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예정된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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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예정된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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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예정된 종말
2023.04.16.
“아아, 벌써 가 버렸네요. 저도 좀 더 보고 싶었는데.”
과자와 빵 등을 한 바구니 챙겨 온 이베트가 뒤늦게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주술사는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진짜 주술사라니. 아니, 물론 제국에도 뛰어난 주술사가 한 분 계시지만요. 그래도 트리니다드의 주술사라니, 뭔가 엄청 신기하잖아요. 저 같은 사람은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할 텐데요.”
이베트가 속상하다는 듯 중얼대자 라실리아가 손등을 토닥였다.
“그럴 줄 알았으면 조금 기다리라 할 걸 그랬지.”
“어마, 제가 무슨 투정을. 아닙니다, 아니에요. 황송한 말씀입니다, 황후 폐하. 황후 폐하께서 저를 너무 자상하게 대해 주시니까 제가 자꾸 주책을 부리게 되는 것 같아요.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화들짝 놀라는 이베트가 이제는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아. 공녀는 내가 황족으로 태어나지 않았음을 알고 있잖아.”
“아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폐하의 유일한 반려신데 당연히 황후 폐하시죠!”
정색을 하던 이베트는 그래도 기분이 좋았던지 수줍게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정말…… 어, 음…… 그러니까 편하게…… 아니아니, 편하게라니. 당치 않지요. 그래도 좀 치, 친밀하게…… 아니, 이 말도 너무 무례한 것 같아요. 아, 그럼 대체 뭐라고 해야 하지?”
“친밀하다는 말이 좋게 들리는데. 친밀하게 대하도록. 나도 그게 좋아.”
“끄응……. 정말…… 제가 살면서 그런 말을 다 듣다니. 믿기지가 않아요.”
이베트가 제 손을 도닥이던 라실리아의 손을 꼭 잡고 뺨을 비볐다.
“정말 제가 이런 짓을 해도 되는 건가요……. 사실 그간 렌 님이 좀 부러웠어요.”
“너무 자주가 아니라면.”
“네네, 황후 폐하. 제가 잘 참아 볼게요. 그런데 정말, 손을 이렇게 잡고 있으면 너무 좋아요. 따듯하고 부드러워서……. 아, 이런 말은 제가 하면 좀 그렇지요?”
이베트가 수줍게 웃으며 손을 놓았다.
“삐이이.”
그때 피피가 침실에서 졸린 눈으로 날아왔다.
피피가 자는 곳은 다양했는데, 그중의 한 곳이 라실리아의 침실 화장대 가운데 서랍이었다. 서랍 하나를 비운 라실리아가 그곳을 보드라운 천으로 채워 피피의 침대를 만들어 놓았다.
“졸리니까 그만 자자고 하네.”
라실리아가 피피를 받아 들고 이베트에게 말했다.
“아, 오늘은 하루 종일 졸려 하시네요. 눈에 안 보이면 주무시고 계시더라고요.”
“삐이.”
“오늘은 힘을 많이 써서 힘들대.”
“아하. 그러셨구나.”
라실리아가 반쯤 눈이 감긴 피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먼저 침대에서 자고 있을래? 나는 씻고 옷을 갈아입어야 해.”
“삐이이.”
빨리 오라는 말을 남기고 피피가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분명 저 작은 몸으로 침대 가운데 누워 자고 있을 것이다.
“그럼 씻을 물과 잠옷을 준비하겠습니다, 황후 폐하.”
이베트가 냉큼 일어섰다.
“그래. 고마워.”
“아이, 별 말씀을요.”
* * *
표식을 감추어도 되지 않으니 욕실 시중이 한결 쉬워졌다.
오늘은 마차를 타고 먼 길을 다녀온 터라 라실리아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이베트가 새로운 비누가 들어왔다며 신이 나서 비누칠을 해 주었다.
따듯한 물에서 풍겨 오는 깨끗한 비누 냄새는 제 코에도 향긋했다.
라실리아가 욕조에 누워 느긋하게 고개를 젖혔다.
