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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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보고 싶어서
2023.03.26.
“으앗! 아니! 이건……! 그러니까 제가 불경한 마음을 품은 게 아니라……!”
세르벤이 경악한 얼굴로 라실리아의 손을 놓았다.
사실 이렇게까지 놀랄 일은 아니었는데, 자신을 찌를 것처럼 노려보는 금안 덕에 머리가 굳었다.
당황한 세르벤이 황급히 손을 놓는 바람에 막 마차 발판을 밟고 내려서던 라실리아가 비틀거렸다.
“앗, 황후 폐하!”
“비켜.”
레스칼은 가차 없이 세르벤을 밀친 다음 라실리아를 붙잡았다.
퍽!
세르벤이 넘어지며 마차 바퀴 축대에 코를 찧었다.
“윽.”
세르벤이 코를 감싸고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괜찮은지 물어보질 못했다.
레스칼이 라실리아를 붙든 채 그 자리에서 멈춰 있었기 때문이었다.
“……폐하. 이제 놓으셔도 됩니다.”
라실리아가 시선을 살짝 돌리며 작게 말했다.
난처했다. 난처해서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자신이 가짜라는 생각으로 황제를 대하는 것과, 진짜 반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속에서 이렇게 안겨 있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제 눈에 고정된 시선과 현란한 금안도 차이가 심했다. 낮은 숨소리와 살갗으로 전해지는 체온도 마찬가지였다.
그전까지는 부담스럽기만 하던 시선이 지금은 그가 품고 있는 감정을 수선스럽게 속삭이는 듯했다.
처음 봤을 때는 금속처럼 차갑던 금안이 지금은 반대로 너무 뜨거웠다.
“여길 올 줄은 몰랐는데.”
레스칼이 엉뚱한 답을 했다.
중앙 광장은 사후 처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너진 건물을 치우고, 시체를 옮기고, 불을 끄고 부상자들을 추리느라 다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레스칼에게도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겉옷은 벗었는지 셔츠만 입고 윗부분의 단추를 풀었다. 목덜미에 살짝 배어 있는 땀방울과 더러워진 구두가 보였다.
“덜 자란 새를 보냈는데. 그대는 황궁으로 돌아가 안전하게 있으라고.”
“네. 피피가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게……,”
신전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일을 벌인 것 같기에 와야 했다는 라실리아의 말이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이었다.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답을 가로챘다.
“나를 보려고 온 건가?”
“……신전에서, 네?”
“여기로 오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볼 수 있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이유가 없잖아. 이곳은 마족이 다녀갔다는 얘기를 들었을 텐데. 나를 보려는 게 아니라면 그대가 이런 곳에 올 이유는 없다. 그렇지 않아?”
“아니, 그건……,”
그 답도 빼앗겼다.
“그게 맞아. 나를 보려고 왔어.”
레스칼이 덥석 라실리아를 끌어안았다.
“그게……,”
라실리아는 레스칼을 말리지 못했다.
그가 이 상황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어차피 황궁에서 보게 됐을 텐데…….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라 반가운 건가. ……그런데 너무 좋아하잖아. 내가 뭘 한 것도 아닌데.’
사실 라실리아가 뭔가를 한 게 맞았다.
레스칼이 청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그를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었지만 지금 레스칼에게 이유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을 떠나려고 했던 황후가 곁에 남았다. 대가는 이혼이었다. 대륙 공용문에서 가장 끔찍한 글자를 고르라면 반드시 이혼이 될 것이다.
물론 이혼 같은 건 절대 없겠지만, 황후의 입에서 그 끔찍한 말이 나왔다는 건 여전히 심장이 섬뜩했다.
그 뒤로 황후는 며칠 간 자신을 피했다. 혹시 이혼을 해달라는 청을 들어주지 않아서 그런 건지, 여전히 이혼을 바라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매 순간이 살얼음 위였다.
그래서 오늘 일은 레스칼에게 의미가 컸다.
“기분이 너무 좋아.”
“아…….”
라실리아가 놓아달라는 말을 하지 못한 채 손가락을 꾸물거렸다.
