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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시작이 어긋났다면 (60/96)


60. 시작이 어긋났다면
2023.03.29.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이 시간에?”

라실리아가 벽난로 위에 놓인 화려한 탁상시계를 바라보았다.

애매한 시간이었다.

식사를 하기에는 늦었고, 잠이 들기에는 일렀다.

얼마 전 궁에 돌아와 외출복을 갈아입은 라실리아는 이베트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제국에 관해 너무 많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최초의 반려와 그가 맺은 계약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전부 알아둬야 했다. 관련한 책을 알려달라고 했더니 이베트가 황실 도서관으로 뛰어갔다.

자신이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라며 너무 신이 난 얼굴이라 말리지도 못했다.

이베트가 책을 가져오면 읽고 나서 씻을 생각이었는데, 황제가 그 틈에 찾아왔다.


“너무 이르지 않나?”

라실리아가 난처한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난처했다.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황제를 대하는 일이 계속 난처해지고 있었다.


“황후 폐하?”

혼자 생각이 길어졌던지 문밖에서 곤란해하는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어쨌거나 황제를 내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 문을 열어라.”

“네, 황후 폐하.”

라실리아가 몸을 일으켜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

머릿속으로는 황제를 어떻게 돌려보낼지 이유를 재어 보는 중이었다.


‘블루문은 벌써 끝났는데…….’

그러니 밤을 같이 지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더는 기억상실이라는 변명을 댈 수는 없을 것 같고.’

황후인 척했을 때는 기억상실이라는 거짓말이 별로 거슬리지 않았다. 그것만큼 상황을 무마하기에 적절한 방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황제와의 사이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일단 황제는 자신이 카르타헤나 황후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눈치였고, 자신은 진짜 반려일지도 몰랐다.

원래도 황제는 빈틈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서 파고 들어오는 사람이었으니 라실리아가 더는 거절할 수 없는 이유를 벌써 준비했을지도 몰랐다.


‘그럼 나는 뭐라고 해야 하지. 아직도 낯설다고 해야 하나.’

그 말이, 진짜긴 할까.

과연 황제가 아직도 낯선 사람일까.

따지고 보면 무척 이상한 일이었다. 황제는 제 이름도, 자신이 누군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자신을 진짜 반려로 대하고 있었다.


‘서로의 운명이라는 건 그렇게나 대단한 걸까. 진짜 이름 같은 건 상관도 없을 정도로.’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무는 통에 라실리아는 황제가 제 곁으로 다가오는 것을 놓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어도 되나?”

“아……. ……오셨습니까.”

하마터면 깜짝 놀라 큰 소리를 낼 뻔했다.

라실리아는 표정을 살피려는 듯 코앞으로 다가오는 레스칼을 피해 어깨를 뒤로 젖혔다.


“슈라이든 공녀를 기다리고 있던 참입니다. 읽을 책을 부탁했거든요.”

“그리고?”

“그게 다입니다.”

“아닌 것 같은데.”

레스칼은 쓸데없이 감이 좋았다.

라실리아가 화제를 돌릴 겸 의자를 권했다.


“앉으십시오. 오늘은 일과를 일찍 마치신 모양입니다.”

“그건 아니고.”

레스칼은 라실리아가 권하는 맞은편 자리를 못 본 척 하고는 옆자리에 바싹 붙어 앉았다.

그가 이러는 게 처음도 아니고, 여러 번 겪은 일인데 라실리아는 지금이 가장 난처했다.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그건 자신이 이 남자를 언젠가는, 어떻게든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었으니까.

반려니 접촉이니 하는 얘기들은 그저 남의 일이었는데 지금은 자신의 일이 되었다.

그러자 작게 불어오는 숨결마저 전부 다 신경이 쓰였다.


“제가 자리를 옮기겠습니다.”

결국 라실리아는 견디지 못하고 맞은편 의자로 옮겼다.

레스칼이 라실리아를 바라보며 입을 벌렸다.

할 말이 몹시 많은데 차마 하지는 못하는 그런 얼굴이었다.