‘사치스러워.’
예언자였을 때는 꿈도 꾸지 못했던 사치였다.
욕조는 당연히 없었고, 신전 안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와 씻었다.
신전에서는 혼자 몸을 씻는 것도 사치였다. 꿈지기들과 함께 다 같이 찬물로 씻었다. 여름철에는 그나마 괜찮았지만 겨울에는 씻을 때마다 눈물이 맺힐 정도였다. 찬물이 피부를 아프게 한 탓이었다.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신전은 꽤 부자였는데. 왜 욕조가 없는 걸 당연하게 여겼던 거지?’
델라르타에서 왕실 다음으로 재산이 많은 곳을 꼽으라면 신전일 것이다. 치유력을 가진 신관들 덕에 신전에는 굴러들어오는 돈이 끊기지 않았다.
제 눈에도 장사처럼 보일 정도였다. 어릴 때부터 그게 늘 이해가 가지 않았던 라실리아는 대신관과 무던히도 다퉜다.
하지만 골방에 갇혀 꿈을 꾸는 게 일과의 대부분이었던 예언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신전의 치유력 장사에 대한 예언이 내려오길 기도했으나 그런 일은 내내 일어나지 않았다.
‘좀 화가 나네.’
예언자라지만 그래서 라실리아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가질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신전은 라실리아를 방에 가둬 두고 꿈을 꾸게 했을 뿐이었다. 정작 예언을 이용해 돈벌이를 한 것은 대신관이었다.
‘그때는 왜 그걸 갇혀 산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거지.’
답은 간단했다.
몰랐으니까.
라실리아가 기억하는 한, 자신은 예언자였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예언자가 됐지?’
라실리아가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제 기억의 시작은 예언자의 방이라 불리던 그 창문 없는 골방이었다.
자신은 아주 어렸고, 혼자 남겨질 때면 어두운 방이 늘 무서웠다. 그래서 잠시 자신을 놔두고 어딘가로 간 누군가가 간절히 그리웠다. 그래서 그 사람이 돌아올 때면…….
“……유모.”
촤르륵!
라실리아가 흠칫 몸을 떠는 바람에 욕조의 물이 넘쳤다.
물에 푹 잠겼었던 라실리아가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유모가 있었어.”
자신은 그 사람을 유모라고 불렀다. 꿈지기가 아니라 유모였다.
“유모가…… 신전에 있었다고? 그럼,”
신관이 아닌 자가 어떻게 신전에서 살 수 있었던 걸까.
“아니,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어린애였다. 말이나 겨우 떼고 있을 때였다.
제 이름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어린애를 붙들고 유모는 글자를 가르쳤다.
-어려워도 익히셔야 해요. 제가 떠나면 글자를 가르쳐 줄 사람이 없을지도 몰라요.
유모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글자만이 아닙니다. 제대로 먹는 법이나 걷는 법도 가르쳐 주지 않을 거예요. 전부 스스로 익히시는 수밖에 없어요. 그걸 위해 글자를 아셔야 하고요.
기억을 더듬을수록 라실리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말이 안 되는 일투성이였다.
어린애가 왜 신전에서 살았을까. 유모가 있을 때 자신은 예언자가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린애가 예언을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유모 역시 꿈지기가 아니었다. 꿈지기였다면 유모라고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느 날인가 유모가 사라졌어. ……그래. 그리고 그 다음부터 꿈을 꾸기 시작했던 것 같아.”
꿈을 꿨고, 그 얘기를 누군가에게 했다. 대신관이 황당한 얼굴로 자신을 이리저리 다그치던 기억이 났다.
그때부터 라실리아는 예언자가 되었다.
처음부터 예언자라서 신전에서 지냈던 게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럼 예언자의 방도 말이 안 되지 않아?”
창문이 없고, 거울이 없었다.
방 안은 늘 어두웠다. 욕실이나 욕조도 없었다.
대신관은 그런 방을 두고 예언자는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일축했다.
