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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떠날 수 없는 이유 (57/96)


57. 떠날 수 없는 이유
2023.03.19.



 
푸드득!

잿빛 비둘기 한 마리가 창문을 두들겼다.


“……뭐라고?”

데칸이 놀라 고개를 홱 돌렸다.

은의 방패에서 보내는 전서구였다. 데칸이 놀란 것은 지정된 장소만 오가는 전서구가 피엘리온 공작저까지 날아왔다는 점이었다.

덜컹!

데칸이 서둘러 창문을 열어 전서구를 맞았다.


“구우우.”

데칸의 손을 피한 비둘기가 훌쩍 방 안으로 들어와 라실리아의 주변을 맴돌았다.

말을 할 줄 아는 새는 아니었다. 그러나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건 알 수 있었다.


“내게 줄 게 있나 보구나.”

“구구.”

라실리아가 손을 내밀자 비둘기가 그 위에 얌전히 발을 올려놓았다. 발목에는 작게 말린 종이가 묶여 있었다.

라실리아는 종이를 묶은 끈을 풀었다. 그리고 종이를 데칸에게 건넸다.


“받도록. 경에게 온 것이니 경이 확인하는 게 맞겠지.”

“아……. 네, 방패가 아니면 확인해서는 안 됩니다.”

종이를 받는 데칸의 표정이 영 떨떠름해 보였다.


“그런데?”

“그걸 새들도 알고 있는데…….”

주술로 엄격하게 훈련한 새였다. 은의 방패가 쓰는 밀서는 정확히 지정된 곳으로만 가야 하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얼굴을 아는 자가 아니라면 편지를 건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라실리아에게는 제 발로 날아가서 얌전히 밀서를 넘겨주었다. 라실리아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은 오늘따라 왠지 초롱초롱해 보이고 그랬다.


“내게 친근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는 말 같군.”

“정확합니다. ……하지만 제 능력을 넘어서는 일인 모양입니다.”

비둘기가 라실리아에게 조심조심 제 머리를 비비는 것을 본 데칸이 잠깐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좋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적이 전서구를 날리는 경우라면 황후 폐하께서 계시는 한 손쉽게 정보를 가로챌 수 있을 테니까요.”

라실리아는 쓴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확인하겠습니다.”

데칸이 얇게 말린 종이를 펼쳤다.

그 안에는 은의 방패 소속 기사들만 읽을 수 있는 은어가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이럴 수가!”

다 읽고 난 데칸이 종이를 구겼다. 주먹을 쥐어 구긴다 싶었던 종이가 손을 펴자 그대로 재가 되어 사라졌다.


“지금 즉시 돌아가야 합니다, 황후 폐하.”

밀서가 심각한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무슨 일인데?”

“폐하께서 변이하셨다고 합니다. 그것도 황궁이 아닌 곳에서.”

“뭐라고? 왜 갑자기?”

블루문은 이미 지났다. 황제에게는 마족으로 변이할 이유가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하여간 지금 폐하께는 황후 폐하가 필요합니다.”

이전이라면 망설였을 것이다. 가짜인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었다.

자신이 진짜인지 아닌지 하는 갈등보다는, 어서 가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길을 안내해.”

“네, 황후 폐하. 걸음을 서두르겠습니다.”

라실리아는 아예 드레스 자락을 손에 감아쥐고 달리기 시작했다.

* * *



“미친!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은의 방패가 기민하게 움직였다. 황궁에서도 벌써 황제가 변이한 채 수도를 헤집고 다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레스칼이 지금 황실 인장을 성의 없이 찍어대다 말고 밀서를 읽어 내린 리얀을 쳐다본다는 것을 제외하면, 은의 방패가 신속히 움직인 연락망에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폐하……?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요?”

“내가 변이를 해?”

“그러니까요. 언제 하셨습니까? 아니, 왜요?”

“……변이를 하면, 황후가 오니까?”

“네?”

