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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트리니다드의 주술사 (1) (63/96)


63. 트리니다드의 주술사 (1)
2023.04.09.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레스칼의 표정만 봐도 그가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알 수 있었다.

눈매가 부드러워졌고,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그것만 해도 평소와는 너무 다른 얼굴로 보여 데칸이 당황할 정도였다.


“일단 보고부터 해. 지시한 일은 얼마나 진척이 됐나?”

“아, 예.”

데칸이 애써 당황을 수습해 평소처럼 깍듯한 자세를 잡았다.


“피엘리온 소공작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제가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다른 주술사의 비호 아래 이동 중이지 않을까 합니다. 이동이 끝나면 그때부터 추적을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마족에 관한 일은 레스칼의 짐작이 맞았다.

신전에 남은 시체들은 전부 신관복을 입은 자들이었다. 성 말리크의 기사단으로 보이는 이들은 없었다.

마족과 성 말리크의 기사단 사이의 연관성을 부정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성 말리크의 기사단이 남긴 흔적을 최대한 뒤쫓고 있습니다. 워낙 알려진 게 없는 자들이라 정보가 제한적이긴 합니다. 그리고 지시하신 대로 파샤드 후작가의 자금줄을 모두 끊었습니다. 후작가는 조만간 파산할 겁니다. 황후 폐하와의 관계가 비틀렸으니 사교계에서도 발을 붙일 데가 없을 텐데, 이 점은 황후 폐하께 맡겨 둬도 좋을 것 같습니다.”

“후작 부인이 두문불출한다는 건? 황실 재단사처럼 의식을 빼앗긴 후유증과는 연관이 없던가?”

“안타깝게도 그런 증세는 확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후작 부인이 밖에 나가는 일을 병적으로 두려워한다는 건 확실해 보입니다. 사용인들의 말로는, 후작 부인이 창문만 열어도 새들이 나타나 사납게 짖어댄다고 합니다. 한 번은 눈가를 쪼여 상처가 난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

레스칼이 피식 웃었다.


“덜 자란 게 할 일은 하는 모양이군. 그쪽은 그만하면 됐어. 다시 기어 나오는 일이 없는지만 확인해.”

“알겠습니다, 폐하. 새로 지시하실 일은 어떤 것입니까?”

“피엘리온 가에서 고용했던 주술사를 잡아와라. 강제가 아니어도 괜찮아. 제 발로 오면 원하는 만큼 금전적인 보상을 해 준다고 해.”

“시키실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리얀이 의아한 듯 물었다. 데칸이 있는데 레스칼이 굳이 다른 주술사를 고용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나 말고 황후에게.”

“아하. 그게 혹시……?”

리얀이 그래도 되겠냐는 우려를 드러냈다.

재판 당일 황후는 주술의 힘을 빌려 도망치려고 했다. 황후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면 이번에도 그런 시도가 없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건 아니야.”

하지만 레스칼은 태연했다.


“아, 그러신 걸 보니 황후 폐하와 얘기가 잘 되신 모양이로군요.”

“아직 알아야 될 게 많긴 하지만 황후도 내 반려라는 사실에는 동의했어. 트리니다드의 주술사가 필요한 것은 그 과정을 알기 위해서다.”

“역시 주술로 인해 뭔가가 달라진 게 맞는 겁니까?”

“몸이 바뀐 게 맞았어.”

레스칼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얘기를 하는 바람에 리얀과 데칸 둘 다 반응이 늦었다.


“네, 그럼……. ……네? 말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랬다고요? 황후 폐하께서도 동의하신 겁니까?”

“몸을 바꿀 수 있는 주술이 있습니까? 아무리 트리니다드라고 해도 그건 신의 영역에 가깝습니다, 폐하.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레스칼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태연한 게 아니라 오히려 들떠 보였다.


“그런 일이 가능했다, 황후에게는.”

리얀은 레스칼을 바라보다 결국 납득했다.

반려를 향하는 감각은 오로지 레스칼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그걸 이해하게 해 달라고 요구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레스칼이 설명을 해 준다고 해도 온전한 인간인 자신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도 받아들이겠습니다. 하긴, 저희들도 진작 황후 폐하께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겠습니다.”

“황후는 다른 사람이야. 그래서 시체를 하나 찾고 싶다.”

“말씀하십시오.”

“델라르타에 황후의 시체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 불친절한 말에 데칸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야 했다.


“그러니까 그 말씀은…… 황후 폐하와 몸이 바뀌기 전, 원래 몸을 찾고 싶으시다는 그런 뜻이겠군요.”

