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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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정체
2023.03.15.
덜컹!
마차가 멎었다.
“피엘리온 공작저에 도착했습니다, 황후 폐하.”
하필 마차에서 내릴 때가 되었다.
“황후 폐하.”
라실리아가 드레스 자락을 꽉 쥔 채 아무 말이 없자 데칸이 시선을 보내왔다.
“…….”
물 같은 시선이 제 얼굴을 비추었다.
그게 꼭 피하지 말고 자신을 마주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누군지, 뭘 원하는지. 더는 숨지 말고 마주 보라고.
“문을 열어도 되겠습니까, 황후 폐하?”
마차 밖에서 근위대가 물었다. 라실리아는 대답을 하기 전 데칸에게 빠르게 말을 건넸다.
“한 가지 묻지.”
“네, 황후 폐하.”
“내가 델라르타를 그리워할지도 모른다는 건 경의 짐작인가, 아니면 폐하의 의중인가.”
“제가 드리는 말씀은 그 어떤 것도 폐하의 뜻을 앞서거나 거스르지 못합니다.”
“그러니 폐하의 뜻이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것으로 알 수 있었다.
황제는 자신이 카르타헤나 황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진짜 반려임을 믿고 있었다.
‘카르타헤나 황후는 표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표식은 혼인 이후로 점차 사라졌고……. 표식을 되돌리는 주술을 쓴 직후 내가 황후의 몸으로 되살아난 거야.’
그건 정말로 자신이 원래 진짜 반려임을 의미하는 걸까.
주술은 표식을 카르타헤나 황후에게 되돌리는 게 아니라 진짜 반려에게 돌려주었던 걸까.
라실리아는 자신이 눈을 뜬 직후 들려오던 새들의 속삭임을 기억했다.
-진짜야. 진짜가 왔어.
-그럼 이제 그분도 오시는 거야.
그 진짜라는 게 자신이라면. 그리고 그분은 새들의 왕인 피피를 의미한다면.
터무니없는 상황들이 이상하게도 하나씩 맞물려 증거가 되어 가고 있었다.
‘표식을 확인해야겠군.’
제 생각이 맞다면 지워져 간다던 표식이 돌아와 있을 것이다.
황제는 아예 표식의 유무도 상관하지 않는 듯했지만 라실리아의 입장에서는 달랐다. 표식은 지금 자신이 누군지 말해 주는 해답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폐하의 뜻을 알겠다.”
라실리아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런 뒤 마차 밖을 향해 말했다.
“문을 열도록.”
“네, 황후 폐하.”
탁.
마차 문이 열리고, 피엘리온 공작저가 눈앞에 드러났다.
* * *
수도에서 황궁을 제외하고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라 칭송받던 공작저는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화려하고 텅 빈, 거대한 무덤 같았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고용인들이 모두 나와 라실리아를 맞이했지만 도무지 환대라는 느낌은 나지 않았다.
공작저는 그저 무겁고 음울할 뿐이었다.
“너무 가까이는 가지 마십시오, 황후 폐하.”
공작의 침실로 안내받은 라실리아는 데칸을 제외한 모두를 물렸다.
피엘리온 공작이 황실 재단사처럼 의식의 일부를 빼앗긴 게 맞다면 공연히 다른 사람들까지 휘말릴 수 있었다.
침대에 눈을 뜬 시체처럼 누워 있는 공작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자, 데칸은 재빨리 라실리아의 몸에 대고 주문을 외웠다. 수호의 주문이라고 했다.
“눈이 충혈되어 있어. ……황실 재단사보다 심한 것 같아.”
공작을 살펴본 라실리아가 말했다.
“황실 재단사도 계속 증세가 심해졌습니다. 나중에는 눈이 녹아내렸다고 했습니다.”
“이런.”
라실리아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피엘리온 소공작의 말에 의하면 신전에 다녀오고 난 뒤 공작이 이상해졌다고 했다. 그렇다면 역시 범인은 신전에 있다는 소리겠지.”