황후가 자리를 비운 지 벌써 반나절이나 지났다.

레스칼은 십 분에 한 번씩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서성대다 결국 황후궁으로 자리를 옮겼다.

황후궁의 응접실이 그대로 집무실이 되었다. 알현도 여기서 하고 황실 비서관이나 궁내관도 여기로 불러들였다.

일부러 미뤘던 일까지 성둥성둥 해치웠는데도 황후는 아직 돌아온다는 말이 없었다.

변이를 하면 황후가 온다는 말은, 그렇게 해서라도 돌아오게 만들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봤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레스칼이 그 말을 꺼내는 순간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변했다.

수도에 마족이 등장했다. 은의 방패가 그 사실을 알고 연락망을 움직였다.

황후에게는 데칸이 붙어 있었으니 가장 먼저 연락이 갔을 것이다. 레스칼이 변이했을 거라고 믿는 황후는…….

쾅!

레스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덜 자란 새는 지금 어디 있지? 황후를 따라갔나?”

“아, 불사조님이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황후궁의 시녀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서둘러. 그리고 근위대를,”

“물론입니다, 폐하.”

은의 방패가 움직였으니 마족이 나타났다는 장소로 이미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황실 경비대가 그쪽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러나 레스칼은 자신이 직접 근위대를 이끌고 움직일 생각이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변이를 한 제 모습이라고 했다. 그게 자신이 아니라면 대륙에 또 다른 마족이 나타났다는 말이었다.

그는 이제 막 진짜 반려를 찾아 그 존재를 느끼는 중이었다. 그런데 마치 그때를 노렸다는 것처럼, 그와 반려를 떼어놓으려는 것 같은 시도가 이어졌다.

신전이 표식으로 시비를 걸더니 이번에는 자신인 척하는 마족이 등장했다.

정작 황후는 자신이 반려라는 자각도 없었고 아직 그를 받아들여 주지도 않았다.

매일이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은 이 상황에서 자꾸만 방해가 생겨났다. 기분이 멀쩡할 리 없었다.


“후우…….”

숨을 쉬자 온몸의 감각이 한껏 예민하게 달아올랐다.

손톱 끝이 약간 붉은 기를 띠었다. 레스칼은 여기서 한 발자국만 더 나가면 변이가 시작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일단은.”

일단은 참을 수 있었다.

아직은 황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니었으니까.


“폐하!”

이베트를 부르기 위해 사라졌던 리얀이 이베트와 함께 나타났다.

이베트는 두 손으로 자그마한 불사조를 받쳐 들고 있었다. 깃털이 반쯤 젖어 있는 걸로 보아 팔자 좋게 목욕이라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네가 뭘 해야 되는지는 알겠지.”

피피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레스칼이 내뱉듯이 말했다.


“삐!”

피피가 비장한 얼굴로 몸에 남은 물기를 털었다.


 
알겠다는 뜻이었다.

피피는 행여나 라실리아가 다른 마족에게 유인당하는 일이 없도록 어서 날아가 상황을 알려주어야 했다.


“미적대지 말고 당장 날아가.”

“삐! 삐이!”

뭐라고 성질을 부려 댄 피피가 파드득 날아올랐다.


“피이!”

창문으로 날아간 피피가 소리를 지르자 곧 하늘 가득 새 떼가 날아왔다. 피피는 그중에서 날개가 가장 튼튼해 보이는 매에 올라탔다.


“삐!”

피피를 태운 매가 순식간에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동시에 새들도 그 뒤를 따라 사라졌다.

리얀이 그 뒤에 대고 소리 없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저렇게 조그마해도 불사조는 불사조였다. 이쪽 편이 될 때는 엄청나게 든든했다.


“근위대도 준비가 끝났습니다, 폐하. 칼과 갑옷은 말을 타는 곳에 가져다 두었습니다.”

“지금 간다.”

“네.”

 

잠시 후, 근위대 1대가 전부 말을 타고 황궁의 정문을 나섰다.

