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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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의도
2023.03.22.
“불사조님이 뭐라고 하는 겁니까, 황후 폐하?”
세르벤이 성급하게 물었다.
불사조가 미친 듯이 달리는 마차를 따라잡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머릿속에 온갖 불길한 상상들이 휘몰아치고 있다는 게 표정으로 보였다.
“변이한 폐하가 수도를 헤집고 계시다는 것보다 더 나쁜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예?”
“아니……. 그렇지 않아.”
“그럼 뭡니까? 으아, 제발……. 말씀해 주십시오. 못난 말이라는 것은 알지만 지금 제 심장이 터질 것 같습니다.”
세르벤이 정말로 가슴께를 문지르며 라실리아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솔직하게 불안을 드러내는 자신의 행동이 적절하지 못한 것 같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게 잘못됐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때부터일 것이다. 황실 재단사가 부린 무슨 수작에 걸려 의식의 일부를 빼앗겼던 때.
황후가 제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자신의 의식을 다시 돌려준 그때 이후로 세르벤은 황후 앞에서 무언가를 숨길 수가 없게 되었다.
의도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별로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신을 그렇게 들여다본 사람에게서 무얼 숨긴다는 게 별 의미가 없는 일 같았다.
세르벤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가 지녔던 황후에 대한 반감은 그날 이후로 눈 녹듯이 사라져 있었다.
“폐하께서 변이하신 게 아니라는군.”
“……네?”
“그게 사실입니까?”
그림자 기사 둘이 동시에 비슷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라실리아만큼 어이가 없다는 식었다.
“그럼…… 아니, 그럼 그게 뭐라는 겁니까?”
“마족일 것이다.”
“마족…… 또 다른 마족이 나타났다는 겁니까?”
“그런 것 같아.”
라실리아가 데칸과 눈을 마주쳤다.
우려가 실제가 되었다. 황실 재단사와 피엘리온 공작의 의식을 가져간 마족이 존재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께서 근위대를 이끌고 가셨다니 사람들이 마족의 존재를 혼동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건 다행이야.”
“삐!”
피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다행이란 말은 너무 낙관적인 말이었다.
데칸이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내뱉었다.
“마족의 출현이라……. 제국에 혼란이 닥치겠군요. 그것도 거대한.”
아무도 데칸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 * *
“……아, 빠르기도 하지.”
검은 날개를 전부 펼치면 광장 하나 정도는 밤처럼 어둡게 만들어 버릴 수 있을 정도였다.
수도 중앙 광장의 탑 끝에 서서 날개를 펼친 마족이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을 응시했다.
똑똑히 보였다.
바하무트의 피를 이은 존재가 말을 타고 달려오는 모습이.
인간과 섞인 꼴이 제법 그럴싸했다. 어처구니없는 노릇이었지만 지금 그는 거의 인간이 다 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림없지, 어림없어.”
마족의 모습을 드러낸 성자 말리크가, 아니 평소에는 성자 말리크의 껍데기를 쓰고 인간을 흉내 내는 마족 하스데야가 손가락 끝을 퉁겼다.
와르르르…….
그러자 광장 근처 어딘가의 건물 하나가 무너져 내렸다.
“꺄악!”
“으아악!”
인간들의 비명과 죽어 가는 숨소리도 이어졌다.
“너도 결국 돌아오게 될 거야, 바하무트.”
퍽, 후드득!
하스데야가 발끝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매끈한 대리석으로 세워 놓은 탑이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했다.
“너를 데려가기 위해 내가 이 귀찮은 짓거리를 벌이고 있으니.”
하스데야가 날개를 퍼덕여 몸을 띄웠다.
동시에 탑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휘익!
하스데야가 저 멀리서 다가오는 근위대와는 반대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 전에 하스데야는 아직 무너지지 않은 건물에 불을 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
톡톡.
이번에는 비둘기였다.
“삐?”
마차 지붕에 앉아 고개를 숙여 창문틀을 조심스레 두들기는 비둘기를 피피가 발견했다.
“하……. 이제는 마차까지.”
데칸이 창문을 열며 별 소용도 없는 우려를 작게 내뱉었다.
역시나 비둘기는 데칸을 본체만체 지나쳐 라실리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피피에게 꾸벅 인사를 하듯 고개를 숙여 보인 비둘기가 라실리아에게 한쪽 발을 내밀었다.
