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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기다리는 일 (61/96)


61. 기다리는 일
2023.04.02.



 
이 사람은 나에 대해서는 하나밖에 모르는 것 같아.

라실리아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라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레스칼이 온몸이 그대로 굳은 채 중얼거렸다.


“그래서가 아닙니다.”

라실리아가 이렇게 말해 줄 때까지 그런 식이었다.


“정말인가?”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거듭 물었다.


“정말이지? 소공작은 그대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소공작을 연인으로 둔 건 카르타헤나였으니까. 그렇지?”

“네……. 그리고 얼굴은 놓아주세요. 불편합니다.”

불편하기보다는 신경이 쓰여서였다.

양손으로 얼굴을 붙드는 건 어쩐지 키스를 하기 전의 몸짓을 닮았으니까.


“꼭 놓아야 하나?”

저 말이 왜 안 나오나 싶었다.

라실리아가 표정 없이 레스칼을 쳐다보았다. 레스칼이 곧 시무룩해져서 손을 뗐다. 라실리아는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거절을 의미하는 저 엄한 얼굴은 레스칼에게 꽤 큰 상처였다.


“그대는 내 반려인데…….”

레스칼이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

이전이라면 소용없는 일이었겠지만, 지금 라실리아는 마음이 많이 말랑해진 상태였다.


“폐하.”

레스칼이 홱 고개를 들어 올렸다. 뭐든 말하라는 눈빛이 조금 부담스럽긴 했다.


“저 역시 제가 어떻게 황후의 몸이 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떠 보니 이곳에 와 있었습니다.”

“그렇……군.”

레스칼은 얼굴을 만지지 말라는 말을 그새 까먹고 다시 라실리아의 뺨을 쥐었다.

죽었다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그러는 것 같아 그냥 놔두었다.


“그래서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왜 폐하의 반려가 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제게는 폐하께서 제게 느끼시는 그런 확신이 아직 없습니다.”

“아…….”

“제가 정말 반려가 맞다면,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처음부터 뭔가가 어긋난 모양입니다.”

레스칼이 시선을 마주한 상태로 고개를 저었다.


“어긋나도 상관없다. 제대로 맞추면 되니까.”

“네. 그래서 제대로 맞출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 같은 말이로군.”

레스칼이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 표정이 너무 시무룩해 보여 라실리아가 저도 모르게 그의 뺨에 손을 댔다.


“같은 말이라도 다릅니다.”

레스칼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말을 하면서도 그는 라실리아가 손을 뗄까 봐 다급히 라실리아의 손목을 쥐어 제 뺨에 대고 눌렀다.


“이전에는 폐하를 멀리하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했다면, 지금은 그 반대니까요.”

“그 반대라면……,”

“제가 어떻게 반려가 될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면 저도 폐하를 제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

말을 하기에 앞서 작은 한숨이 먼저 흘렀다.


“그대는 나를 계속 기다리게 만든다.”

“압니다. 하지만…… 한 번 어긋난 게 아무런 노력도 없이 제대로 맞춰지는 건 아니니까요.”

레스칼이 입꼬리를 실룩였다.

맞는 말이라 반박은 할 수 없고, 그러나 기다리라는 말은 싫고, 그래도 라실리아의 말을 듣지 않을 방법은 없다는 걸 안다는 그런 뜻이었다.


“기다릴 테니 내게도 뭔가를 해 줘.”

너무 익숙한 일이라 이제는 그러려니 하게 되는 듯했다.


“듣겠습니다.”

일단 말을 해 보라는 의미였다.

라실리아는 레스칼이 제 입술을 쳐다보는 시선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키스를 해 달라고 하지 않을까. 늘 그랬잖아. ……거절해야지.’

레스칼이 키스하는 방식은 꽤 곤란했다. 원래도 뺨이니 이마니 이곳저곳 입술을 붙이는 걸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고,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지만 입술에 하는 키스는 또 달랐다.

그럴 때면 그는 끝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가만히 받아 주고 있으면 어디까지 갈지 몰라서 조금 무섭기도 했다.


“그대의 이름을 물어도 되나.”

하지만 키스가 아니었다.


“안 됩…… 네?”

안 된다는 말을 하려던 라실리아가 놀라서 눈을 둥글게 떴다.


“그대의 이름. 내게 알려 줘도 되는 거라면.”

“아…….”

멀쩡하게 말을 하고 있어도 레스칼의 시선은 여전히 제 입술 위에 들러붙어 있었다. 눈에 고인 갈증이 너무 선명해 제 목이 타는 기분이 들었는데 레스칼은 다른 말을 했다.


“그럼…… 라실리아.”

“라실리아.”

레스칼이 제 이름을 천천히 따라 했다. 그러자 라실리아라는 이름이 전혀 다른 것처럼 들려왔다.


“내가 그대를 이 이름으로 부르는 게 좋을까?”

“글쎄요……. 혼란이 오지 않을까요?”

맞지 않는 황후 노릇보다는 자신으로 돌아가는 게 더 마음 편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제 모습은 황후였다. 똑같은 얼굴로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건 상관없어. 그대가 원하는 게 뭔지 그게 가장 중요하다. 황후의 이름을 쓰는 게 싫다면 쓰지 않아도 돼. 황후의 부재를 공식화하고 그대가 새 황후가 되는 방법이 있다.”

“남들에게는 똑같은 사람일 텐데요. 똑같이 생긴.”

다들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상관없다. 그런 이유로 그대에게 평생 다른 사람 노릇을 하라고 청하진 않겠어.”

라실리아가 레스칼의 뺨에 닿은 손가락을 살짝 움직였다. 제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 레스칼이 움찔 어깨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가 반려라는 확신이 든 다음에.”

