나는 건 결코 세수를 하지 않은 그대와 입 맞추는 걸 꺼려서가 아니야. 내게는 세수를 하나 하지 않으나 똑같은 얼굴이다. 그대가 원해서 물러나는 거야.”
그게 저렇게 진지한 얼굴로 할 말인 걸까.
“알고 있습니다.”
“안다니 됐어……. 아니, 아는데 왜 꼭 세수를 해야 하지? 똑같다고 했는데.”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싫어서요.”
“그러니까 싫어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거야.”
“더 좋을 이유도 없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계속 방해하지만 않으시면 세수는 더 빨리 마칠 수 있습니다.”
“아, 그렇다면.”
마침내 레스칼이 소매를 놓았다.
기분 탓일까.
광대 근처에 미미한 홍조가 보이는 것 같았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그가 한눈에 달라진 걸 알 수 있을 만큼 붉은 기가 드리워진 얼굴로 라실리아를 향해 말했다.
“그대가 그런 말을 해 줄 줄은 몰랐는데. 몹시 기쁘군.”
라실리아는 레스칼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 당연한 말을 한 것 같은데요.”
“아, 그게 당연한가? ……그렇겠군. 그대는 나의 반려니까.”
“반려가 아니라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닙니까?”
“무슨 소리야, 그게.”
레스칼이 미간을 굳혔다.
“나는 그대가 아닌 그 누구에게도 한시라도 빨리 키스하고 싶다는 말 같은 건 할 수 없어. 그럴 생각이 들지도 않을 테고.”
“네?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습니까?”
“방금.”
안 했다.
“빨리 세수를 마치고 키스할 수 있게 소매를 놓아달라고 했잖아.”
“…….”
남의 말을 멋대로 중간에 왜곡하지 말아 주었으면 했다.
“그런 뜻이 아니……,”
레스칼이 재빨리 말을 끊었다.
“어서 다녀와. 내가 배웅하겠다.”
욕실까지 배웅하겠다는 게 처음은 아니라 새삼스럽진 않았다.
“그렇다면.”
라실리아가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섰다.
욕실 문 앞까지 라실리아를 에스코트한 레스칼이 문을 닫아 주기 전,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그대가 세수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나는 여기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기다릴 거야.”
그럴 것 같았다.
지금 레스칼을 말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뜻대로.”
탁.
라실리아가 욕실 문을 닫았다.
이베트를 부르지 않은 바람에 혼자서 세수를 해야 했다. 소매를 걷고 세면대에 물을 따르고 얼굴을 적셨다.
이상하게도 레스칼을 보고 있던 탓인지 제 뺨의 온도도 평소보다 좀 더 뜨듯하게 느껴졌다.
* * *
“아…… 제, 제가 잘못…… 잘못 왔……나요?”
침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이베트가 알 턱이 없었다.
이베트는 단지 공작가에서 급히 온 전갈을 들고 한시라도 빨리 황후 폐하께 전해 드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달려왔을 뿐이었다.
하필 그때 라실리아가 세수를 마치고 약간 긴장한 얼굴로 욕실에서 나오던 순간이었다는 게 유감이었다.
“그게…… 피엘리온 합하께서 깨어나셔서…… 다급히 황후 폐하를 찾으신다고…… 합하께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며 공작가의 전령이 몹시 급해 보여서…….”
하긴, 다들 갓 아침을 시작하는 이 시간에 벌써 궁에 달려와 있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도 급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베트는 공작가의 전령이 땀을 뚝뚝 흘리며 제발 부디 간절히 황후 폐하께 말씀을 좀 전해 주십사 하는 간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하여간 그랬는데, 아직도 나이트가운 차림새인 폐하께서 자신을 쳐다보았다.
이베트는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발을 뒤로 물리며 눈으로 애처롭게 라실리아를 찾았다.
“화, 황후, 황후 폐하…… 세, 수를 마치셨……으니 제가 빨리 오, 옷을 갈아입혀 드릴……. 아니, 근데 제가 뭔가를 자, 잘못 한 것 같고 막……,”
저러다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글썽댈 것 같았다.
라실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공녀가 잘못한 건 없어. ……급한 일이 생겼으니 제 작은 약속은 조금 뒤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폐하.”
“…….”
레스칼이 입술을 실룩였다.
엄청나게 실망하고 마음 상했다는 표정이라는 것을 몰라볼 수가 없었다. 이베트의 눈에는 그저 몹시 무서워 보이겠지만 라실리아에게는 아니었다.
“……. ……밤새도록 기다렸는데.”
작은 한숨 같은 대꾸가 들려왔다.
“안 되는 겁니까?”
라실리아가 되묻자 레스칼이 진짜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마음 같아서는 그럴 수는 없다고 하고 싶지만…… 그대가 그렇게 말한다면.”
반듯하고 넓은 직각 어깨가 아래로 처지는 건 원래 저렇게 안쓰러워 보이는 걸까.