“그게 아니라는 말이잖아. 예언자가 되기 전부터 예언자의 방에 있었으니까.”
자신은 갇혀 있었다.
갇혀 있는 줄도 모르는 채.
어느 날 유모가 사라진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유모가 한 말은 어떤 면에서는 옳았고, 어떤 면에서는 틀렸다.
라실리아가 예언자가 된 뒤로 신관들은 이것저것 가르치기 시작했다.
대륙의 전반적인 역사와 지리, 각국의 정세, 델라르타 왕실의 계보와 귀족 가문들에 관한 지식이었다. 예언을 하려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일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유모의 말대로 식기를 다루는 법이라든지 몸을 씻는 법, 긴 머리를 손질하는 법, 몸이 아플 때 나아지는 법 같은 기본적인 것들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라실리아의 생활은 꿈지기들에게 맡겨졌다. 꿈지기들이 가져다주는 식사를 하고, 가져다주는 옷을 입었다.
식사는 보잘것없었고 옷은 초라했다. 그리고 어두운 방에서는 늘 잠이 왔다. 방 한 구석에 꿈지기들이 향을 피워 두었다. 방 안에는 늘 연기가 머물러 있었다.
이상하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지금에 와서야 알게 된 일이었다.
“어떻게 된 걸까……. 나는 어디서 온 걸까.”
기억으로는 알 수 없는 해답을 쫓아 라실리아가 눈매를 찡그리는 순간이었다.
스르르륵.
비누 거품이 보글대는 욕조 물 속에서 자그마한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
라실리아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물을 전부 삼켜 버릴 것처럼 회전하던 소용돌이는, 그러나 그 상태로 머물렀다. 욕조의 물은 한 방울도 넘치지 않았다. 마치 그 공간만 뚝 잘라 다른 차원으로 만들어 버린 듯했다.
불길할 정도로 짙은 보랏빛이 된 소용돌이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싶나?
“…….”
목이 막혔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지를 수가 없었다.
라실리아는 빨려 들어갈 것처럼 소용돌이를 바라보았다.
-내가 알려 주지. 네가 어디서 왔는지.
네가 누군데.
그것부터 말해. 네가 누군데 그런 말을 하는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너는 인간의 가장 비열하고 추악한 이기심에서 흘러나왔어.
뭐……라고?
-인간의 몸으로 가져서는 안 될 것을 탐냈지. 그리고 그 알량한 주술의 힘으로 그것을 감춰 두고 있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뭘 탐냈다는 건데.
-그 탐욕에 곧 대가가 따를 것이다.
대가라니. 무슨 대가?
-너는 그를 가질 수 없어. 네가 부렸던 힘은 깨어지고 네가 걸었던 속박에서 해방된 그가 네게 종말을 선사할 것이다.
그가 누군데. 속박이란 게 대체 뭔데.
내가 무슨 탐욕을 부렸다는 거야.
-그때 네 몸을 내가 거두지. 두 번 다시 지상을 밟을 수 없는 영원한 어둠 속에 파묻어 줄게. 그가 아니라 신이라도 너를 되살릴 수 없도록.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네가 뭔데. 네가 뭐기에 그런 짓을 할 수 있는데.
“……수 있는데!”
라실리아는 머릿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말에 저항했다. 그 말을 몰아내려고 안간힘을 쓰자 나중에는 목소리가 나왔다.
퍼억! 첨벙!
라실리아가 소리치는 순간, 소용돌이가 사라졌다.
“하아, 하…….”
라실리아가 가슴께를 움켜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손이 떨렸다. 다친 곳은 없었지만 기분이 몹시 끔찍했다. 소용돌이가 말했던 영원한 어둠 속에 한 발을 담갔다 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종말이라는 게…… 대체 뭐야.”
라실리아가 목이 찢어질 것 같은 아픔을 무시하고 중얼거렸다.
그때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이런 게 사랑이라면. 내게는 필요 없어.
죽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던 차가운 금안이었다.
그건 신께서 보여 주신 자신의 종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