“또 너구나. 수고했어.”
라실리아가 종이를 묶은 끈을 풀어 그것을 데칸에게 건넸다. 비둘기가 은근슬쩍 다가와 라실리아에게 머리를 문지르려고 했다.
“삐!”
그때 피피가 냅다 비둘기의 머리통을 발로 후려쳤다.
“구우!”
비둘기가 화들짝 놀라 우는 소리를 냈다. 피피는 가차 없었다.
“삐! 피이!”
감히 어딜 앉냐고 구박한 피피가 비둘기를 밖으로 쫓아냈다.
“구우…….”
고개를 푹 숙이고 밖으로 나간 비둘기가 마차 지붕에 앉았다.
세르벤은 그 광경을 몹시 흥미롭다는 식으로 쳐다보다 물었다.
“불사조님이 전서구를 싫어하시는데요.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전서구가 그새 뭘 잘못하기라도 한 겁니까?”
“삐!”
피피가 울컥 소리를 질렀다.
이유가 좀 어이없었다. 비둘기가 몹시 무례하다고 했다.
“뭐라고 하시는 겁니까? 제게 답을 하신 것 같긴 한데.”
라실리아가 대답에 앞서 세르벤을 잠시 바라보았다.
“경은 내가 피피의 말을 알아듣는다고 확신하나?”
“음? 당연히 그런 게 아니었습니까?”
세르벤은 진심으로 당황한 눈치였다.
“불사조님은 황후 폐하의 새잖습니까. 서로 말이 안 통한다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닙니까?”
남들의 시선으로 보면 그런 일이었다.
라실리아는 그간 반려라는 오해에 갇히지 않기 위해 해 왔던 노력들이 부질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만 빼고 이미 모두가 자신을 진짜 반려로 여기고 있었다.
라실리아가 짓는 묘한 표정을 알아차린 데칸이 말을 보탰다.
“처음부터 감출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황후 폐하.”
“……그런 것 같아.”
라실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자 세르벤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모양입니다. 혹시 말실수라도 했습니까? 그냥 입을 다물고 있을까요?”
“삐이!”
대답은 피피가 했다.
피피가 날개를 퍼덕이며 계속 화를 냈다. 저 비둘기가 무례한 것을 왜 아무도 모르냐는 식이었다. 라실리아더러 어서 세르벤에게 말을 전해 주라고 난리였다.
라실리아가 피피를 손에 얹고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비둘기가 무례했다고 하는군.”
“아? 그랬습니까? 새들에게도 복잡한 예법 체계가 있는 겁니까?”
“글쎄……. 하지만 나는 비둘기가 어떤 무례를 저질렀는지 모르겠는데.”
“피잇!”
자기가 버젓이 있는데 라실리아에게 찰싹 들러붙은 것도 무례하고 발을 내민 것도 무례하다고 했다.
“그건 밀서를 풀어야 해서 그런 거잖아.”
“삐!”
“새 부리로 어떻게 끈을 풀어. 그건 너도 못 할 텐데.”
“삐잇!”
“전서구라면 그 정도는 알아서 해야 한다니. 그건 너무 가혹해.”
“삣! 삐핏!”
피피가 팩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엉덩이는 여전히 라실리아의 손등에 붙이고 있어 마냥 삐치기만 한 건 아닌 듯했다.
“그게…… 꼭 누구 같습니다…….”
세르벤이 한숨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폐하께서 새끼 새가 된다면 꼭 저렇겠…… 아니, 실언했습니다. 이 말은 못 들은 걸로 해 주십시오.”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인 세르벤이 데칸을 끌어와 화제를 바꾸었다.
“밀서는 다 봤어? 이번에는 무슨 일이래? 상황이 심각해졌나?”
“그게……. 아닙니다. 이대로 황궁으로 돌아가면 될 것 같습니다.”
“음? 마족은?”
“사라졌답니다. 근위대가 나타나기 전에.”
“뭐야……. 간만 봤다는 건가? 아니, 마족인데?”
“뭐가 됐든 황실과 정면으로 맞설 생각은 아니었다는 뜻 같습니다.”
“그럼 겁만 주려던 건가. 뭔가 좀 석연찮은데.”
