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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예언자의 탄생 (66/96)


66. 예언자의 탄생
2023.04.19.


푸학!

촤르륵!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물을 담은 그릇을 들여다보고 있던 하스데야는 졸지에 물벼락을 맞았다.


“젠장할.”

그는 다시 인간이 되어 성자 말리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매끈한 외모만큼 매끈한 손가락이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하스데야가 잇몸을 드러내며 투덜거렸다.


“만만치 않은데, 이거.”

하스데야가 홱 몸을 젖혔다. 그러자 어디선가 의자가 나타나 엉덩이를 받쳤다.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훅 파묻은 하스데야가 기력 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은 기묘했다. 천장이 아니라 시커먼 구덩이가 그 자리에 있었다. 구덩이와 벽의 경계를 타고 알 수 없는 글자와 문양이 살아 있는 벌레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그걸 생각 없이 쳐다보는 하스데야의 미간에 벌레 같은 잔주름이 생겨났다. 청년처럼 젊은 외모이긴 했지만 사실 하스데야는 표정에 따라 나이를 종잡을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영 믿기지가 않을 정도야.”

딱!

하스데야가 허공에 대고 중지와 검지를 부딪쳐 소리를 냈다.


“부르셨습니까.”

잠시 후 누군가가 들어섰다.

신관복을 입고 있는 자였다. 그러나 하리오스 신전의 신관복과는 양식이 조금 달랐다.

하리오스 신전을 통해 계획했던 일이 실패하고, 역으로 제 둥지가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하스데야는 하리오스 신전을 미련 없이 버렸다.

그리고 다른 신전에 다시 둥지를 틀었다.

신관들을 조종하는 일은 쉬웠다. 다른 인간들보다 맹목적인 구석이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약간의 암시만 주어도 그를 저들의 신이라 여겼다.

데칸이 짐작한 대로 하스데야에게는 공간의 제약이 있었다.

결계로 마계의 힘을 불러 가둔 이 공간이 아니고서는 인간의 모습을 유지할 수도, 마력을 마음대로 쓸 수도 없었다.

결계를 벗어나면 마족의 모습이 남김없이 드러났다. 다시 말리크의 모습이 되려면 안전한 둥지를 발견해 처음부터 다시 결계를 쳐야 하는 번잡함이 있었다.

하여간 그런 이유 때문에 하스데야는 앞으로 애써 고른 둥지를 망가트리는 데 신중하자는 입장이 되었다.

말리크의 기사들도 신관복을 입게 했다. 바하무트가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이 말리크 기사단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자신뿐 아니라 말리크 기사단의 흔적도 지워야 했다.


“그때 알아보라고 했던 거, 사실이 맞아?”

“제 눈과 귀가 보고 들은 것을 남김없이 고했나이다, 성자시여.”

“흐음……. 분명히 신전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왔다고 하지 않았어? 부모가 시킨 대로 골방에 가둬서 해도 못 보게 하고 살았다고.”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뭐 저렇게 팔팔해?”

팟!

하스데야가 인상을 쓰자 사방으로 흩어졌던 물방울이 도로 튀어 올랐다. 물방울에 맞은 말리크의 기사가 통증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벌써 힘을 다루는 법을 알고 있잖아. 네가 말한 게 사실이라면 그게 말이 돼?”

“외람되오나 성자시여……. 그 여자가 머물렀던 델라르타의 신전은 사람이 전부 바뀌었습니다. 반역으로 왕관을 차지한 델라르타의 새 왕이 신전을 제 수중에 넣고자 한 짓이라 합니다. 신전의 이전 모습을 기억하는 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습니다. 입을 열 만한 자가 그리 많지 않았나이다.”

“아, 미치겠군. 나처럼 사악한 인간이 지상에 있다고?”

하스데야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신전의 신관을 전부 다 죽여 버리는 인간이 있을 줄은 몰랐다. 목적은 다르다지만 신전이 사라진 것은 똑같았다.

저야 마족이라 그렇다지만 인간 주제에 신을 단 한 조각도 믿지 않을 수가 있는지 그게 참 신기했다.


“조만간 낯짝이나 봐 둬야겠군. ……하여간 뭐 다른 건 없었어? 뭐든 좋으니까 그 머릿속을 쥐어짜 내 봐.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있다니까.”

