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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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혼란
2023.03.12.
재판의 여파는 상당했다.
재판이 열리진 않았지만 황후가 진짜 반려가 아니라는 소문이 수도에 번져 나가는 중이라고 했다.
소문을 의식해서인지 피엘리온 가는 침묵 속에 정문을 닫아걸었다. 모든 사교 행사를 취소하고 일족 모두가 외출을 삼갔다.
젊은 소공작의 모습은 수도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었고 피엘리온 공작은 아예 침실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소문이 잠잠해질 때를 두고 보는 중이라 했지만, 실상은 그것보다 훨씬 나빴다.
피엘리온 소공작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졌고 공작은 이지를 상실한 채 침대 신세가 되었다. 의식을 일부 빼앗겼던 황실 재단사의 모습과 똑같았다.
“이 정도면 될까요, 황후 폐하?”
“그래……. 수고했어.”
“별 말씀을요.”
라실리아는 오늘 외출복을 입었다. 마차에 타고 내리기 좋게 치맛단이 좀 더 짧았고, 세공이 화려한 구두 대신 밑창이 두껍고 편한 부츠를 신었다.
다른 장식 또한 간소했다.
병문안이라는 목적에 맞게 이베트는 단정하고 수수한 차림새를 갖추게 해 주었다.
“마음이 많이 안 좋으시죠, 황후 폐하.”
긴 검은 머리를 목덜미에서 묶은 리본을 만지작대며 이베트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재판이 무산된 게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소문도 그렇고, 피엘리온 가의 변고도 그렇고요.”
“그러게…….”
“그래도 소문은 곧 잠잠해질 거예요. 재판이 그렇게 된 이후로 오히려 두 분의 관계는 더 돈독해지셨잖아요.”
위로라고 한 말일 테지만 라실리아는 조금 불편해졌다.
관계가 돈독해진 게 맞는 걸까.
‘그보다는 오히려 뭐가 뭔지 모르게 됐다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아니, 생각해 보니 그 말도 맞지 않았다.
뭐가 뭔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쪽은 자신뿐이었다. 자신을 진짜라 믿는 황제의 믿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건지 갈피를 못 잡겠어.’
자신이 진짜라는 건 말도 되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이었지만, 황제가 저렇게 확신하니 오히려 제 생각이 흔들렸다.
한 번 흔들리기 시작하자 외면하던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계속 꾸고 있는 꿈이 그랬다.
자신이 정말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이라면, 왜 자꾸 마족이 꿈에 나오는 걸까. 그리고 꿈을 한 번 꿀 때마다 자신에게는 꿈과 비슷한 일들이 이어졌다.
피피가 태어난 것이 그랬고, 어쩌다 사람들의 속마음이 보이는 것이 그랬다.
하여간 그래서 몹시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표식도 없는 가짜라는 소문이 수도에 번지고 있다지만 그런 건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이제 손은 거의 다 나으셨어요. 그래도 다시 연고를 발라 드릴게요. 흉이 지면 안 되니까요.”
빗질까지 전부 마친 이베트가 마지막으로 장갑을 끼우기 전에 연고통을 꺼내 들었다.
재판이 있던 날 황제의 비늘에 긁혀 만들어진 상처였다.
그러고 보니 피피가 내뱉은 불꽃에 화상을 입었던 그 자리였다.
“아……?”
“음? 왜 그러세요, 황후 폐하?”
라실리아가 무심결에 감탄을 내뱉자 이베트가 눈을 둥글게 떴다.
“그게…… 화상이 다 나아서.”
“네? 화상을 입으셨어요? 언제요?”
“며칠 전이었어.”
“그런데 왜 제가 몰랐지요?”
“그건…….”
이베트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빨리 아문 탓이었다.
상처가 빨리 아문 이유도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이곳에 입술을 대서…… 그런 건가.’
상처가 빨리 아물기를 바란다며 황제가 화상 자국에 키스를 했다.
피피가 만든 상처는 자신이 만든 상처와 같으니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뭔가 마족의 피가 상처에 영향을 주는 게 아닐까.
‘아니, 그런 것까지 연관을 짓지 마.’
라실리아가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한 번 의혹이 일자 모든 생각이 그쪽으로 치우쳐 쏠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기분에 기가 찼다.
‘뭐야. 이러면 내가 꼭…… 진짜가 되길 바라고 있는 것 같잖아.’
백번 양보해서 자신이 진짜라고 한다면.
그래서 황제를 사랑하게 되는 걸 피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러면 결국 꿈과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걸까.
-내가 당신의 운명이에요. 당신을 사랑해요.
-그런 게 사랑이라면 내게는 필요 없어.
황제는 왜 더 이상 반려가 필요 없게 된 것일까.
아직 알 수 없는 일이 너무도 많았다.
‘만일 내가 진짜라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거야. 일단 그걸 찾고 나서 생각하자.’
“연고는 다 발랐어요, 황후 폐하. 잠시 기다리셨다가 장갑을 끼시면 됩니다.”
“그래.”
시간을 재고 있기라도 한 듯, 라실리아가 장갑을 낀 그 순간 세르벤과 데칸이 도착했다.
“모시러 왔습니다, 황후 폐하.”
* * *
수도에 있는 피엘리온 가의 저택은 궁에서도 별로 멀지 않았다. 마차를 타고 삼십 분 정도만 달리면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라실리아가 피엘리온 가에 도착하는 시간은 그 곱절이나 됐다. 마차 앞뒤로 근위대가 각 서른 명씩 따라붙으면 속도가 두 배쯤 느려지는 모양이었다.
“소문이 도는 이런 때일수록 폐하와 함께 다니는 모습을 보이시는 게 더 나았을 겁니다.”
