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열 걸음 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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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열 걸음 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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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열 걸음 안에는
2023.04.05.
입술이 입술을 벌리는 순간이었다.
“삐이…… 삐이잇!”
어디선가 피피가 날아왔다.
“삐이!”
레스칼이 멈칫대며 인상을 썼고, 라실리아가 그 틈에 그를 밀어냈다.
“이제 일어난 거야? 다 잤어?”
“피이!”
피피가 몹시 화난 표정을 짓더니 라실리아의 어깨에 찰싹 들러붙었다.
그리고 레스칼을 향해 마구 날개를 퍼덕였다.
“덜 자란 게…….”
레스칼이 이를 갈았다.
둘이 싸워 대는 건 익숙한 일이라 라실리아가 재빨리 피피를 안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옆방은 편히 쓰십시오. 저는 이만,”
“아니, 잠깐.”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편히 쓰라는 건 아무 때나 와도 된다는 말인가?”
라실리아가 난처한 듯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레스칼이 고개를 움직여 집요하게 시선을 따라왔다.
“대답해 줘. 그런 뜻인가?”
“그게…… 폐하께는 반려가 필요한 순간이 있으니까요. 저는 그게 언제인지 모르니까……, 엇,”
레스칼이 라실리아를 홱 당겨 안았다.
“삐이! 핏!”
피피가 열심히 소리를 지르고 머리카락이며 손등을 쪼고 난동을 피웠지만 레스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폐하. 피피가 화를 내고 있는데…….”
“덜 자라서 안 아파.”
“아픈 게 문제가 아니라……,”
“삐잇!”
덜 자랐다는 말이 분했는지 피피가 입을 벌려 불꽃을 토해 냈다.
불꽃이 닿은 옷자락이 동그랗게 탔다. 그때야 레스칼이 고개를 돌려 불꽃을 손으로 털어냈다. 동작이 너무 가벼워서 불이 아니라 먼지를 털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뜨겁지 않습니까?”
라실리아가 눈을 둥글게 뜨고 물었다.
레스칼이 작게 웃으며 손으로 라실리아의 얼굴을 감쌌다.
“그 표정. 놀란 것처럼 보이는데.”
“네. 불을 맨손으로 만지셨으니까요.”
“걱정한 건가?”
“누구라도 걱정할 겁니다.”
“이 정도 불은 괜찮아. 너무 작아서 불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삐이!”
예상대로 피피는 화를 냈고, 레스칼은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결국 라실리아가 피피를 달래야 했다.
“놓아주세요, 폐하. 피피가 화를 내면 제가 싫습니다.”
“……그대가 싫은 건 내가 싫으니.”
“일부러 화를 내게 하는 게 좋은 일은 아니니까요.”
레스칼이 언짢은 듯 얼굴을 구기다 라실리아를 놓아주었다.
“그럼 이건 봐줘.”
초옥, 입술이 빠르게 입술을 훑고 지나갔다.
라실리아가 놀라 눈을 크게 뜨는 사이, 레스칼이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다녀오겠다. ……가능한 한 빠르게.”
“삐이!”
빠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오지 말라는 외침은 그대로 무시당했다.
“그럼 잠시만.”
꽤 긴 미련을 남기고 레스칼이 간신히 자리를 떴다.
“후우…….”
레스칼이 떠나고 나자 라실리아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가 있을 동안 숨을 제대로 쉬고 있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삐이?”
피피가 손바닥 위로 냉큼 올라왔다.
“음? 아냐, 아픈 게 아니야. 괜찮아.”
“삐이.”
“열이 있어 보인다고? 아니야.”
“삐이이.”
“아니라니까.”
라실리아가 표정을 감출 겸 피피를 쓰다듬었다.
피피가 종알종알 레스칼이 마음에 안 드는 이유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음…… 그래도 그렇게까지 못된 건 아니지 않아?”
“삐!”
“나쁜 짓을 한 적은 없잖아.”
“삐이!”
“안 해도 알 수 있다고? 에이, 그런 말이 어딨어.”
“삐!”