“무덤은 엘리아든에 만들 것이다. 시간이 지났으니 시체가 온전하진 않겠지. 그걸 감안해라.”

“외람되지만 혹시 시체를 특정 지을 수 있는 단서 같은 게 있겠습니까?”

“이름을 알고 있다.”

그 말을 할 때 레스칼의 표정이 너무 부드럽게 보여 리얀이 괜히 침을 삼켰다.


“라실리아.”

“델라르타에서 라실리아라는 이름을 지녔던 분의 시체를 찾으면 되겠군요.”

“그래. 자세한 위치는 황후가 알고 있을 것이다.”

“여쭤도 된다는 허락입니까?”

“그래. ……아, 오늘은 말고. 내일 물어봐.”

데칸을 대신해 리얀이 은근슬쩍 끼어들어 물었다.

이런 사적인 질문을 하기에 데칸의 충성심은 너무 고지식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왜 내일입니까, 폐하?”

“왜냐면 오늘 밤은 내가 황후의 곁에서 보내야 하거든. 괜히 죽음 같은 걸 떠올리게 하고 싶진 않아.”

“아하…….”

그래서 저렇게 표정이 부드러운 모양이었다.

리얀과 데칸은 아까 낮에 레스칼이 황후와 몹시 유익하고 좋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 상상했다.

어쨌거나 두 사람의 사이가 좋은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황후가 엉뚱한 인간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무엇보다 진짜 반려라는 데 감사했다.

카르타헤나 피엘리온처럼 도무지 황후로 충성할 수 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점은 늙어서 황실 근위대에서 은퇴하는 그날까지 축배를 들어도 모자랐다.

리얀은 저절로 나올 것 같은 콧노래를 애써 참았다.

이 좋은 소식을 어서 세르벤에게 전하고 싶었다. 세르벤은 요새 말단 기사로 강등된 것도 모자라 황후에게 열 걸음 이상 다가갈 수 없다는 이상한 명령까지 얹어져 우울해하는 중이었지만, 제 알 바가 아니었다.

자신은 레스칼을 따라 몹시 즐겁고 기쁜 상태였으니까.


‘오늘 저녁은 축배를 들어야 하니 맛있는 걸 만들어 놓으라고 해야지.’

지시가 전부 끝나자 데칸이 먼저 움직였다.


“델라르타에 방패 셋을 보내겠습니다. 주술사의 행방을 추적하는 일은 지금부터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라.”

“네, 폐하.”

데칸이 집무실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레스칼의 손은 부지런히 움직여 서명을 하고 인장을 찍고 했다.

이 귀찮은 일들을 빨리 마치는 대로 황후를 볼 수 있었다.

* * *



“어, 어…… 그, 그게…….”

라실리아의 속드레스를 조심스레 벗긴 뒤, 이베트가 침을 꿀꺽 삼켰다.

라실리아는 거울을 향해 돌아선 상태였다.

보지 않으려 애를 써도, 속옷 밖으로 살짝 올라온 문양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기, 황후 폐하…… 그게…….”

이베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눈치 빠른 이베트는 자신에게 표식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표식이 돌아온 모양이지.”

라실리아가 덤덤하게 말을 꺼내자 이베트가 화들짝 놀랐다.


“네, 네. 아주 선명한데…… 이걸 사라져 간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황후 폐하. 그런데 대체 신전에서는 왜 그런 고발장을 썼을까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신전에서는 그게 사실이라 여겼을 것이다.”

“아, 그랬군요. 아……? 그런데 그러려면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요?”

“한때 표식이 사라졌던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사라졌다 돌아온 거로군요. ……아, 그럼 황후 폐하께서는…… 표식이 사라졌다 생각하셔서 궁을 떠나시려고……,”

이베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눈물이 글썽거릴 것 같아서 라실리아가 몸을 뒤로 돌려 이베트의 손을 잡았다.


“맞아. 나는 내가 가짜인 줄 알았어.”

“아니, 그럴 리가요! 황후 폐하께서는 최초의 반려처럼 새를 부리시는데요! 무엇보다 렌 님이 그렇게 따르시고……. 그것만 봐도 절대 아니에요!”

“그래. 공녀도 알고 피피도 아는 사실을 나는 모르고 있었어. 어쩌면 모르는 척하려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베트의 눈에 정말로 울컥 눈물이 고였다.


