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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크기의 차이 (67/96)


67. 크기의 차이
2023.04.23.



“왠지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

“…….”

그건 느낌일까 아니면 본능인 걸까.

라실리아는 자신의 손에서 피피의 냄새를 맡아 내던 레스칼을 떠올렸다. 반려에 한해서는 무서울 정도로 예민한 감각을 지녔을 것이다.


“오늘 돌아온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렇군.”

스륵, 닫힌 문을 어루만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고 싶어.”

“…….”

라실리아는 대답 대신 마른침을 삼켰다.

방금 전 그 말을 들었을 때 왠지 표식이 있는 부위가 뜨듯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보여 달라는 말은 아니다. 쉽게 볼 수 없다는 건 알아.”

“그건…… 맞습니다.”

“보면 만지고 싶어지겠지. 만지면 키스하고 싶어질 테고……. 그러니 안 돼.”

기분이 아니라 정말 표식 주변이 달아올랐다.

라실리아가 몹시 당황한 얼굴로 덩달아 뜨거워진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이렇게나 곤혹스러운 감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정말 보고 싶다. ……간절히.”

화제를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라실리아가 얼굴에 물을 끼얹으며 할 말을 골랐다.


“아……. 트리니다드의 주술사가 오늘 다녀갔습니다.”

“뭐라고?”

목소리가 날카로워진 걸 보니 전혀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왜? 어떻게? 왜 나를 부르지 않았나?”

“폐하께서 걱정하실 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손님으로 왔다기에 손님으로 맞이했습니다.”

“수상한 자야. 신뢰할 수 있나? 손님으로 왔다면 몰래 그대를 찾는 게 아니라 데칸이나 나를 통해야 했다.”

“그래서 직접 온 것 같습니다. 호르세드 경이 꼬리를 달아 놓았다는 것을 알아서요. 스스로 나타났으니 그만 꼬리를 거두어 달라 했습니다.”

“그렇게 해 주기로 했겠지. 그대는 몹시 너그러운 사람이니까. ……마음에 안 들어.”

그러는 레스칼의 목소리는 불쾌하다기보다는 투정에 가깝게 들렸다. 주술사가 한 짓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아니라 라실리아가 남의 부탁을 들어준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 같았다.


“그 대신 제게 해답의 주문을 걸어 주었습니다.”

“해답의 주문이라면…….”

“제가 알고자 하는 답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 했습니다.”

“그랬군.”

스륵.

욕실 문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대가 한 말을 기억하나? 답을 찾으면 나처럼 느낄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비슷한 말이었지만 어감이 달랐다. 라실리아가 피식 웃었다.


“답을 찾으면 그때부터는 폐하와 같은 감정을 갖게 될 수 있을 것이라 했을 텐데요. 조금 다릅니다.”

“뭐가 다른데? 내 귀에는 완전히 똑같아.”

“답을 찾으면 거기서부터 시작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왜?”

레스칼이 투덜거렸다.


“나는 처음부터 그대가 내 반려인 것을 알았는데. 왜 그대만 다르지?”

“글쎄요……. 이유가 있겠지요.”

“나는 매일 매일 기다리기만 하는 기분이야.”

안타깝게도 그 말은 사실일지 몰랐다.

그와 제 감정에는 커다란 시차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라실리아는 제 감정도 매 순간이 달라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부디 그 사실을 황제가 아직 모르길 바랄 뿐이었다.


‘그걸 알면 더 막무가내가 될 것 같아.’

애써 그어 놓은 선이 흔적도 없이 지워질 것이다. 이미 매 순간 조금씩 흐려져 가고 있었지만.


“나는 오늘도 잘생겼나?”

레스칼이 조금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그건 왜 물으십니까?”

“확인하려고. 리얀이 그건 감정의 다른 척도라고 알려 줬다. 그대 눈에 내가 괜찮게 보이면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 줄어들지도 모르는 거니까.”

“…….”

황제가 오늘도 잘생겼던가.

답이 조금 막막하게 느껴졌다.


‘얼굴을 봐야 알 것 같은데.’

그게 달라졌다는 말이었다. 이전 같았으면 뭘 저런 걸 묻나 싶어 대충 둘러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굳이 얼굴을 확인해 답을 해 주고 싶었다.