“그 외에 다른 답은 없을 것 같습니다. 신전 내부에 뭔가가 있는 겁니다. 감히 황실에 해를 끼치고자 하는 무언가가.”
공작은 초점이 없는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한쪽 입가로 침을 흘리고 있었다.
처참한 모습이었다.
멀쩡한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힘이 저 밖 어딘가에 있는 이상 이런 일은 계속 벌어질 것이다.
“치유력을 가진 신관을 부를 수는 없는 건가?”
“황실 재단사에게도 신관의 치유력은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병이 아니라 그럴 겁니다.”
표정이 저도 모르게 써졌다.
“마법도 주술도 아닌 그 힘으로 인한 병이라서 그렇다는 말이겠군.”
“맞습니다. 마법과 주술과 신성력이 서로 개입할 수 없는 것처럼, 이 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쩐지 공작이 이렇게 된 일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말로 들렸다.
라실리아가 안쓰러운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피엘리온 공이 신전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자책하시는 겁니까?”
“아무래도.”
데칸이 라실리아의 표정을 찬찬히 살피다 입을 열었다.
“혹시 제가 전에 드린 말씀, 기억하십니까?”
“무슨 말을?”
“이 힘에 의해 의지를 빼앗긴 시그레스 경과 슈라이든 공녀를 황후 폐하께서 어떻게 되돌리셨는지 물었습니다.”
“나는 아는 바가 없다고 답했다.”
“네, 그러셨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경은 내게 피엘리온 공을 회복시킬 능력이 있다고 보는 건가?”
“네. 그게 아니라면 시그레스 경과 슈라이든 공녀가 무사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
라실리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두 사람이 제 목소리에 반응했던 순간은 기억했다. 하지만 그게 자신이 가진 어떤 특별한 능력이라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틀림없다고 믿고 있었던 많은 것들이 흔들리는 시점이었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꿈을 꾸었다.
마족의 힘 일부가 제게 전해지는, 이상한 꿈을.
그 꿈을 꾸고 난 직후 이베트가 속으로 하는 생각이 보였다. 그때는 착각이라 여겼지만 나중에는 피엘리온 소공작의 마음도 보였다.
두 번은 우연이 될 수 없었다.
“경이 그렇게 확신하는 건 내가 폐하의 반려라 믿고 있기 때문인가? 최초의 반려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나?”
라실리아가 묻자 데칸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최초의 반려에 대한 얘기는 많지만 그중 정확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뛰어난 주술사였다는 것, 그리고 불사조의 비호를 받았다는 것 정도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최초의 반려에게는 거짓말이 통하지 않았다는 기록은 여러 개가 남아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을 조종했다는 말은 없었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 같다는 말은 있습니다.”
“……그렇군.”
확실해졌다.
자신이 꾼 그 꿈은 마족과 최초의 반려에 관한 것이었다.
꿈속에서는 자신이 반려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정도의 감화가 일어났다는 것은 자신이 반려와 무관하지 않다는 뜻인 듯했다.
갑자기 허리 아래가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혹시…… 표식 때문일까. 표식이 돌아온 걸까.’
볼 수는 없었지만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실리아가 손을 쥔 채 눈을 꾹 감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직도 자신이 제국이나 황제의 반려 같은 일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게 더 말이 되는 것 같았지만,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그렇지 않다고 외쳐 대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제 꿈조차 그러고 있었다.
황후의 몸으로 되살아난 뒤로 라실리아는 예지몽을 꾸지 않았다. 라실리아가 꾸는 것은 머나먼 과거에 벌어졌던 일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을 예언자라 할 수 있는 걸까.
델라르타 왕국의 예언자는 그때 꿈지기의 칼에 찔려 죽고, 지금의 자신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린 걸까.
