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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트리니다드의 주술사 (2) (64/96)


64. 트리니다드의 주술사 (2)
2023.04.12.



 


“치, 침입자입니다, 황후 폐하!”

이베트가 느닷없는 침입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다가 라실리아가 옷을 갈아입는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비명을 지르며 제 몸으로 라실리아를 가렸다.


“그것도 하필 옷을 갈아입는 중에……!”

침입자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경계하실 필요 없습니다. 악의를 가지고 온 게 아니니.”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를 외양과 목소리였다.


“제국의 황후께서 저를 찾으신다 하기에 억지로 붙들려 오기 전에 제 발로 나타났을 뿐입니다. 이런 일은 피차 서로 빠른 게 좋지 않습니까?”

“어어, 그런…… 그런가요, 황후 폐하?”

이베트가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눈으로 라실리아를 돌아보았다.

그 전에 침입자가 선수를 쳤다.


“그리고 제가 악의를 가지고 왔다면 황후 폐하께서는 진작 아셨을 게 아닙니까. 최초의 반려가 지닌 능력을 지니셨을 테니. 제 악의가 읽혔겠지요.”

“아……? 그게 정말이에요, 황후 폐하?”

라실리아가 침입자를 응시했다.

그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제 입으로 자신이 불러서 왔다고 했다. 그런 말을 할 만한 자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대는 트리니다드에서 온 주술사겠군.”

“그렇습니다.”

“그대의 행방을 폐하께서 약속하신 게 오늘이었다. 그대는 황궁에 귀를 대고 있나?”

“아, 제국에서 부리는 주술사가 하나 있지요. 저만큼은 아니지만 그쪽도 꽤 재주가 많은 자라서요.”

“호르세드 경의 주술에 반응했다는 말인가.”

“뭐, 그런 말이지요.”

“폐하를 통하지 않고 직접 나를 찾아온 이유가 있겠군.”

트리니다드의 주술사가 히죽 웃었다.


“저처럼 오래도록 주술에 몸을 담은 자는 필연적으로 다른 힘에 예민해집니다. 제국의 황제께서는 마력이 흘러넘치시는 터라…… 제 쪽에서는 황후 폐하를 대하는 게 훨씬 낫습니다.”

“그렇다면.”

라실리아가 의심을 거둬들였다.

주술사가 하는 말은 진실로 보였다.

무엇보다 악의가 읽히지 않는다는 말을 믿을 수 있었다.

그의 말을 들으니 어떤 경우에 상대의 마음이 보이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입으로 내뱉는 말과 다른 생각을 품고 있을 때. 그때 보이는 것 같아.’

이베트의 마음이 보였을 때도 이베트가 자신에게는 하지 않는 말을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떨까? 손님으로 왔으니 손님으로 맞이하겠다.”

라실리아의 말에 주술사가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제국의 반려께서는 말이 잘 통하시는 분이로군요. 환대에 감사합니다. 기꺼이 따르겠나이다.”

 

이베트가 주술사를 먼저 응접실에 데려다 놓았다.

그런 뒤 옷을 갈아입은 라실리아가 주술사와 마주 앉아 찻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 * *



“차가 입에 맞지 않나?”

“아니요, 감히. 그저 제가 마시는 것은 술 외에는 입에 대지 않는 몸이라서요. 대신 과자는 잘 먹겠습니다.”

그 말대로 트리니다드의 주술사는 부지런히 과자들을 입에 쓸어 넣었다.

이베트는 배가 고팠나 보다며 과자를 더 가져오겠다고 나섰다.


“선량한 혼을 지녔습니다. 저런 사람을 발견하신 것도 반려께서 지니신 힘일 겁니다.”

주술사가 이런 말을 했다.


“그대는 이전에 황후를 본 적이 있지 않나?”

라실리아가 차를 한 모금 삼킨 뒤 물었다.


“아, 그렇지요. 제가 그 몸에 대고 주문을 외웠으니.”