내 눈에 당신은 썩 근사해 보인다고. 그러니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당신의 기다림은 아주 짧을 것이라고.


“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럼 봐.”

“하지만 제가 목욕 중이라서요.”

“……그래서?”

“눈을 감고 계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 그렇게 하겠다. 지금 감았어.”

“그 상태로 가만히 계십시오.”

차르륵.

라실리아가 욕조에서 일어섰다. 몸을 감싼 수건은 비눗물에 젖은 상태였다. 손으로 밑단을 눌러 물기를 짠 라실리아가 욕실 문 앞으로 걸어갔다.


‘……믿을 수가 없네. 내가 이러고 있다는 걸.’

왜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도 들어주고 싶은 걸까. 심지어 왜 그게 조금쯤은 즐겁다는 생각마저 드는 걸까.


“이제 문을 열 건데…… 눈을 뜨시면 도로 닫겠습니다.”

“알겠다. 뜨지 않겠어. 절대.”

“그럼 열겠습니다.”

끼이익.

욕실 문이 왠지 수줍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황제는 문 앞에 앉아 있었다. 이쪽을 향해 고개를 약간 내민 채 눈을 꾹 감고 있었다.


‘이제 말을 아주 잘 듣네.’

라실리아가 뚜렷한 이목구비를 훑기 시작했다.

눈을 감자 황제의 얼굴은 그림 같았다. 숨을 쉬고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하자니 뭔가 말이 안 되는 기분이었다.


“보고 있나?”

“네. 좀 생각하고 싶습니다.”

눈썹 끝이 조금 아래로 처졌다.


“……고민을 해야 할 정도인가?”

고민이 아니라 감상을 해야 했다.


“글쎄요.”

라실리아는 일부러 애매한 답을 골랐다.

이유는 자신도 몰랐다. 그냥 이 시간이 즐겁다는 생각과, 조금 더 이렇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리얀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눈을 감은 황제는 몹시 근사했고, 그래서 이렇게 보고 있는 게 즐거웠다. 잘생겼다는 말은 감정의 척도가 맞았다.



“아직도 모르겠나?”

“음……. 그런가 봅니다. 매일 보는 얼굴이라 잘 모를지도요.”

“나는 아니야.”

레스칼이 정색을 했다.


“매일 봐도 매일 아름답다는 걸 알아. 매 순간, 그대를 볼 때마다.”

“…….”

반쯤은 장난이었는데, 더는 장난일 수가 없게 되었다.

레스칼이 너무 진지한 탓에.


“그리고 아름답다는 게 무슨 뜻인지도 안다. 그게 내게 어떤 감정을 의미하는지도.”

라실리아가 망설이다 물었다.

왠지 물으면 듣기 곤란한 답이 들려올 것 같았는데, 묻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떤…… 뜻입니까. 폐하에게는.”

“그대가 내게 하는 모든 게,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달갑다는 뜻이야. 기다림이든 고통이든.”

종종 레스칼은 대륙 공용어를 혼자만 전혀 다르게 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가 말하기 전까지 라실리아는 그런 말이 있는 줄도 몰랐다.


“제가 폐하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나요?”

“가끔. ……자주.”

“그게 달가우십니까?”

“뭐든. 그대가 주는 거라면. 말했듯이,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감은 눈꺼풀 안이 꿈틀거렸다.


“나는 지금 그대가 몹시 보고 싶다. 그대에게서 나는 새 비누향을 가까이서 맡고 싶어.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 욕망은 고통과 비슷하다. 하지만 그 고통이 나를 기쁘게도 해.”

“…….”

고통이 기쁨이 되는 과정은 명확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라실리아는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마음을 이해했다.

방금 전부터 괴롭게 꿈틀대는 눈가를 만지고 싶어졌으므로.


“그렇다면 확실히 제 감정과 폐하의 감정은 몹시 다르겠군요.”

“그렇겠지.”

라실리아가 엄지를 뻗어 레스칼의 눈가를 쓸었다.

레스칼이 어깨가 움칫 튀어올랐다.


“왜…….”

“그냥 그러고 싶어서요. ……이건 폐하의 감정과 얼마나 다릅니까?”

레스칼은 눈가를 찡그리며 괴롭게 웃었다.