“성자시여. 이미 제가 아는 것은 다 말씀을 올렸나이다.”

“망할, 같은 말 또 하게 하지 말고! 그걸로는 부족하니까 뭐 더 생각해 내라는 거잖아! 거기까지 갔으니 뭐라도 보긴 봤을 거 아냐!”

“……흣, 그게…….”

말리크의 기사가 창백해진 얼굴로 눈을 굴려 댔다.

결계 안에서 성자 말리크는 무한의 힘을 주는 존재였다. 성자 말리크를 통해 그들은 잊혀졌던 고대 마법의 문을 열었다.

그의 힘을 빌리면 이곳에서 델라르타 왕국이라는 저 대륙 끄트머리까지 단숨에 이동할 수 있었다. 마을 하나를 불로 태울 수도, 그 마을 사람들 전부를 물에 잠겨 죽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 거대한 힘은 필연적으로 공포와 복종을 머릿속에 심었다.

말리크의 기사는 죽음으로 그에게 충성하지만, 그가 언제라도 제 목을 비틀어 죽일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대답을 잘 골라야 했다.


“그, 그 여자는…….”

성자 말리크가 집착하는 그 여자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인간은 별로 없었다. 예언자의 꿈지기 중 하나였을 것이라 추측이 갈 뿐이었다.

예언자의 곁에는 두세 명의 꿈지기가 있었는데, 다들 비슷한 옷을 입고 얼굴에 면사를 뒤집어쓰고 다녔다. 그중 하나가 카르타헤나 황후처럼 긴 검은 머리를 했다는 코딱지만 한 단서를 찾았다.

대신전 안에는 예언자의 방이라는 곳이 있었다. 창문도 하나 없는 감옥 같은 곳이었다. 신전에서는 예언자를 누가 훔쳐가기라도 할까 봐 필사적으로 감춰 둔 느낌이었다.

하지만 반역이 일어난 뒤로 대신전은 어떠한 예언도 내놓지 않고 있었다. 새 왕이 예언자를 죽여 입을 막은 게 아닐까 싶었다. 검은 머리를 한 꿈지기 역시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꿈지기 노릇을 했다는데…… 새 왕에 의해 신전이 청소되며 함께 사라진 것 같습니다.”

말리크의 기사는 필사적으로 말을 쥐어짜 냈다.

그러나 이 말은 진작 했다.


“내 귀가 하나 같아? 그래서 같은 말을 두 번씩 해야 인간하고 똑같이 알아먹을 것 같나?”

“아, 아니, 그게……. 그게…… 어, 어쩌면 그 여자가 예언자일 수도 있습니다! 누, 누가 예언자인지는 정확히 모르는 일이라고 했으니……!”

“예언…… 뭐?”

하데야스의 눈이 잘 갈린 칼날처럼 변했다.


“예언자? 꿈지기 뭐라고 하지 않았어?”

“예, 예. 그랬습니다. 예언자는 예지력이 있어야 하니 아무나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당연히 꿈지기일 것이라 여겼는데, 생각해 보니 엘리아든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델라르타의 예언자가 되지 못할 이유는……,”

“뭐라고?”

파악!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으악!”

물방울이 튀었는데 말리크의 기사가 얼굴을 감싸 쥔 채 바닥을 뒹굴었다.

하스데야가 의자에서 일어서서 기사를 향해 걸어갔다.

하스데야의 발이 기사를 밟았다.


“으아아악!”

“야, 시끄러워. 입 다물어. 예언자라고?”

“……읍!”

기사는 제 손으로 입을 막고 죽을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망할. 그럼 얘기가 완전히 다르잖아!”

“으읍! 읏!”

제대로 터지지도 못하는 비명이 더 고통스럽게 들려왔다.

하데야스는 내키는 대로 기사에게 발길질을 해 댔다. 화풀이라기보단 장난처럼 가벼운 동작이었다. 그래서 더 공포스러웠다.


“예언자가, 씨, 뭐 아무나 하는 줄 알아? 꿈지기라는 걸 보니 그 동네는 예언을 꿈으로 꾸나 보지. 그 여자가 주술사였다는 건 네 그 조막만 한 머리통으로 알고 있지 않아? 어떤 미친 신이 주술 같은 걸 쓰는 인간에게 신성력을 나눠 주는데. 그런데도 그 여자가 예언자 노릇을 하고 있었단 말이지. 그게 무슨 뜻이겠어, 응?”