“그런데 나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군. 분명 말투가 다를 텐데도.”

주술사가 씩 웃었다.

같은 주술사라고 해도 데칸과는 정 반대였다.

데칸은 고요하고 신비한 물 같은 느낌인데, 트리니다드의 주술사는 어디로 불어갈지 알 수 없는 바람이었다.


“첫눈에 알아봤거든요.”

“무엇을?”

“이전 황후가 가짜라는 걸. 지금 제 눈앞에 계신 분은 진짜라는 것을 압니다.”

“…….”

주술사가 산딸기잼이 들어간 과자를 우적 씹어 삼키더니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툭툭 털었다.


“주술사라면 다들 알 겁니다. 대륙이 만들어진 이래 가장 정교하고 위대한 주술은 최초의 반려를 만든 주술이라는 걸. 아마 그건 주술에 마력이 더해져서 그럴 겁니다. 하여간 그걸 뛰어넘는 주술을 만들어 낼 인간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니 표식이 사라졌다고 하면 진짜 반려일 수가 없지요.”

“황후가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표식이 되돌아오는 주문을 완성했다는 말인가?”

“음…… 이렇게 말씀드려야겠군요. 반려의 주술에 손을 댈 수 있는 주술사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황후 폐하.”

“그럼 그대는 피엘리온 공작가를 상대로 사기를 쳤다는 말이겠군.”

“네? 에이, 그건 너무하신 말씀입니다. 명색이 이걸로 돈을 버는 인생인데, 사기라니요. 트리니다드가 쥐뿔도 없는 무법지대처럼 보이는 건 알지만 나름 엄격한 규칙이 있습니다, 황후 폐하. 주술을 모르는 것들은 절대 발을 붙일 수 없습니다.”

“제 입으로 손을 댈 수 없는 주술에 어떻게 손을 댔다는 말인지 모르겠군.”

“손은 대지 못합니다. 대신 의뢰받은 선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떻게?”

“의뢰인의 주문은 이것이었지요. 표식을 원래대로 되돌릴 것. 그래서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주문을 완성했습니다. 표식이 진짜가 되도록 할 것. 그건 의뢰인도 동의한 바입니다.”

“…….”

표식이 진짜가 되도록 할 것.

그건 표식을 되돌린다는 말과 언뜻 비슷해 보였지만 달랐다.

카르타헤나가 가짜라서 표식이 사라지고 있었다면 반려의 주술에 손을 댈 수 없는 주술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표식을 다시 진짜로 만드는 일이라면.

표식이 있는 몸으로 진짜를 데려올 수도 있었다.


“내가…… 그렇게 여기 오게 된 건가.”

라실리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그작!

다시 과자를 씹으며 주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제가 쓴 주문은 완성이 됐으니까요. 아시겠지만 주문이 실패하면 어떻게든 표시가 나거든요. 제게 반동이 오든, 아니면 피술자에 가든 할 테니.”

“한 가지 질문이 있다.”

라실리아가 찻잔을 달칵 내려놓고 주술사를 바라보았다.

주술사가 황급히 입가에 묻은 잼을 빨아먹고는 자세를 반듯이 했다.


“말씀하십시오.”

“내가 어째서 반려의 운명을 지닌 채 태어났는지, 그걸 알 수 있나?”

“그게 궁금하십니까? 반려라는 것을 아셨으니 상관없는 일 아닙니까?”

“알고 싶다. 반려는 주술에 얽힌 다섯 가문에서 탄생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는 제국과는 조금의 연관도 없었어. 그래서 일말의 의구심이 남아 있다. 왜 하필 나인 걸까.”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저야 주술사처럼 생각하지만 황후 폐하께서는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답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황후 폐하. 저야말로 제국과는 일말의 연관도 없는 몸인지라.”

“아…….”

라실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자 주술사가 급히 덧붙였다.


“하지만 주문을 걸어 드릴 수는 있습니다. 해답의 주술을 압니다.”

“해답의 주술?”