“언제라도.”

손끝에 닿는 살갗의 감촉은 따듯하고 부드러웠다. 사람의 체온은 마음을 계속 느슨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그가 왜 종종 제 얼굴을 만지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었다.


“……이상하진 않으십니까?”

“어떤 게?”

“똑같은 얼굴이,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게.”

“전혀. ……처음부터 알았다면 그랬을지도.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럴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레스칼은 자신과는 달리 반려의 존재를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 같았다.


“내게는 오히려 카르타헤나가 이상하고 낯설었다. 그대는……,”

적당한 말을 고르기 위해 잠시 말을 끊은 레스칼이 미간을 찌푸렸다.

라실리아가 그만 손을 놓으라는 것처럼 손가락을 꾸물대자 미간의 주름이 더 진해졌다.

그러나 놓아준 손이 제 미간을 가만히 누르는 것을 본 뒤에는 거짓말처럼 인상이 부드러워졌다.


“그대는 처음부터 이곳에 있어야 했던 존재 같아. 뭔가가 어긋나서 뒤늦게 찾아오긴 했지만.”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자신이 반려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도무지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도 언젠간 이 사람처럼 느끼게 될까.’

자신이 반려가 되어야 했던 이유를 찾고 나면.

그러면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느낄 수 있을까.

더는 예언자가 아니게 된 새로운 삶도 제 삶처럼 느껴질까.


‘어쩌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 번 죽었으니까.’

그러니까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제국의 황후라는 새로운 삶을.


“그렇다면……. ……아, 그런데?”

“뭐가 잘못됐나?”

문득 이제껏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생각이 떠올랐다.


“황후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자신은 죽어서 황후의 몸으로 되살아났다. 그렇다면 황후는 어떻게 된 걸까.

황후가 자신처럼 죽거나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자신이 깨어났을 때 그렇게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을 테니까.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황후는 그럼 어떻게 되었을까.


“황후와 그대가 서로 몸이 바뀐 거라면 황후가 죽었겠군.”

“아…….”

몸이 뒤바뀐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게 가장 말이 되는 소리일 것이다.

자신이 죽는 순간 영혼이 서로 바뀌었고, 자신이 황후가 되는 대신 황후는 델라르타의 예언자로 죽었을 것이다.

기분이 무척 이상했다.

자신에게는 새 삶이었지만 황후에게는 삶을 빼앗긴 것이었다.


“황후가 부렸다는 주술사가 뭔가를 알고 있을지도 몰라.”

라실리아가 깜짝 놀랐다.


“그것도 알고 계셨나요?”

“데칸은 귀가 밝으니까.”

별것 아니라는 말투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요한 비밀이었던 만큼 황후와 피엘리온 소공작은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했을 것이다. 특히나 주술사를 불러들인 일을 끝까지 감춰야 했을 대상이 황제였다.

새삼 그를 상대로 거짓을 유지하려던 일이 부질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짐작이긴 하지만 몸이 바뀐 것도 그 주술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대가 알고 싶다는 게 이거였겠군.”

“그럴지도요.”

“그럼 그 주술사를 찾으면 되겠어.”

레스칼이 갑자기 씩 웃었다.

불시에 날아오는 미소는 의외의 역할을 했다. 이유를 모른 채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왜 이러지……. 그냥 웃은 건데.’

레스칼이 제 이마를 라실리아의 이마에 댔다.

그 바람에 제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대는 소공작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나와 이혼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주술사만 찾으면 돼.”

“…….”

그 말에 심장이 두근대는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저렇게 좋아해서 그런가 봐.’

그가 몹시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기뻐하는 이유는 오로지 자신이었다.

그 사실이 자신을 조금씩 뒤흔드는 모양이었다.


“데칸을 다그쳐야겠어.”

그 말에는 이미 데칸이 황후가 부렸던 주술사를 찾고 있었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말릴 틈도 없이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뺨에 입술을 붙였다.


“아…….”

그러다 입술을 붙인 채 멈춰 버렸다.


“왜 그러시나요?”

“돌아가서 데칸을 부를 생각이었는데……,”

“그런데?”

“가기 싫어서.”

레스칼이 느리게 금안을 굴렸다.


“돌아가긴 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다시 와도 될까? 오래 머물진 않겠다.”

그 말은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일과가 끝나서 잠을 청하러 오신 게 아니었습니까?”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럴 시간이 아니라. ……그런데 내가 잠을 청하러 온 줄 알았다고?”

레스칼이 순간 고개를 바짝 들이댔다. 어딘가가 닿을 것 같아 라실리아가 주춤 몸을 뒤로 젖혔다.


“네……. 예전처럼 옆방에서,”

레스칼이 서둘러 말을 잘랐다.


“그대가 나를 돌려보냈는데.”

“네, 그건……,”

황제와 거리를 벌릴 생각으로 화가 난 척하고 있을 때였다.


“그랬다는 걸 잊어버렸나?”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제가 그랬다는 걸 폐하께서 잊으신 줄 알았습니다.”

“누구든 잊었으면 없던 일이 됐을 거라는 뜻이겠군.”

“꼭 그렇지는 않은……,”

……아니,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화를 낼 이유가 이제 더는 없었으니까. 그를 애써 멀리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레스칼은 라실리아가 말끝을 흐리는 이유를 예리하게 알아차렸다.


“그럼 나를 낯설다 하던 것도 잊으면 되겠군.”

그게 무슨 말인지 묻기 전에, 레스칼이 한 팔로 라실리아를 휘어 감았다. 다른 손이 턱을 붙들었다.

다음 순간 입술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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