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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삼 분 (68/96)


68. 삼 분
2023.04.26.



“……나를 한 대 후려쳐. 빨리.”

수건 끝을 움켜쥔 레스칼이 입술 위에 대고 속삭였다.

맞닿아 있는 입술 탓에 후려치라는 말이 터무니없이 달콤한 밀어가 되었다.


“수건을 놓아주시면 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라실리아가 그를 따라 속삭이자 레스칼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쳐야 놓을 수 있을 것 같아.”

“아니요. 놓을 수 있어요.”

“……그걸 그대가 어떻게 아는데.”

라실리아라서 알 수 있었다.


“폐하께서는 제 말을 들어주지 않으신 적이 없으니까요.”

“…….”

레스칼이 입술을 마주 댄 채 숨을 거듭 들이쉬었다. 수건 끝을 쥔 손가락이 힘이 과하게 들어갈 때처럼 꿈틀거렸다.

그러나 레스칼은 끝내 손을 떼지 못했다.


“그대가 떼어 줘. 아무래도 손이 굳은 것 같다.”

그 말이 시무룩하게 들려와 라실리아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겠습니다. 손에 힘을 주지 마세요.”

“알았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거지만, 내가 이 이상을 바란다고 하면 그대는 화를 내겠지?”

“화를 내진 않겠지만 실망할 것 같습니다.”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그렇게 느껴질 것 같아서.”

“……그렇다면.”

손이 굳은 것 같다던 그가 스스로 손을 떼었다. 어쩐지 지금 키스를 해 주고 싶어졌다.


“이제 목욕을 마쳐야겠습니다. 좀 추워져서.”

하지만 그랬다간 이 장소를 내내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미적지근하게 들러붙는 아쉬움을 털어내고 라실리아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생각보다 몸을 일으키는 게 힘들어서 라실리아가 깜짝 놀랐다.


‘이런 걸 고통스럽다고 한 건가. 그럼 좀 엄살인 것도 같고.’

엄살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어쨌거나 그는 방금 전부터 계속 라실리아를 웃게 만들고 있었다.


“기다리겠다. ……문은 닫고.”

“폐하께서도 가운을 갈아입으셔야 합니다. 다 젖었어요.”

젖었다는 말이 민망했다. 젖은 수건에서 옮겨 온 물기였다. 그래서 주로 가슴 부근이 푹 젖어 있었다.


“아……. 이대로 침대로 갈 수는 없겠군. 그대가 불쾌할 테니.”

레스칼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금방 돌아오겠다.”

“네, 폐하.”

“그 전에 그대를 먼저 배웅하고. 욕실로 들어가도록.”

라실리아가 저도 모르게 또 웃었다.


“배웅이 필요한 일입니까?”

“내가 먼저 자리를 뜰 수는 없어.”

이해하기 조금 어려웠지만 레스칼이 단호해 보여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실리아가 욕실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잠시만.”

문을 닫아 줄 것처럼 잡고 있던 레스칼이 젖은 머리칼 사이로 어깨에 입술을 붙였다.


“이제 됐어. 다녀오겠다.”

쿵.

비로소 문이 닫혔다.

욕조로 돌아간 라실리아가 그새 식은 물에 비눗기를 닦아 냈다.

레스칼이 가져다준 새 수건으로 물기를 말린 뒤 잠옷을 입을 때까지 어깨에 남은 수상한 감촉은 사라지지 않았다.

* * *

레스칼은 삼 분을 늦었다.

황제궁이 방 하나 정도만큼만 더 가까이 있었어도 늦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레스칼은 삼 분을 늦었고, 삼 분은 라실리아가 우연히 눈길이 닿은 책을 펼쳐 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직도…….”

라실리아는 그 뒤로 정신없이 책에 빠져들었다.

최초의 반려가 남긴 수기는 너무 많은 부호와 암호 같은 줄임말이 가득해서 그냥 지독히 난해한 낙서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쳐다보고 있으면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동그라미를 겹쳐 그린 문양은 물을 의미하고 역삼각형을 불을 의미하는 식이었다.


“……더 봐야 하나?”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등 뒤에서 조심스레 물었다.


“네. 조금만 더.”

“얼마나 더?”

“조금만.”

“아까도 조금이라고 했는데.”

“조금만요.”

“그러니까 아까도…….”