“글쎄……. 다르지 않을지도 몰라. 다만 아주 작을 뿐이겠지. 나와 그대의 입장이 바뀌었다면 나는 눈만 만지고 있진 않을 테니까.”

“크고, 작은 것이로군요.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실리아가 조금 고개를 기울였다.

비누향이 풍겨 왔는지 레스칼이 코끝을 움직였다. 순간적으로 휙 달라지는 눈매가 또렷이 보였다.

그는 알고 있을까.

그에게서도 좋은 냄새가 난다는 것을. 가끔은 자신도 그처럼 가까이에 얼굴을 들이대고 냄새를 맡고 싶다는 것을.

그러니까 다르지 않았다. 크고 작을 뿐이었다.


‘언젠가는 같아지지 않을까.’

그럴 것이다. 지금도 제 감정은 매 순간마다 불쑥불쑥 자라고 있으니까.


“더 하고 싶은 건 없나? ……눈을 만지는 것 말고.”

레스칼이 한숨처럼 작게 물었다.


“글쎄요.”

“있을지도 몰라. 잘 생각해 봐.”

딱 레스칼다운 말에 라실리아가 소리 없이 웃었다.

눈을 꾹 감고 있어서 보일 리가 없을 텐데도 레스칼이 라실리아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웃음으로 벌어지는 입술을 보니 불쑥 키스를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충동은 조금도 당혹스럽지 않았다.


‘사실은 눈을 만질 때부터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레스칼은 지금까지 눈을 힘껏 감고 있었다. 그래서 키스하고 싶었다.


“하나 생각났습니다.”

“뭔데?”

“지금부터 할 거니까 움직이지 마세요.”

“……뜻대로.”

레스칼이 양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손목에 울큰 핏줄이 돋았다.

라실리아는 무릎을 세워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양손으로 머리를 잡았다. 매끄러운 금발이 손가락 새를 스쳤다. 깜짝 놀랄 정도로 좋은 감촉이었다.


“무얼…… 하고 싶은 건데.”

레스칼이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곧 아실 겁니다.”

“아니……. 제발 말을 해 줘. 혹시 키스를…… 하려는 건가? 기대했다가 아니라면 너무 괴로울 것 같아서 그래.”

“말했듯이 이제 곧 아실 겁니다.”

“하아…….”

뜨거워진 한숨 소리를 들으며 라실리아가 레스칼의 머리칼을 천천히 문질렀다.


“어쩌지. 키스가 맞는 것 같아.”

레스칼이 작게 중얼거렸고, 라실리아가 몸을 기울였다.

고개를 숙여 입술을 가져가는 순간이었다.


-그는 네게 종말을 선사할 것이다. 네가 만들어 낸 속박이 깨어지는 그 날.

마치 이 순간을 저주하는 것처럼, 소용돌이 속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그러자 몸이 굳었다. 더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종말을 선사할 것이다. 그가. 네게.

가슴에 환통이 일었다.

움직이지 말라는 말에 바닥을 뚫을 것처럼 손에 힘을 주고 버티는 그가 정말로 제 가슴에 칼을 꽂게 될까.

지금 그가 보내오는 모든 감정들은 전부 주술이 만들어 낸 환상인 걸까. 거짓인 걸까. 그래서 산산이 부서지게 될까.

그런 생각이 라실리아를 꽁꽁 묶었다. 레스칼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그래서 만들어지는 안타까운 정적을 레스칼이 깨트렸다.


“……안 돼.”

“……? 뭐가,”

“지금 멈춰서는 안 된다고.”

절대 움직이지 않겠다던 레스칼이 약속을 깼다. 그가 두 팔을 뻗어 라실리아를 휘어감았다. 닿기 직전에 멈춘 입술을 겹쳐 제 입속으로 삼켰다.


“……흣,”

무서울 정도로 생경하고 생생한, 알지 못했던 감각들이 시작되었다.

알몸을 감싼 젖은 수건이 레스칼이 입은 가운에 쓸려 젖은 소리를 냈다.

그 비슷한 소리가 맞닿은 입술에서 피어올랐다.


‘아…….’

그에게서 시작돼 제 피부까지 달아오르는 게 하는 뜨거운 열기가 생각들을 녹이기 시작했다.


‘종말을……. ……아아.’

마침내 종말을 언급한 그 생각도 녹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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