망자들의 땅에서 길을 찾아 주는 영혼의 실타래가 제 것만 꼬여 버린 걸까. 그래서 아직도 길을 찾지 못하고 자신을 예언자라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라실리아가 감았던 눈을 떴다.
길을 잃었다면 다시 찾아야 했다.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의 의미를 하나씩 찾는 것. 그게 길을 찾는 단서일지도 몰랐다.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힘은 마족에게서 온 것이다. 피를 종속하며 전이된 것이다.”
“……황후 폐하?”
라실리아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지 오히려 데칸이 놀란 눈치였다.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가 모르는 것을 보면 기록에는 남지 않은 일일 텐데……,”
“의도치 않게 사람의 마음을 읽은 적이 있었어. 두 번.”
“두 번…….”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선명하고, 가진 힘이라고 부르자니 미약한 상태지. 그래서 그 두 사람을 되돌린 게 내가 지닌 힘이었는지는 나도 확신할 수 없다.”
데칸은 라실리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비교적 최근에 생긴 일이고, 어떤 일인지 정확히 알지 못해 혼란스러우셨다는 말로 들립니다.”
“경이 맞아. 나는 내게 닥친 일들이 버겁다. 그 일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도 알지 못해. 이 힘도 마찬가지다. 내게 주어진 힘이 맞는지도 알 수 없지만,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잔잔한 물결 같은 데칸의 눈은 라실리아의 혼란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데칸이 침대에 누운 피엘리온 공작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피엘리온 공에게 시도해 보십시오. 적어도 결과는 알 수 있을 겁니다.”
“부정할 수 없는 말이로군.”
라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피엘리온 공작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했던 것처럼 어깨를 잡고 혼탁해진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어떻게 했더라…….’
간절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제발 평소처럼 돌아오길, 그래서 모두가 무사하길 바랐을 것이다.
“지금 공의 의식을 붙잡고 있는 그것을 공의 손으로 놓기를. 나는 공이 어서 돌아오기를 바란다.”
그때처럼 목소리가 이상해졌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 같기도 했고, 심장에서 밀려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낮게, 하지만 아주 멀리 번져 가는 잔잔한 파도 같았다.
“아…….”
데칸이 작게 감탄사를 토하며 라실리아를 바라보았다.
“우, 우우……! 우으흐!”
공작이 갑자기 두 손을 마구 내저으며 경련을 일으켰다.
“황후 폐하!”
데칸이 재빨리 달려들어 라실리아의 어깨를 잡아 공작의 몸에서 떼어냈다.
“우, 우우! ……으아…… 커헉!”
이리저리 몸을 비틀던 공작이 까맣게 색이 죽은 피를 토했다.
“피엘리온 공!”
피를 토한 공작이 털썩, 몸을 눕히더니 스스로 눈을 감았다.
이불에는 핏자국으로 붉은 얼룩이 졌지만 희한하게도 공작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넋이 나간 듯 침을 흘려대지도 않았다.
데칸이 공작의 목덜미에 손을 얹어 체온과 맥박을 확인했다.
“달리 이상은 없어 보입니다. 그래도 모르니 의사를 불러와야겠군요.”
“그래. 그게 좋겠어. 그럼 이제 피엘리온 공은…….”
“제 눈에는 충분히 달라진 것처럼 보입니다. 몸에서 다른 기운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피엘리온 공이 깨어나야 확실히 알 수 있겠지만, 이것만으로도 황후 폐하께 마족의 능력이 전이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게…… 아니, 잠깐.”
무언가를 깨달은 라실리아가 데칸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왜 그러십니까, 황후 폐하?”
“이게 정말 마족의 힘이라면……,”
라실리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쩌면 자신이 진짜 반려인지 아닌지 하는 것보다 이쪽이 더 큰 문제일지도 몰랐다.
“황실 재단사와 피엘리온 공의 의식을 가져간 신전의 누군가도 마족의 힘을 지녔다는 얘기가 되지 않나?”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