다른 남자가 저러는 걸 본 적이 없는 라실리아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라실리아는 제 말이라면 저런 표정을 지으면서도 들어주려고 하는 황제가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너무 쉽다고 생각했어. 그런…… 엄청난 일이 갑자기 생길 리는 없으니까. ……나는 원래도 오래 기다릴 생각이었으니까 괜찮아. ……괜찮을 것이다. 아마도.”
그 말을 들었을 땐 그가 더욱 사랑스러워졌다.
사실 그들은 키스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아직도 키스를 엄청난 일이라고 표현했다.
“폐하.”
“왜?”
라실리아가 까치발을 들어 레스칼의 양쪽 귀를 잡았다.
레스칼이 흠칫, 몸을 굳히는 사이 라실리아가 재빨리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붙였다 떼었다.
“지금은 이걸로 참으세요. 나중에 더 해 드리겠습니다.”
“아……?”
안타깝게도 레스칼은 너무 놀란 나머지 반응이 늦었다.
굳어 있는 그를 두고 라실리아가 몸을 돌렸다.
“이제 옷을 갈아입겠다. 공작가의 전령은 기다리는 중인가?”
“네, 네. 황후 폐하. 황후 폐하께서 답을 주시는 걸 꼭 듣고 돌아가야 한다면서 기다리는 중입니다.”
“시간이 없다 했으니 나도 빨리 움직이는 게 좋겠어. 옷은 간단한 것으로 입혀 줘.”
“네, 황후 폐하.”
이베트가 침실 문을 여는 순간에서야 레스칼이 몸을 움직였다.
“잠깐. 잠깐만.”
레스칼이 등 뒤에 다가와 서는 것을 보고 라실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입,”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이마에 짧게 입술을 댔다 떼었다. 그러느라 잠시 말을 멈추게 된 라실리아가 레스칼을 빤히 바라보았다.
“고맙다고.”
“…….”
“그리고 약속을 미뤘으니 두 번 해 줘야 해.”
레스칼다운 말이었다.
라실리아가 그만 피식 웃어 버렸다.
“그건 봐서요.”
“뭐? 약속을 미룬 건 그대인데,”
“이미 한 번 하신 게 아닙니까?”
“아니, 달라. 이건 감사의 표시였다.”
“그렇게 폐하가 하고 싶을 때 하시면 제가 해 드리겠다는 약속도 별 의미가 없지 않을까 싶은데요.”
“완전히 다르다. 내가 하는 것과 그대가 해 주는 것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어. 누구도 이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레스칼의 금안은 이럴 때 효과적이었다.
저 이질적이고 찬란한 금안 덕에 레스칼은 입으로 무슨 헛소리를 하든 몹시 그럴싸하게 들렸다.
라실리아는 아무래도 자신이 반려라는 이유로 그에게만 유독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다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생각보다는 약속이 좋은데.”
“……그렇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꼭.”
레스칼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이글대는 눈으로 라실리아를 보내 주었다.
침실과 이어진 옷방으로 들어서며 이베트가 작게 속삭였다.
“저는 황후 폐하께서 정말 대단하신 분 같아요…….”
“어째서?”
“폐하를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으셔서요.”
“무서워할 이유가 없는데.”
“아니, 그게…… 그렇지 않거든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이베트의 눈 밑이 파래 보여서 그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 * *
이번에도 세르벤과 데칸이 동행했다.
세르벤은 황실 근위대를 지휘했고, 데칸은 개인 호위처럼 라실리아의 곁을 지켰다.
더는 숨길 게 없다는 것은 서로에게 편했다. 라실리아는 억지로 핑계를 만들어 데칸을 떼어놓을 필요가 없었고, 데칸은 당연하게 라실리아와 세 발짝 거리에 머물 수 있었다.
“그게…… 좋지 않다고…… 그래서 말씀을 드렸는데…….”
라실리아를 공작의 방으로 안내한 공작가의 집사가 자꾸만 말끝을 흐렸다.
데칸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피엘리온 공작의 현재 상태는 일단 대외비였다. 공작가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안 될 일인데, 그걸 황제의 근위대 기사가 본다는 게 영 불편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데칸이 은의 방패라는 것을 모르기에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지금 눈으로 보지 않아도 피엘리온 공작의 상태가 은의 방패를 통해 황제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내 호위에까지 마음 쓰지 않아도 될 일이다. 문을 열도록. 일 분이 다급한 상황이라 하지 않았나?”
“그렇긴 하지만…….”
집사가 마지못해 공작의 침실 문을 열었다.
“……황후 폐하의 길고 고귀하신 이름에는 피엘리온도 함께 있음을 부디 상기해 주십시오. ……합하, 황후 폐하께서 드십니다.”
황후가 됐다 해도 여전히 이 집안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 달라 이른 집사가 공작에게 황후의 방문을 알렸다. 그만큼 공작의 상태가 밖으로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정중하게 옆으로 비켜선 집사의 손짓에 따라 라실리아가 공작의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막 한 발을 내딛는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
집사가 왜 그렇게 데칸을 경계했는지를.
“피엘리온 공작…….”
공작을 바라보는 라실리아의 눈이 충격으로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