“꼭…… 그래야 하나?”

레스칼이 한참 뒤에 아주 작게 물었다.


“네.”

그리고 라실리아는 대답을 하기가 힘들었다.

이전이라면 뻔한 거짓말로 옆에 찰싹 달라붙어 앉으려는 황제를, 그저 귀찮다는 얼굴로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어려웠다.


“왜……?”

“폐하와 저의 관계가 달라졌으니까요.”

“왜?”

그럴 리 없다는 되물음을 라실리아는 이해하지 못했다.


“달라진 게 아닙니까?”

사람이 달라졌으니까 관계도 달라지는 게 아닐까.


‘호르세드 경이 틀렸던 걸까? 황제는 내가 아예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 건가?’

결론을 말하자면 틀린 쪽은 라실리아였다.

레스칼은 황후가 기억을 잃은 뒤부터, 그러니까 알 수 없는 이유로 진짜 반려가 황후가 된 뒤부터 늘 같은 상태였다.


“소공작 때문인가?”

그래서 레스칼은 엉뚱한 곳에서 이유를 찾았다.

라실리아가 저도 모르게 눈매를 찡그렸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와 같이 앉지 않으려 하는 게. 전에는 허락했잖아.”

“허락한 게 아니라 폐하께서……. ……아니, 그보다 소공작 때문이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잊겠다고는 했지만, 아직은 그런 게 아니라서.”

“…….”

생각이 엉켰다.


‘뭐야. 내가 황후와 다른 사람이라고 여겼으면 소공작을 좋아할 리도 없다는 걸 알 텐데……. 역시 그런 게 아니었나.’

하지만 데칸이 거짓말을 했을 것 같진 않았다. 얻을 게 없는 거짓말이었다.


“폐하께선 제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결국 라실리아는 직접 묻는 방법을 택했다.


“나의 반려.”

대답은 빨랐다. 조금의 의심도 없다는 태도였다.


“그렇다면 모순이 생깁니다. 제가 폐하의 반려가 맞다면, 다른 이를 마음에 품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셔야 됩니다.”

“생각은 하고 있다. 하지만 소공작에게 마음을 품고 있다는 말을 한 건 그대였어. 그대가 한 말은 내게 모두 무겁다.”

“아…….”

“그리고 우리는 시작이 어긋났잖아.”

레스칼이 가만히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다른 이를 내 반려라 여겼고, 그대는 자신이 나의 반려라는 것도 모르고 있고. 그런 상황에서 다른 이를 마음에 품을 수도…… 그럴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고.”

중간에 말이 잠시 끊겼을 때 라실리아는 어쩐지 부득 이 가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레스칼이 미간을 펴고 라실리아를 바라보았다.

순간 라실리아는 저 찬란한 금안이 이제껏 본 것 중에서 가장 절실한 눈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대는 분명히 소공작을 잊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대가 진짜 반려라면 이혼하지도 않겠다고 했어.”

“그건……. 네, 맞습니다.”

“그러니까 인내할 수 있다. 당분간이라면.”

말을 마친 레스칼이 소파 등받이에 기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가 작게 뿜어내는 한숨을 손바닥이 지워 주었다.


“내쫓지는 마. 옆에 앉는 건 참을 테니까.”

“…….”

라실리아는 이럴 때 곤란했다.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며 막무가내로 구는 황제는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깨를 늘어트리고 한숨을 쉬는 황제에게는 제 마음이 물컹해지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고작 옆에 앉지 못하게 했다는 이유로 저러고 있으면.

라실리아가 난처하게 소매의 레이스를 만지작대다 입을 열었다.


“……옆에 앉으셔도 됩니다. 원하시면.”

“……? ……!”

레스칼이 벌떡 일어났다. 그가 가운데 탁자를 뛰어넘기라도 할 것 같아서 라실리아가 다급히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 전에 확인할 게 있습니다.”

“뭐든.”

레스칼은 탁자를 뛰어넘진 않았다. 대신 옆으로 홱 밀어 버렸다.