퍽, 퍽!


“저, 저는 그 여자가 누군지도 모르…… 그저 시키시는 대로…… 끄읍!”

그러나 하스데야는 말리크의 기사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에게 화풀이를 하며 혼잣말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 여자가, 그 빌어먹을 인간 암컷이, 스스로를 예언자로 만들었다는 말이야. 왜? 그 여자는 꿈을 꿀 수 있잖아. 꿈으로 과거를 볼 수 있는 그 힘을, 몇 살인지도 모르는 나이에 바꿔서 예언자 노릇을 하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젠장, 이제껏 살아남았겠지. 신전에서 감히 예언자를 홀대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하, 더럽게도 영악하네, 진짜.”

퍼억!


“제, 제발 자비를…… 끅!”

“이제 좀 알겠어? 그 여자가, 이젠 주술 쓰는 법도 다 까먹었을 인간 하나가 왜 내 힘을 받아치고 있는지? 망할, 타고났다는 소리잖아!”

퍽!


“……큿, …….”

말리크의 기사가 초점을 잃은 눈에 흰자위를 드러냈다.

죽은 것이다. 하스데야는 그 눈을 힐긋 봤으면서도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네가 말을 안 해 줘서 그런 거잖아. 처음부터 예언자라고 했으면 내가 이런 짓을 했겠어?”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하스데야가 고개를 숙여 기사의 귀에 대고 고함을 꽥 질렀다.


“했겠냐고! ……아. 뒈졌지, 참.”

혀를 끌끌 찬 하스데야가 허공에서 손가락을 부딪쳤다.

화르륵!

갑자기 일어난 화염이 시체를 집어삼켰다.

하스데야는 화염이 시체를 재로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며 천천히 중얼거렸다.


“더 놔두면 안 되겠어……. 힘이 더 커지면 곤란해.”

시체 하나를 꿀꺽 삼킨 화염은 그래도 허기가 진다는 듯 한동안 거세게 타올랐다.


 

* * *

똑똑.

욕실 문이 울렸다.

라실리아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소용돌이는 진작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니 별 일 아니었다. 이베트가 수건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


“들어와.”

“……그래도 되나?”

그런데 이베트가 아니라 황제였다.


“폐하?”

라실리아가 닫혀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어이가 없다기보다는 왜 하필 이런 순간 그가 나타났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공녀가 수건을 가져가야 한다기에 내가 가로챘다. 화내지 않았으면 하는데.”

“……. 그래서 지금 제 목욕 시중을 드시겠다는 겁니까?”

“꼭 그런 건 아니고.”

“그럼요?”

“시간이 아까워서.”

“…….”

그러니까 저 말은 이제 일과를 마치고 황후궁으로 왔는데 마침 라실리아가 목욕 중이라 했고, 자신은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게 아까워 수건을 빼앗아 들고 욕실까지 왔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들어오지 말라고 하면 여기 있겠다. 하지만 가라는 말은 하지 마.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지 않을까. 문을 사이에 두고.”

“……그게 좋을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대와 해 보지 않은 일이니까.”

“……?”

“그러니 내게는 좋은 일이다.”

“…….”

늘 그렇듯이 황제는 할 말을 미리 앗아 가는 재주가 있었다.


“대화만이라면 좋습니다.”

들어오지 않겠다는데 더는 말리기도 애매했다.

게다가 반려라는 것을 자각한 뒤로 라실리아는 아주 빠르게 황제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무뎌지는 중이었다.

그가 평소에도 아주 이상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기벽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비상식적이 될 때는 자신에 한해서였다.

아마도 반려를 향한 마족의 본능이, 인간의 입장에서는 비상식적일 테니까.


“그럼.”

어쩐지 즐거운 듯한 답이 들려왔다. 이어서 황제가 부스럭대며 문 앞에 앉는 소리가 이어졌다.

욕조에 앉은 라실리아는 저도 모르게 문 쪽을 향해 고개를 가까이 가져가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다.”

레스칼이 카우치 옆에 나란히 앉았을 때처럼 말을 걸어 왔다.


“어떤 게 궁금하십니까?”

“혹시 표식이 돌아오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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