“네. 원하는 답으로 인도해 줄 겁니다. 대신,”

주술사가 히죽 웃었다.

신기하게도 그 가벼운 웃음은 별로 경박해 보이지 않았다. 그가 품고 있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엿보여 주는 장치 같았다.


“값을 치러 주셨으면 합니다. 적당한 값을, 조금 후하게 주셔도 좋고.”

“무얼 원하나?”

“일단 제국의 황제께 이 몸을 찾는 일을 그만두십사 청해 주십시오. 꼬리가 붙어 있으면 의뢰를 받기가 곤란해서요.”

“그대를 찾는 이유가 해소되었으니 가능하다. 그리고?”

“아, 돈입니다.”

주술사가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주술사가 의뢰를 받는 이유야 돈이 전부지요. 저는 이 한 몸 부서져라 돌아다녀도 늘 적자 인생이라……. 많이 주실수록 좋습니다.”

아작아작.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술사는 남은 과자를 입에 쓸어 넣었다.

라실리아가 쳐다보자 그는 씩 웃으며 이런 고급 과자는 먹어 볼 일이 별로 없으니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둬야 한다는 말을 보탰다.


‘돈이 없다는 건 정말인 모양이야.’

라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색이 황후지만 가진 건 많지 않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그 머리핀은 안 됩니까?”

주술사가 라실리아의 머리 장식을 가리켰다.

얼마 전 황제가 보내온 것이었다. 황제가 보내온 보석 장신구는 모양을 다 기억하지 못할 만큼 여러 개였고, 그중 하나 정도는 재량껏 써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걸로 값이 된다면.”

라실리아가 머리핀을 뽑아 주술사에게 건넸다.

주술사가 눈을 번쩍 빛내며 두 손으로 공손하게 머리핀을 받아갔다.


“되고말고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후 폐하.”

마지막 과자까지 입에 넣은 그가 몸을 일으켰다.

라실리아의 발치에 무릎을 굽히고 앉은 그가 손을 요구했다.


“이러면 효과가 더 좋아서요.”

라실리아가 그의 손바닥에 손을 얹자 주문이 시작되었다.

언젠가 자신이 의식을 빼앗긴 자들을 되돌렸을 때처럼 알 수 없는 힘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이제 됐습니다.”

주문을 마친 주술사가 라실리아의 손을 놓기 전 손등에 입을 맞췄다.
 

  


“이것도 주문의 일부인가?”

라실리아가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건 반려께 바치는 제 경의입니다. 지금은 아니시겠지만 최초의 반려는 가장 위대한 주술사셨으니까요.”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보석핀을 만지작대던 그가 핀을 옷소매 안으로 챙겨 넣다가 이렇게 말했다.


“아, 값을 후하게 주셨으니 덤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좋은 거라면 좋겠군.”

“네. 해답의 주술을 거는 와중에 떠오른 것이니 분명 반려께서 찾으시던 것 중 하나일 것입니다. 어디 보자…… 이 근처 같은데…… 아, 이거 같군요.”

주술사가 손끝까지 문양으로 뒤덮인 손가락을 들어 탁자 위를 가리켰다.


“저 책입니다. 저 책에도 찾으시던 답이 있을 겁니다.”

이베트가 찾아온, 반려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었다.


“알려 주어 고맙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왜 이렇게 자꾸만 입이 열리는지, 참……. 반려께서는 해답의 주술이 작용하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까?”

“아니, 모른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주술사가 웃음기를 싹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표정이 바뀌어서 그런지 그가 하는 말은 놓칠 수 없는 조언으로 들렸다.


“그 무엇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귀보다는 마음을 의지하십시오. 해답은 언제, 어떤 얼굴을 하고 찾아올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반려께서 그것을 해답이라 여기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움직이면 그것이 해답입니다. 해답은 그 어떤 형태로도 올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말을 마친 주술사가 정중히 인사를 했다.

볼일을 마친 주술사는 발밑의 그림자 속으로 빨려들듯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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