라실리아가 물었다.
“모습만 드러내고 사라진 건가? 아니면 다른 짓도 했나?”
“중앙 광장 쪽에 피해가 있는 모양입니다. 죽은 사람이 몇 있다고 합니다. 마족이 한 짓치고 아주 큰 참사는 아니라는 의견입니다.”
“그래도 가족을 잃은 자들의 마음은 다를 것이다. 화를 내고 원망할 곳이 필요할 테지. 그런 자들이 많아지다 보면 황실에 마족의 피가 이어지는 일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다.”
데칸이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르벤도 마찬가지였다.
카르타헤나 황후라면 남들이 어쩌든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기억을 잃은 황후는 성격이 달라졌을 뿐 아니라 예리한 정치 감각도 지녔다.
“제 생각은 다르다는 말씀은 드릴 수가 없겠습니다, 황후 폐하.”
미간을 좁힌 채 생각을 잇던 라실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신전이 황후를 상대로 고발장을 쓴 이유를 알 것 같아.”
그림자 기사들이 귀가 곤두섰다.
“그게 뭡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피!”
좁혀진 미간이 무거워 보였다.
기분 탓인지 제 목소리가 평소보다 무게를 더해 나직하게 들려왔다.
“표식이 사라지고, 황후는 그 사실을 사 년간이나 감춰 온 사실이 드러났는데 때마침 마족이 나타나 사람을 죽였다고 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무얼 의심할까.”
데칸과 세르벤의 표정이 굳었다.
“폐하를 의심하겠군요. 피를 종속하지 못해 마족의 모습이 드러났다고.”
정답이었다.
신전이 노린 것은 황후의 명예 따위가 아니었다.
고발장과 재판은 처음부터 이목을 끌기 위해서였다. 표식이 사라졌음을 알리고 결국 황제에게 화살을 돌릴 수단이었다.
“그렇다면…… 마족의 출현은 이제 시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황제와 반려의 운명 위에서.
* * *
“도착했습니다, 황후 폐하. 그런데 정말 내리시겠습니까?”
마차가 멈췄다.
그러나 황궁이 아니라 마족으로 인한 참사가 일어났던 수도의 중앙 광장 근처였다.
“모습을 감췄다고는 하나 마족이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도 필요한 일이다.”
라실리아가 마차 문을 눈으로 가리켰다.
“표식이 없는 황후가 황실의 약점이 될 수 있다면, 그렇게 놔둘 수는 없어. 내가 폐하의 곁에 있는 모습을 드러내는 게 좋을 것이다.”
세르벤이 마차 문을 열기 전 잠깐 한숨을 쉬었다.
“백번이라도 동의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만, 저는 폐하의 반응이 조금 걱정스럽습니다. 제가 이런 곳으로 황후 폐하를 모시고 온 것을 알면 제게 화를 내실 것 같습니다. 저는 가뜩이나 강등 상태인데 폐하께서 화를 내시면……. 아니, 이 말은 너무 투정 같군요.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문을 열겠습니다.”
세르벤은 자신이 너무 말이 많았다는 것을 깨닫고 머쓱하게 입을 다물었다.
덜컥.
마차 문이 열렸다.
먼저 내린 세르벤이 라실리아를 향해 돌아서서 손을 내밀었다.
“내리십시오. 발판이 좁으니 굽을 조심하십시오.”
“그러지. 그리고 폐하는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네?”
라실리아의 손을 쥔 채 세르벤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곳으로 오자고 고집한 것은 나니까 그렇게 말씀을 드리겠다. 경에게 화를 내시지 않도록.”
그러자 세르벤은 당황한 사람처럼 라실리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왜 그러지?”
“네? 아, 아니…… 그게…… 무심결에 나온 말인데 신경을 써 주셔서 그게……,”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고, 그래서 자신을 놀라게 했고, 그런데 그게 왠지 너무 다정하게 들려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말을 세르벤이 제대로 하지 못해 우물대던 순간이었다.
“그 손 놔.”
갑자기 들려오는 레스칼의 목소리에 세르벤이 휙 고개를 돌렸다.
“폐, 폐하? 언제,”
“손.”
“네?”
두 걸음 만에 거리를 좁힌 레스칼이 세르벤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손 놓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