“황후 폐하…… 그렇다면 혹시, 피엘리온 공에 대한 마음 때문에 그렇게……,”

“아니.”

라실리아가 이베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지금 이베트의 마음을 읽고 싶었다. 그러나 따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것을 보면 마음이 보일 때는 어떤 다른 조건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건 내가 카르타헤나 황후가 아니기 때문이었어.”

“아, 그렇다면 다행……. ……으엥? 에엥?”

어지간히도 놀랐는지 이베트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이베트가 다급히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앗, 죄송…… 아니, 그게…… 아주, 몹시 이상한…… 그게……?”

“카르타헤나 황후는 표식을 잃고 있었다. 그건 확실해. 파샤드 후작 부인이 그걸 알았지. 그래서 신전도 알게 됐을 거야.”

“그건 이해했어요. 그런데 황후 폐하께서 황후가 아니라는 말씀은……. 으응, 엥? 아니, 이게 아니라,”

이베트는 무심결에 나오는 이상한 소리를 지우려는 듯 부질없는 헛손질을 해댔다. 그러다 제 뺨이라도 칠 기세였다.


“그건 피엘리온 가에서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주술사를 고용했던 모양이야. 트리니다드에서 온 주술사가 표식을 되돌리는 주문을 만들었고, 아마도 그것 때문에 내가 여기 있게 된 것 같아.”

“여, 여기 있게 됐다는 게…….”

“내가 황후가 되었다는 뜻이야. 제국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살아온, 델라르타 소왕국의 예언가가.”

“네에? ……끅!”

이베트가 언젠가처럼 딸꾹질을 시작했다. 너무 놀라면 그러는 모양이었다.


“괜찮아?”

라실리아가 이베트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이베트가 딸꾹질을 멈추지 못하면서도 황송해했다.


“아니, 끅, 이러시지 않아도, 딸꾹! 곧 괜찮, 끅! 아니, 안 괜찮…… 끅!”

“당장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 공녀에게 더 이상 비밀로 할 이유가 없기에 꺼낸 말이었어. 그렇다고 황궁의 모두에게 알릴 생각은 아니지만 공녀는 나의 사람이니.”

“아, 그 말씀은 너무 황송, 끅! ……아! 이제 괜찮아졌어요!”

딸꾹질이 멎었고, 이베트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라실리아를 바라보았다.


“이제 다 놀랐나 봐요, 황후 폐하! 아, 계속 황후 폐하라 칭해도 되는 거지요? 혹시라도 다른 칭호를 원하신다면 말씀해 주세요. 아니아니, 그럼 주술의 힘으로 황후 폐하가 되셨다는 말씀인가요? 그걸 렌 님과 황제 폐하께서는 다 알아보신 거지요? 제 말이 맞나요?”

“맞아. 감추려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는 일이었어.”

“으아아, 이럴 수가! 이런 놀랍고 신비롭고 완전 엄청난 일을 제가 바로 곁에서 보고 있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이베트는 라실리아가 카르타헤나 황후가 아니라는 사실은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최초의 반려에 대한 얘기가 전부 사실이었나 봐요! 세상에나! 믿을 수 없어! 아니, 황후 폐하가 하신 말씀을 못 믿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수사적인 말이에요! 하여간 너무 엄청나요!”

이베트가 라실리아의 소매 끝을 붙잡고 붕붕 흔들어 댔다. 흥분하면 저도 모르게 나오는 동작 같았다.


“생각할수록 진짜 굉장하잖아요. 몸을 바꾸다니! 세상에나, 한편으로는 좀 무섭기도 해요. 주술이 그렇게나 대단한 거라면 트리니다드는 얼마나 무서운 곳일까요? 저는 트리니다드로 쫓겨 간 주술사들은 다 엉터리라고 들었는데 말이에요. 그렇게 무서운 힘을 지닌 주술사들이 왜 그런 오지로 쫓겨났을까요. 이상하지 않아요?”

이베트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마치 대답처럼, 허공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검은 그림자가 깊어지며 통로가 되는 것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통로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이베트의 질문에 대한 답을 들고서.


“그건 쫓겨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제 발로 떠난 거지.”

통로 안쪽에서 걸어 나온 누군가가 푹 눌러쓴 후드를 걷어 올렸다.

드러난 살갗에는 알 수 없는 검은 문양이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 깨끗한 곳은 두 눈뿐이었다.


그가 그 눈으로 라실리아를 바라보다 고개를 까닥 숙였다.


“인사드립니다, 엘리아든의 황후이자 새들의 주인이신 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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