“…….”

사륵.

대답 대신 오래된 책을 넘기는 소리만이 울렸다.

레스칼이 꺼질 듯한 한숨을 쉬었지만 라실리아는 듣지 못했다.


“기다리겠다. ……괜찮아. 한 방에 있으니까.”

“네.”

대답이 건성이라는 건 누가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입술을 실룩이던 레스칼이 표정을 바꿔 작게 덧붙였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나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만드는 게 미안하다면 괜찮아. 그대가 키스해 주면 잊겠다.”

“네에…….”

레스칼이 씩 웃었다.


“약속한 거야.”

라실리아가 책장을 넘기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레스칼은 라실리아의 맞은편에 앉아 책에 집중한 얼굴을 감상했다.

쳐다보는 것도 충분히 즐거웠다. 저 책을 다 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해도 기꺼웠다. 라실리아는 약속을 모른 척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

그러나 책장을 넘기던 그 어느 순간, 라실리아가 조짐도 없이 스르륵 눈을 감았다.


“이렇게 잠이 든다고?”

레스칼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면서도 재빨리 라실리아에게 다가가 몸을 붙잡은 다음 손에서 책을 내려놓게 했다.

잠이 들어 기운을 잃은 몸이 스르륵 제게 기댔다.

레스칼이 뺨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 넘겼다.


 


“어처구니가 없는데…… 그래서 귀여워.”

레스칼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돈한 그가 라실리아를 안아 들었다.

라실리아를 안을 때마다 느끼는 일이었지만 사람의 몸은 원래 이렇게 가벼운 건지 번번이 놀랐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레스칼은 라실리아가 아닌 다른 몸을 안아 든 적이 없긴 했다.


“이렇게 가벼워도 괜찮은 건가.”

레스칼은 몹시 진지했다.


“이러다 사라지면 어쩌지.”

그래서 제 몸에 잡아 묶고 싶다는, 마족다운 본능이 뱃속에서 꿈틀거렸다.

혹시라도 깨울까 숨죽인 걸음이 침대로 향했다. 라실리아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레스칼이 이불을 턱끝까지 끌어올려 덮어 주었다.

숨소리가 고요했다.

레스칼이 옆으로 몸을 세워 누웠다. 잠든 얼굴이 곧장 내려다보이는 게 몹시 만족스러웠다.

* * *



-아니. 아직은 아니야.

인간처럼 높낮이가 없는 마족의 음성은 인간의 귀에는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적응을 하고 나면 다른 얘기가 되었다. 음이 일정한 목소리는 그가 늘 같을 것이라고 말해 주는 듯했다.

왜 아니라는 건데. 할 수 있을 것 같다니까.

반대로 제 목소리는 약간 떼를 쓰는 것처럼 들려왔다.


-인간의 마음을 다루려면 인간의 마음을 가장 깊은 바닥까지 들여다봐야 해. 네가 그런 일을 하길 원치 않는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던 것 같다.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벌써 나는 인간의 마음을 읽게 되었어. 당신도 나도, 누구도 원치 않았지만 그렇게 됐잖아.


-그래서 몹시 슬프다.

그만둬. 내게 일어난 일을 전부 다 당신 잘못이라고 하는 건.

당신은 내게 심장을 쪼개 주었잖아. 그 새가 있는 한 나는 다칠 일도 없을 거야. 그 이상 뭘 더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그는 무언가를 주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남은 심장을 전부 내놓으라고 해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래서 그가 슬퍼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신이 준 거잖아.

그러니까 나는 그걸 불행이라고 여기지 않을 거야.

그건 내 힘이야. 그 힘을 가지고서도 나는 여전히 인간을 믿을 거야. 그들을 사랑할 거야.

당신이 슬퍼할 일은 어디에도 없어.

비늘이 돋은 얼굴을 다정히 쓸었다. 그가 흠칫 어깨를 뒤로 젖혔다.


-조심해. 손을 베이지 않도록.

이 정도는 괜찮아.

피를 종속하는 일은 기나긴 인내의 시작이었다.

그의 몸이 전부 인간이 되려면 그들은 아직도 까마득한 시간을 함께 보내야 했다.

그런데 나는, 그것도 좋아.

우리가 함께 보낸 오랜 시간만큼 당신은 내게 애착을 갖겠지.