라실리아의 마차에는 데칸이 함께 타고 있었다.
원래 세르벤이 곁을 지켜야 했지만, 그는 지금 말단 기사로 강등된 터라 뒤에서 말을 탄 채 따라오는 중이었다.
내내 망설이는 듯하던 데칸이 결국 입을 열었다.
세 명의 그림자 기사들은 서로 다른 듯하면서 비슷했다.
황제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도무지 말을 아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폐하께서도 굉장히 섭섭해하셨습니다.”
함께 오겠다는 레스칼을 말린 게 라실리아였다.
황실이나 피엘리온 가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해 보면 데칸의 말이 맞았다. 그러나 라실리아는 이렇게 마음이 복잡한 순간 도저히 레스칼의 곁에 있지 못할 것 같았다.
라실리아를 가장 혼란스럽게 만드는 건 레스칼의 존재였다.
“그대의 말이 옳다는 것은 알아.”
“폐하를 거절하신 이유는 여전히 같습니까?”
그 말은 여전히 피엘리온 소공작을 떠올리고 있느냐는 질문과 같았다.
오해를 자초한 게 자신이었으니 따로 할 말이 없었다.
“애쓰는 중이다. 폐하께 한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라실리아는 대충 에두른 답을 댔다.
데칸의 조용한 눈이 라실리아를 살폈다.
제국 내 유일한 주술사의 눈은 아주 깊은 물 같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빌려 쓰는 주술사의 눈은 어쩌면 평소에도 사물에 가려진 것들을 볼 수 있을지 몰랐다.
“거짓을 말씀하시는 것 같진 않군요. 피엘리온 소공작에 대한 마음이 깊게 남아 있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로군.”
“게다가 폐하께 피엘리온 소공작에게 내려진 수배령을 거두라는 청도 한 번 하지 않으셨고요.”
“……? 내가 청을 하면 그가 저지른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건가?”
“소공작의 죄는 명확합니다. 재판에 개입하는 것은 귀족이라 해도 처벌을 피할 수 없는 중죄입니다. 하지만 법과는 별개로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 말이 맞을 것이다.
이미 황제는 이베트라는 예외를 만들었으니까. 그러기 위해서 이베트를 입양하겠다는 황당한 소리도 했다. 레스칼을 제외한 모두가 어이없어하던 표정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우스웠다.
“그걸 모르시지는 않을 텐데요. 그래서 처음부터 소공작에 대한 애정 같은 것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이 들기도 합니다.”
“…….”
제국의 주술사는 예리했다.
소공작에 대한 애정 때문에 도망치려고 했다는 거짓말을 고수하기가 난처해진 라실리아가 대화를 잘랐다.
“내 감정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경의 역할이 아닐 텐데. 이쯤에서 그만두도록.”
“주제넘었습니다.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데칸이 깔끔하게 사과를 했다.
하지만 데칸이 할 말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델라르타는 최근 왕이 바뀌었습니다.”
“뭐……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델라르타라는 이름이 예기치 않게 튀어나왔다.
“왕이 급사해 왕제 중 하나가 왕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왕자는 인근의 라나디아령으로 도피했고, 새 왕의 왕관을 거부했다 했습니다. 조만간 내전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결국 왕이 죽었다. 리카르도 왕제가 죽였을 것이다.
자신은 신께 예언을 받았음에도 왕의 죽음을 말리지 못했다.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죄책감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어째서…… 내게 그런 얘기를 하는 건가.”
“폐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델라르타의 근황을 조사해 황후 폐하께 알려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알아본 것은 대략적인 것입니다. 특별히 알기 원하시는 정보가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따로 알아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왜 갑자기 델라르타를……!”
“황후 폐하께서 그곳에 가고 싶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치유의 신전이 델라르타에만 있는 게 아닌데 그 먼 곳을 가려고 하셨던 이유가 따로 있으리라 짐작하셨습니다.”
몹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델라르타에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다는 말을 먼저 꺼내 든 것도 황제였다. 그것도 모자라 궁금해하는 소식이 있으면 알아봐 주라고 했다.
그건 마치 자신이 델라르타에서 왔다는 걸 알고 있기라도 한 듯한 행동이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이 카르타헤나 피엘리온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을 넌지시 전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상했다.
황제는, 자신이 진짜 황후가 아니라 하더라도 상관없다는 걸까.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뒤바뀌었다는데 그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면, 그렇게 여기는 사람이 이상한 게 아닐까.
하지만 정말로 그런 거라면…….
‘……나는 더 이상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게 돼.’
피엘리온 소공작을 좋아해서 거부할 수밖에 없다느니 하는 거짓 변명 같은 것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원래는 델라르타의 예언자였고, 가장 신뢰하던 이에게 배반당해 죽었고, 알 수 없는 이유로 황후의 몸으로 되살아났다는 말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진짜 반려라는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입장이라는 해명도 할 수 있었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이제껏 라실리아는 황제 앞에서 자신이 죽는 이유가 가짜 황후라는 걸 들켜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과 황제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 예언에서 자꾸 어긋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계속 이어지는 생각에 데칸이 쐐기를 박았다.
“만일 델라르타가 그리우신 거라면 뭐든 말씀을 하십시오. 그 어떤 것이라도 원하신다면 들어 드리라는 폐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나는……. ……잠깐, 뭐라고?”
“델라르타가 그리우시다면, 이라고 했습니다.”
그립다는 말은 지금은 없는 것에 대한 미련을 의미했다. 바꿔 말하면 예전에는 지니고 있었던 무언가에 대한 감정이었다.
그러니 데칸은 지금 라실리아에게 혹시 델라르타를 떠나온 게 아니냐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라실리아가 저도 모르게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건……,”