숨 막히게 끌어안고 있는 황제가 여전히 부담스럽기는 해도 이전처럼 낯선 것만은 아니었다. 이러다 이렇게 안기는 게 익숙해질까 봐 걱정스러웠다.
‘내가 진짜 반려가 맞는다면 이게 당연하겠지만……. 하지만 황제는 나를 죽이게 되어 있는데.’
이렇게 기뻐하는 황제를 보면 그가 자신을 죽일 거라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고작 이런 운명 따위는 필요없다며 차갑게 돌아서는 모습도 도무지 연상이 되질 않았다.
그래도 지금 그를 밀쳐낼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게 조금 두려웠다.
그 어떤 일을 겪더라도 마족의 피를 이은 자를 사랑하게 되는 것, 그게 반려의 운명인 것 같아서.
“삐이이…….”
피피가 자신만 혼자 놔두지 말라며 두 사람 사이에 억지로 끼어들었다.
라실리아의 품으로 파고들려는 피피를 레스칼이 한 손으로 잡아채 옆으로 던졌다.
“너는 빠져.”
“삐!”
순식간에 내던져진 피피가 날개를 펼치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폐하. 너무하셨습니다.”
핑계가 생겨서 다행이었다.
라실리아가 레스칼을 밀어냈다.
레스칼은 그만이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절대로 먼저 자신을 놓아주지 않았다.
“놓으세요, 이제. 피피가 화를 낼 것 같습니다.”
“……지금, 놓으라고?”
“네.”
“그대가 먼저 나를 찾았는데.”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삐!”
그 말이 맞다며 피피가 옆으로 날아와 일부러 거세게 날개를 파닥거렸다.
“……그리고 저 덜 자란 새는 원래 아무 때나 화를 내잖아. 번번이 달래 줄 필요 없어. 어차피 또 화를 낼 테니.”
“삐! 삐이!”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며 피피가 버럭 화를 냈다.
“봐. 저런 식이다.”
“삐! 피잇!”
피피의 날갯짓이 거세졌다. 그러나 죽을힘을 다해 날개를 저어대도 아직 몸집이 작아 그저 귀엽기만 할 뿐이었다.
레스칼은 여전히 라실리아를 꼭 끌어안은 채 피피에게 눈짓을 했다.
“시끄러우니 조용히 해.”
“삐! 삐비잇!”
“억울하면 자라든가.”
“피! 피이!”
저러다 피피가 목이라도 상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만둬, 피피. 네가 이유도 없이 화를 내지 않는다는 건 내가 알아. 그리고 폐하도 그만하십시오. 피피를 상대로 싸우실 필요는 없습니다.”
레스칼이 눈동자를 한 바퀴 굴렸다.
그건 난처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라실리아에게 자신을 너무 한심하게 여기지 말아 달라는 의미도 포함이었다.
“싸운 건 아닌데.”
“싸우고 계셨습니다.”
“시끄러운 새에게 주의를 줬을 뿐이다.”
“네. 피피에게는 고작 그런 일이 아니니 싸움이 됐고요.”
“……내 의도는 아니었어.”
“그렇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젠 놓아주세요.”
눈동자가 다시 느리게 굴렀다.
“꼭…… 놓아야 하나? 그대가 나를 찾아온 건데.”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 그렇긴 해.”
느릿느릿, 손이 풀렸다.
라실리아가 앞으로 걸어나가 처참하게 무너진 주변의 광경을 마주했다.
“피해가 크군요. 수습하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습니다.”
“아니. 마법사들을 동원하면 돼. 일단 부상자를 찾은 뒤 회복 마법을 쓸 것이다.”
“아, 그런 방법이 있군요. 다행입니다.”
부상자를 전부 찾는 데는 두어 시간 정도가 더 소요되었다. 피피가 새들을 불러 부상자를 찾게 해 시간을 많이 아낄 수 있었다.
그 이후에는 길드 소속의 마법사들이 전부 달려와 복원 마법진을 그렸다.
그 덕에 새벽 무렵에는 중앙 광장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미 죽은 이들을 되살릴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겉으로는 똑같아 보이는 중앙 광장에는 슬픔과 탄식이 허공을 맴돌았다.
그 속에서 누구보다 빨리 움직인 이들이 있었다.