푸른 갑옷에 매단 황금색 술이 같은 색의 깃발과 함께 바람을 가르는 광경은 몹시 인상적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존재는 역시나 선두에 선 황제였다.

* * *



“너무 오래 떨어져 계셨던 게 문제였을 것 같습니다.”

세르벤은 진지했다.


“황궁을 떠나오신 지 벌써 다섯 시간이 넘었으니까요. 폐하께서 어느 순간 인내심을 잃으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결코 농담을 하는 게 아니었다.

재판이 무산된 그 날 이후, 레스칼은 사흘 동안 한순간도 자지 않았다.

마족의 피가 섞인 몸은 평범한 인간과 다르다는 것은 알았다. 그걸 감안해도 너무 심했다. 레스칼은 온 신경을 황후궁을 향해 곤두세우고 있었다.

추적 마법진을 일곱 개나 설치해 뒀어도 안심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마법진이 일곱 개인 이유는, 똑같은 마법을 그 이상 그리면 마나가 엉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그런 위험이 없었다면 마법진이 칠십 개가 됐을지 칠백 개가 됐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스칼은 피엘리온 가에 혼자 다녀오겠다는 황후의 청을 받아들였다.

황후의 눈 밖에 나는 짓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집무실에 가만히 앉아 점점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있는 게 눈에 보이는 레스칼과, 그런 레스칼을 보며 마른침을 삼키고 있을 리얀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아니, 그러다 못해 레스칼이 변이를 겪고 뛰쳐나왔을 것이다.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돌아가시기만 하면 될 겁니다.”

진지하던 표정이 초조해졌다.

그래서 빨리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말은 사실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폐하가 변이한 모습을 들키면 안 된다는 법은? 이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 거지?”

라실리아가 물었다.


“그건……,”

세르벤이 곤란했던지 데칸을 쳐다보았다.

데칸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주술로 기억을 지우는 시도를 해 볼 수는 있습니다. 다만 인원이 너무 많아 저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경우 다른 방법을 써야 할 겁니다.”

라실리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른 방법이란 죽여서 목격자를 없애야 한다는 뜻이었다.


“민심이라는 게 있을 텐데. 그렇게 된다면 황실을 향한 반발이 있지 않을까?”

“그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더군다나 요즘은 신전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황후 폐하의 표식이 사라졌다는 고발장을 쓴 곳이니 그걸 문제 삼아 폐하의 변이까지 황후 폐하께 책임을 지우려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모로 큰 문제가 되겠군.”

“그렇습니다, 황후 폐하.”

새삼 반려가 지녀야 하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내가 만일 진짜라면…… 나는 절대 떠나지 못할 거야.’

고작 몇 시간 떨어져 있었다고 변이까지 겪는 황제를 외면하진 못할 것이다.

라실리아가 두 손을 움켜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한시라도 빨리 가는 게 목격자를 한 명이라도 줄이는 일이 되겠지. 마차를 더 빨리 몰라고 해 줘.”

“네, 황후 폐하.”

두두두두!

마부가 속도를 높였다. 그만큼 흔들림도 심해졌다.

그래서 하마터면 창문을 두들기는 작은 소리를 놓칠 뻔했다.


“삐! 삐이!”

“아…… 피피?”

“삐!”

마차의 속도가 너무 빨라 피피가 작은 날개로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마차가 보이기에 매에서 내렸는데, 갑자기 마차가 빨라졌다고 했다.


“제가 열겠습니다.”

데칸이 서둘러 창문을 열었다. 안에서 밖으로 밀게 되어 있는 창문이라 피피가 하마터면 창틀에 머리를 부딪칠 뻔했다.


“삐!”

피피가 성질을 푹 내며 라실리아의 무릎으로 툭 뛰어내렸다.


“어쩐 일이야, 피피?”

“피? 피…… 삐! 삐이잇!”

“음?”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라실리아는 어이가 없었다.


“그게 정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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