“편들어 주지 말라니……. 그냥 사실을 말하는 건데.”
“삐이이잇!”
“아니, 정말 아니야.”
그때 마침 이베트가 들어왔다.
그 뒤를 세르벤이 따라 들어왔는데, 이베트를 대신해 세르벤이 열 몇 권이나 되는 책들을 한 아름 들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황후 폐하. 책은 어디다 놓으면 좋을까요?”
라실리아가 약간 붉어진 얼굴로 탁자를 가리켰다.
“저 위에. 책이 꽤 많네.”
“아, 많은가요? 꼭 보셔야 되는 것만 추렸습니다. 최초의 반려에 대한 기록은 워낙 많기도 하고, 그만큼 다른 게 많이 섞이기도 해서요. 어? 그런데 왜 탁자가 저기 있나요?”
라실리아의 얼굴이 조금 더 붉어졌다.
레스칼이 저 탁자를 떠밀 때의 행동이나 표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라실리아가 공연히 손가락을 세워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그냥…… 그렇게 됐어. 책을 가져오느라 고생 많았다. 시그레스 경도.”
“황공합니다, 황후 폐하. 저, 그런데 제가 책을 날라 왔다는 건 폐하께서는 모르시는 일입니다.”
책을 내려놓은 세르벤이 뒤에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니 계속 모르시게 해 달라는 말 같군. 이유가 뭔가?”
“그게……. 황후 폐하께 열 걸음 이내로 다가가서는 안 된다는 명을 받았습니다. 열 걸음을 세고 있긴 한데, 지금 좀 아슬아슬해서요.”
“열 걸음을?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말해 주겠나?”
“저도 이해하고 싶습니다…….”
세르벤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제가 뭔가 잘못을 하긴 한 것 같은데 이유는 말씀을 안 해 주시고 그저 명령만 내리셨습니다.”
그건 세르벤이 마차에서 내리는 라실리아의 손을 너무 오래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걸음을 세라는 건 남들에게는 그저 좀스럽게 보일 만한 일이었고, 그래서 레스칼은 절대 이유를 말해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당분간 세르벤만 마음고생을 톡톡히 할 예정이었다.
“폐하께는 비밀로 하겠다. 그만 나가도 좋아.”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그럼 편한 시간 보내십시오.”
세르벤이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나섰다.
* * *
“일단 이것부터 읽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황후 폐하.”
이베트는 열 권이 넘는 책 중에서 하나를 골라 들어 내밀었다.
“주술사로서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라고 했어요. 전부 다 사실인지는 잘 모르지만 목격담 외에 최초의 반려가 직접 작성했다는 수기 같은 것도 실려 있거든요. 최소한 그건 진실이 아닐까요?”
“고마워.”
라실리아가 책을 받아 들자 이베트가 얼굴을 붉혔다.
“아이 참. 황송합니다, 황후 폐하.”
이베트는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가끔씩 느끼는 일이었지만 이베트는 거짓말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만큼 표정이 읽기 쉬웠다.
“삐이.”
피피가 곁으로 날아와 무슨 책이냐며 참견을 시작했다.
“최초의 반려가 남긴 기록이래. 너도 같이 볼래?”
“삐이?”
피피가 고개를 갸웃댔다.
최초의 반려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지만 크게 흥미는 없는 모양이었다.
“음……. 이상한 일이네. 너는 그 사람을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어?”
“삐이이.”
“옛날 일은 몰라도 된다고? 어째서?”
“삐이.”
“아……. 지금은 나를 위해 태어났으니까?”
“삐.”
“…….”
이유는 알 수가 없었지만 가슴이 지끈거렸다.
라실리아가 피피를 안아 들고 자그마한 머리에 뺨을 기댔다.
“그러게……. 너는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했었는데.”
“삐이!”
이곳은 처음이지만 낯선 곳이 아니었다. 피피처럼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존재들이 있었다. 스스로 낯선 곳을 만들려고 했을 뿐이었다.
이제 자신이 진짜 반려가 아니라는 생각은 하려고 해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 환영해 줘서 고마워.”
“삐이이…….”