라실리아는 소파의 팔걸이에 걸릴 때까지 단숨에 밀려간 탁자를 잠깐 바라보고는 레스칼을 마주했다.

새삼 긴장이 되긴 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라실리아가 레스칼을 바라보며 천천히 똑같은 질문을 했다.


“폐하께서는, 제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 * *



“같은 답을 원하는 건 아니겠군.”

다행히도 레스칼은 라실리아가 같은 질문을 하는 이유를 눈치챘다.


“나에게 그대는 나의 반려라는 말로 충분하다. 그 외에 다른 확인이 필요한가?”

필요했다. 라실리아에게는.

라실리아는 이제껏 제국의 황제와 그 반려가 무엇인지 조금도 모른 채 살아왔다.

갑자기 그와 반려라는 운명으로 엮였다고 한다면, 이유가 필요했다. 확신이 필요했다.

자신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제가 누군지도 모르고 계시는 폐하께서 저를 반려로 여기시는 게 과연 가능한 일입니까?”

“……그대는, 그대가 카르타헤나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로군.”

라실리아는 대답 없이 레스칼을 바라보았다.

레스칼은 라실리아가 원하는 답을 알아내려는 사람처럼 시선을 고정시킨 채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나는 카르타헤나를 태어났을 때부터 알았다. 카르타헤나는 반려의 표식을 지녔으니까. 나는 다른 여인을 생각해 본 적이 없고,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카르타헤나가 황후가 되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당연한 일이었어.”

레스칼이 쓰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카르타헤나 역시 생각해 본 적이 없고, 필요로 한 적이 없다.”

“그건……,”

“카르타헤나도 다른 여인과 다를 바 없었다는 뜻이야. 표식이 있거나 없거나.”

레스칼의 얼굴에서 쓴웃음이 사라졌다.

대신 너무 진지해서 무서워 보이는 표정이 남았다.


“그래서 나는 그대가 카르타헤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대는 카르타헤나가 아니야. 나의 반려다.”

“…….”

라실리아가 숨을 들이쉬었다.

레스칼은 라실리아가 꼭 들어야 했던 말을 했다.


“그럼 이제 옆에 앉아도 되는 건가?”

레스칼이 손을 뻗어 라실리아의 손을 쥐었다.

라실리아가 그의 무표정을 읽어낼 수 있듯이, 레스칼도 라실리아의 미세한 반응들을 예민하게 감지했다.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손가락을 벌려 제 손가락을 끼우며 속삭이듯 말했다.


“앉게 해 줘. 그대의 곁에.”

“…….”

거절은 어려웠다.

그런 말을 듣고 난 뒤로는 몇 배나 더 어려워졌다.

라실리아가 살짝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차 하는 사이 레스칼의 몸이 옆에 바싹 붙어 있었다.

레스칼은 두 눈에 술렁이는 감정들을 숨기지 않았다. 한 손을 깍지 끼운 채 몸을 틀어 라실리아를 마주한 그가 시선을 고정시킨 채 손등에 입술을 댔다.

시선이 들러붙은 곳은 제 입술이었다.

두 눈에 드러나는 표정이 하도 노골적인 터라 남자를 가까이 해 본 경험이 조금도 없는 라실리아도 도무지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제가 누군지 궁금하진 않으십니까?”

라실리아가 애써 말을 돌렸다.


“내가 궁금해해도 되는 건가?”

“저라면 궁금할 것 같은데요. 어느 날 갑자기 곁에 있던 사람이 바뀌었다고 하면.”

“그대가 말을 하지 않으려고 드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손톱 아래에 입술이 닿았다.

하필 그런 곳에 키스를 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게 손톱처럼 사소한 부위까지 전부 소중히 여기겠다는 말과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었다.


“제가 델라르타로 꼭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고 하면요?”

“아…….”

그 말에 키스가 멎었다.

레스칼이 순식간에 달라진 표정을 한 채 라실리아의 손을 꾹 붙들었다.


“그럼…… 소공작이 아니라 델라르타에 있는 자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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