은의 방패와 리얀이 이끄는 근위대 정예 기사들이 하리오스 신전을 향했다. 기습이나 다를 바 없는 신속한 대응이었다.
* * *
기습은 실패였다.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두 눈으로 보면서도.”
황실에서 신전을 공격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정치적 부담이 큰 문제였다.
신전과 연줄을 대고 있는 귀족들의 반발도 거셀 것이고, 신실히 신을 믿는 제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 것이다.
그래도 마족의 등장에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마족과 신전의 연관성을 확정지을 증거는 신전을 뒤지면 나올 것이라는 생각에 기습을 감행했다.
하지만 실패였다.
“그 시체들……. 그런 게 마족입니까?”
리얀이 빈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하리오스 대신전에서 발견한 것은 마족의 흔적이 아니라 한 무더기의 시체였다.
신관들이 죽어 있었다. 신전 곳곳에 혼잡하게 뒤엉켜 있는 시체들은 무참하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신전을 떠나기 전 의식을 빼앗았을 겁니다. 서로를 죽고 죽이도록.”
리얀과 함께 신전에 다녀온 데칸도 표정에 남아 있는 충격을 내내 지워 없애지 못했다.
“어떤 단서도 찾지 못하게 하려고 입막음을 한 걸까요……. 그래도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짓이긴 합니다. 마족의 그 방식이.”
레스칼이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블루문에 깨어나는 마족의 본능을 떠올리면 자신도 마족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만 제 피에는 주인이 있었다. 자신을 종속시킨 반려를 향한 갈증이 다른 모든 본능을 억눌렀다.
갑자기 나타난 마족은 자신에게서 반려의 존재를 없애려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고발장으로 황후를 끌어들인 짓을 보면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을 마족으로만 남기려는 것이었다.
그 이유까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황후에게 가겠다.”
누군가 제 반려에게 손을 댄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레스칼은 열이 끓어올랐다.
곁에 두고 어디든 제 몸을 묶어 두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눈을 감지 않을 것이다. 눈을 감는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므로.
“황후궁은 안전합니다. 마법진을 더 보강했습니다. 수호의 주문도 두 겹으로 완성해 두었습니다.”
“잘했군.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해 둬.”
하지만 레스칼은 벌써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리얀과 데칸이 군말 없이 레스칼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 외에 또 무얼 하길 바라십니까? 마족의 근거지가 될 만한 곳을 추적하려면……,”
“필요 없는 짓이다. 마족은 추적 마법이 통하지 않아.”
“그럼 이대로 다시 나타나길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아마도……. ……아니, 놈의 사람들을 쫓아. 사람이라면 통할 테니.”
“네? 마족의 사람들이요? 신관들을 전부 죽이지 않았습니다.”
레스칼의 금안이 기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그림자 기사들은 그가 절반은 인간과 다른 존재임을 새삼 확인했다.
“말리크의 기사단.”
“엇, 네?”
뜻밖의 말에 리얀과 데칸은 걸음이 꼬일 뻔했다.
“말리크의 기사단이라니. 놈들은 마족과 싸우던 말리크의 잔당들 아닙니까? 마족하고 손을 잡을 이유가 없을 텐데요.”
“예전 일이야. 칠백 년이라면 쓸모도 없는 적대감은 사라지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렇다고 해도……,”
“시체를 다시 확인해. 신관과 말리크의 기사단을 구분 지을 만한 게 있겠지. 시체가 전부 신관들이라면 마족과 기사단의 연관성을 따져 볼 수 있는 문제다.”
리얀이 미간을 모은 채 턱을 문질렀다.
“으아, 그러면 되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뱀대가리들이 마족과 손을 잡았다고 하면……. 아니, 물론 정신머리를 빼앗긴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하여간 괴상한 고대 마법 같은 걸 쓸지도 모른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데칸이 말을 보탰다.
“기록이 필요하겠군요. 고대 마법과 말리크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레스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위대를 준비시켜. 앞으로 뭘 상대하게 될지 모르니까.”
“으…… 알겠습니다.”
긴장이 팽팽히 섞인 대화가 끝날 무렵 레스칼의 걸음도 멎었다.
황후의 방 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