라실리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는 것처럼 피피가 이마를 문질러 댔다.
그때 이베트의 마음이 보였다.
-아……. 황후 페하의 표정이 좋아 보여. 그럼 이제 궁을 떠난다는 생각은 더는 안 하시는 걸까.
마냥 선량한 것 같은 이베트는 어떤 면에서는 눈치가 빨랐다.
재판을 준비하던 라실리아가 사실은 그걸 핑계로 궁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던 모양이었다.
-그래. 폐하께서 재판을 거부하셨으니 신전에서도 더는 같은 짓을 하진 못할 테고……. 아 참. 하리오스 신전은 문을 닫았다고 했지. 그럼 문제는 피엘리온 소공작님인가. 그렇지만 피엘리온 소공작님은 혼자 도망쳤잖아. 아무리 연인이었다고 해도 그런 형편없는 남자를 황후 폐하께서 계속 사랑하실 리가 없어.
이베트는 아직 라실리아의 정체를 몰랐다.
-아니, 그런데 사랑하신 건 맞나. 나는 전혀 몰랐는데……. 내게 편지 심부름 같은 것도 한 번 시키신 적이 없었잖아. 소공작님이 따로 찾아오신 적도 한 번 없고. 그건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이건 너무 불경한 생각 같지만, 왠지 피엘리온 소공작님은 그냥 변명같이 느껴져. 폐하를 떠나기 위한.
이베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거기까지 알았으면 더는 감출 수도 없었다. 지금은 짐작이지만 곧 이베트도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황제가 자신의 정체를 알았는데 이베트에게 비밀로 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지금일지도 몰라.’
탁.
라실리아가 막 펼쳐 들던 책을 덮고 이베트를 응시했다.
“……? 네, 황후 폐하. 뭐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이베트는 라실리아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금방 눈치챘다.
라실리아가 입을 열었다.
“옷을 갈아입어야겠어.”
“아, 벌써요? 알겠습니다. 잠옷을 준비해 드릴까요?”
“그래. 그리고 공녀가 입혀 주었으면 좋겠군.”
“아, 제가……. 네? 제가요?”
이제껏 늘 속옷 차림을 보이는 것을 피해 왔던 것을 아는 터라 이베트가 토끼 눈을 했다.
“제, 제가…… 제가 그래도 되는 건가요?”
“그래 주었으면 한다.”
제게 정말로 반려의 표식이 있는지 확인해 볼 시간이었다.
“아, 네……. 그,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황후 폐하.”
이베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실리아가 이베트를 따라 침실로 들어섰다.
* * *
“……?”
리얀이 고개를 힐긋 돌렸다.
방금 전부터 청각을 예민하게 돋우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그러나 확실히 들려오는 작은 노랫소리가 있었다.
처음에는 새라도 날아왔나 싶었다. 이 근처 새들은 황후의 몸종이나 다름없는 존재들이었으니까.
그러나 들을수록 아니었다.
분명히 집무실 안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리얀이 좀 더 소리에 집중했다.
“세상에…….”
듣다 보니 알 수 있었다. 그건 분명 레스칼의 목소리였다.
‘폐하께서, 콧노래를 부르고 계신다고?’
리얀이 놀라움을 감추기 위해 혼자 허공에 팔을 휘두르던 그때였다.
“……지금 폐하를 뵈면 안 되는 겁니까?”
언제 나타났는지 데칸이 떨떠름하게 서서 묻고 있었다.
리얀이 반사적으로 그에게 손가락을 내밀어 목소리를 낮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쉿.”
“……? 무슨 일이 있습니까?”
데칸이 고분고분하게 목소리를 죽여 물었다.
리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데칸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폐하께서 지금 무시무시할 정도로 기분이 좋으시거든. 방해는 좀 나중에 하지 그래? 아, 급한 일이야?”
“급한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페하께서 부르신 거라.”
“아, 그래? 그런 거면……,”
그때 집무실 문 안쪽에서 레스칼이 말했다.
“그런 거면 들어와.”
“앗,”
애초에 레스칼의 이목을 속일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은 리얀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