당신의 마음이 달라지는 일은 내가 인내한 시간만큼이나 어려울 거야.

그의 얼굴을 당겨 안았다. 인간에 비해서 차갑고 딱딱한 입술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두고 봐. 내가 이 힘을 제대로 다루는 걸.

그건 전부 당신을 위해서야.

* * *

꿈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잠이 깼다.

라실리아는 몹시 그립고 조금은 안타까운 기분 속에서 눈을 떴다.

아침 공기가 따듯했다.

유난히 따듯한 계절이어서가 아니라 제 옆에서 자고 있는 황제 때문이었다.


“아…….”

자신은 이불 속에, 황제는 이불 밖이었다.

그는 양손을 반듯이 가슴에 올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약간 의외였다.

평소의 그를 생각해 볼 때 적어도 한 이불 속에는 들어와 있을 줄 알았다. 눈을 뜨자마자 코앞에서 시선이 부딪쳤더라도 별로 놀랍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레스칼은 몸을 닿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애를 쓴 것처럼 자고 있었다.


‘아닌가. 내가 깨어나는 걸 보고 그런 척하는 건가.’

언젠가 잠에서 깼으면서도 자는 척을 한 적이 있기에 라실리아는 일단 숨소리를 확인했다. 손바닥을 코끝에 가져다 대도 고른 숨소리에는 변화가 없었다.


“흠…….”

이번에는 코끝을 손톱 끝으로 살살 간질였다.

처음에는 코끝만 움찔하던 그가 재채기를 하더니 눈을 떴다.


“아……?”

갑자기 깬 사람이 그런 것처럼 조금 멍한 눈이었다.


‘이런……. 자고 있었던 게 맞았구나.’

갑자기 미안해졌다.

그는 어쩌다 먼저 잠이 든 자신을 건드리는 일이 없도록 이불도 덮지 않은 게 맞았다.


‘진짜 의외라니까.’

종종 이상한 요구를 하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요청이었다. 자신이 들어줄 수 없을 때는 그 이상한 고집도 접어 두는 듯했다.


‘그만큼 조심하고 있는 거야. 기다리는 중이라서.’

그리고 자신은 아무래도 그런 모습에 마음이 약해지는 듯했다.

라실리아가 레스칼의 어깨를 살짝 눌렀다.


“제가 깨운 모양입니다. 더 주무십시오.”

라실리아가 이불자락을 들어 주었다.

눕지도, 그렇다고 일어나지도 않은 상태로 멎은 채 레스칼이 물었다.


“……그대는?”

“저는 다 잤습니다.”

“그럼 나도 일어나겠다.”

기울었던 몸이 일어섰다. 눈가가 평소와는 달리 약간 거뭇해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잠이 모자란 게 아닙니까?”

“……어쩌면. 하루는 괜찮아.”

“늦게 주무셨나요?”

“응.”

레스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더 주무세요. 한 시간 정도라면 일과에 지장을 주진 않을 겁니다.”

아닌 게 아니라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싫어. 나도 일어나겠다.”

레스칼이 피곤한 눈으로 고집을 피웠다. 이전이었으면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라고 가볍게 넘겼겠지만 지금은 신경이 쓰였다.

마족의 꿈을 꿔서 그럴지도 몰랐다. 꿈속의 마족을 레스칼과 겹쳐 보지 않는 것은 무리였다.


“더 자는 게 좋을 것 같아 보입니다.”

“안 돼. 더는 지체하고 싶지 않아.”

“뭘 말입니까?”

“키스.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기다리면 그대가 키스를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네?”

라실리아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 얘기였다.


“언제 그랬습니까?”

“어제. 책을 읽을 때. ……아니라고 하지 마. 내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

방금 전 황제가 어떻게 잠들어 있었는지 보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라실리아는 이제 그가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았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닐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씻고 난 다음 해 드리겠습니다.”

라실리아가 그렇게 나오자 오히려 레스칼이 놀랐다.


“……그렇게 쉽게? 한 번쯤은 부정할 줄 알았는데.”

“거짓말을 하시는 건 아니라고 믿겠습니다.”

“거짓말이 아니야. 정말로 약속을 했다.”

“그럼 믿겠습니다.”

라실리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일으켰다.

그 전에 레스칼이 다급히 라실리아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그런데 키스를 하기 전에 씻어야 할 이유가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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